도대체 어디까지 파고들 것인가? 몸을 맡겼다. 밤이면 문턱에서 서성거리던 녀석이 음흉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꿈틀꿈틀 검은 안개로 피어오르더니 방 안으로 퍼져 나갔다. 침대 위까지 차오르더니 검은 바다를 만들었다. 누워있던 나를 덮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끌려 내려 갔다. 잠을 잊었다. 몸은 타들어 갔고 머리는 검은 안개에 젖어들었다.
슬럼프였다.
허걱, 잊었던 숨을 몰아 쉬고 생각이란 것을 했다. '깨어있어야 한다.'
목표라는 판자 하나를 검은 바다에 띄우고 겨우 머리를 내밀었다. 판자에 매달려 드문 잠이 들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내 잠꼬대에 놀라 선잠에서 깼다.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문제를 모르니. 답은?
없다.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한 목표는 검은 바다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자.' 글을 쓰는 이유를 돌아봤다.
나를 만나자.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야. 오롯이 나로 살기 위해 글을 쓰는 거야. 그러다 불쑥 다른 생각이 솟아올랐다. 글은 어차피 보이는 거야. 읽는 사람 없는 글은 신기루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잖아.
고개를 저으며 명상을 했다.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촉감. 펜을 쥘 때 느껴지는 손가락의 힘.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 그리고 다시 끼어드는 생각. 그래 평생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껴봐. 매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글을 쓰고 있지. 돌고 도는 생각들... 돌고 도는 그렇고 그런 글들.
시끄러워, 닥쳐!
노트북을 덮었다. 펜을 놓았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자신의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Writing Down the Bones)'에서 글쓰기를 방해하는 생각들을 원숭이 마음(monkey mind)이라고 했는데... 어느새 내 머릿속은 원숭이 공원이 되어 있었다. 원숭이들한테 마음을 내어 주고 머리채를 내어 주고 있었다. 허허로이 웃다가 생각은 10년 전 장가계의 숲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개인적으로 단체여행을 싫어하지만 그때는 어머니 칠순이었다. 식구들과 그리고 다른 여행객들과 함께 장가계의 자욱한 나무 숲 길가를 걷고 있었다.
'욱, 욱.'
어디 있었는지 원숭이들이 모여들었다. 복화술을 하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욱욱 거리던 원숭이들이 어느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원숭이들은 우리 일행 주위를 에워쌌다. 일행 중 몇몇이 '어머, 원숭이야. 새끼 업은 애들도 있어.'라는 말을 주고받을 때였다.
"으아악~"
비명 소리가 숲을 타고 흘렀다. 원숭이 몇 마리가 일행 중 한 사람의 가방과 머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머리 위에 올라탄 원숭이는 '뭘 이 정도 가지고 놀라시나?' 하는 표정으로 볼을 긁고 있었다. 일행 중 몇몇은 푹 터지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고 몇몇은 대 놓고 웃었다.
"나 무서워. 정말 싫단 말이야."
그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사태는 심각해지고 있었다. 몇몇 원숭이들은 대놓고 그 사람의 몸을 타고 올랐고 한 두 마리는 그 사람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그 사람의 남편이 다가가 원숭이들을 쫓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도망가는 척하면서 한 마리는 남편의 등짝을 타고 날아올랐고 다른 녀석은 휙 몸을 날리더니 어깨와 머리 사이를 조롱하듯 오고 갔다. 남자들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 원숭이들을 쫓아냈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다음 목표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다음 목표물은 너무도, 당연하게도, 서럽게도 나였다. 여자에다가 가늘고 약해 보이는... 툭 치면 으아악, 소리를 지르면 방방 뛸 것 같은. 원숭이 중 한 녀석이 나에게 고개를 돌리자 모든 원숭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나름 중국에서 살았고 (그래봤자 베이징 도시 한복판이었지만) 야생은 아니더라도 깊은 중국 산으로 여행 가서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원숭이들을 보아온 터라 원숭이들의 속성을 조금은 알았다.
'원숭이 녀석들, 만만하게 보이면 한도 끝도 없이 기어오른다.'
배낭을 앞으로 돌려 메고 머리를 풀어헤쳤다. 어깨를 부풀리고 양 팔꿈치를 들어 몸을 키워 보였다. 눈에 힘을 팍 주고 주위를 돌아봤다.
'다 덤벼 봐라. 내가 앞 발을 휘젓고 뒷발로 차 줄 테니.'
