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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May 27. 2023

화려하지만 단아하게


선물 받은 수국이 햇살에 반짝인다. 나비 수국이다. 몇 년 전부터 갖고 싶었는데 이제야 인연이 닿았다. 

나비 수국은 꽃잎 모양이 나비가 내려앉은 것 같다. 꽃잎은 12개에서 15개. 자연의 규칙은 셀수록 아름답다. 세 개의 작은 꽃잎이 대칭을 이루고 그 밑으로 조금 큰 꽃잎이 세 개. 그리고 다시 밑으로 더 큰 세 개의 꽃잎이 대칭을 이루다가 그 밑으로 세 개에서 5개의 꽃잎이 9개의 꽃잎을 받쳐준다. 작은 꽃잎들은 밑의 꽃잎들한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제 잎을 살짝 오므리는데 그 모습이 한 마리 나비 같다.


나는 수국을 좋아한다. 수국이란 꽃을 보지도 못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대학교 2학년 때, 동문 선후배들과 MT를 갔