내 눈빛이 달라지자 다가오던 원숭이들이 그대로 멈췄다. 그중에 대장격인 녀석이 내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었는데 녀석을 노려봤다. 녀석이 흠칫하더니 '내가 뭘 어쨌다고?' 하는 표정으로 눈을 돌리더니 먼 산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저 지나가는 원숭인데요' 하듯 몇 걸음을 옮기더니 다른 원숭이를 아는 척했다. 욱욱, 욱욱. 그들만의 복화술로 내 앞담화를 했다. 다시 주위를 돌아보니 다른 녀석들도 나에게서 물러나 나무 위로 한 걸음씩 후퇴하고 있었다.
"자 이제 갑시다."
가이드 말에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으아악!"
아까 그 사람의 비명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졌다. 어느새 다시 그 사람의 머리와 가방에 올라탄 원숭이들이 이번엔 큰 소리로 묻고 있었다.
"왝왝왝, 왜애액."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질문이 많았다. 모든 게 '왜'였다.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셨을 때 산을 올려다보았다.
"산은 왜 산일까?"
머리를 수그리고 계곡물을 내려다보았다.
"물은 왜 물일까?"
이유가 없는 것은 이유를 찾지 말아야 하고 답이 없는 것은 묻지 않는 것이 지혜라 했는데. 어린 나는 어떤 게 이유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답이 없는 것은 왜 답이 없는지 그 또한 궁금하다.
어릴 적 외할머니댁에 놀러 갔을 때였다.
"소려야 밥 먹어라."
커다란 밥상을 내려놓으시는 할머니께 여쭸다.
"왜요?"
할머니가 멀뚱 나를 보셨다.
"왜 밥을 먹어야 하는데요?"
내 말에 밥상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앉던 나보다 열 살 많은 고등학생 삼촌이 대신 대답했다.
"왜요는 왜 나라 요고. 입 닥치고 밥이나 먹어."
내 머릿속은 바빠졌다.
'왜 나라 요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리고 어떻게 입을 닥치고 밥을 먹지?'
삼촌에게 물으려다가 말았다. 나를 노려보는 삼촌의 눈에서 점점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중에 왜 나라에 가면 '왜요'는 볼 수 있을 테니까 별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다시 같은 질문에서 막혀버렸다. '어떻게 입을 닥치고 밥을 먹지?' 혼자 진도를 나아갔다. 입을 열고 음식을 씹으면, 입속의 음식이 보이니 흉하겠구나. 닥치고 씹어야겠네. 그리고 음식을 삼키려면 음, 입을 닥치는 수밖에 없군. 그런데...
어린 삼촌은 내 맘을 잘 알았나 보다. 나를 노려보던 삼촌이 한 마디씩 했다.
"씹어"
우물우물.
"삼켜."
꿀꺽!
"먹어"
내가 손가락으로 꽉 다문 입을 가리키자 삼촌이 소리쳤다.
"열고 넣어."
삼촌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지난 주말, 대학 동기들과 여수로 놀러 갔다. 나이 들수록 귀가 막히고 머리가 막히는 모습을 한탄하다 한 친구가 말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신을 깊이 돌아봐야 해."
친구 말이 옳다 동의했다. 그러다 한마디 더했다.
"그런데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다 보면 내 존재의 이유가 궁금해져."
나를 잘 알고 있는 다른 친구 하나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며 앙칼지게 말했다.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 말란 말이야. 적당히 들어가야지."
"어디까지?"
눈을 꿈벅이던 친구가 눈과 머리를 굴리며 단어를 고르더니 대답했다.
"현실! 제발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라."
"그래, 현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현실 밑바닥 깊숙이 숨어있는 나의 3분의 2 이상을 모른 척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자가 질척거리며 끌려왔다.
그래, 현실.
현실 위에 서서 뒷발가락에 힘을 주고 노려보자 마음속 원숭이들이 조금은 조용해졌다. 머리를 긁적 대며 나와 컴퓨터 모니터 사이로 머리를 들이미는 왕초 원숭이, 이 녀석만 한 대 때려주면 되는데... 답이 없는 것에 질문을 하고 이유가 없는 것에 이유를 찾아 헤매는 나는 마지막 한 방을 날리지 못하고 있다. 가끔은 내가 바로 원숭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
그러다 다시 궁금해졌다. 왜는 왝의 줄임말일까? 왝이 인간의 언어로 진화돼서 왜가 된 것일까?
아, 머리 닥치고 글이나 쓰자!
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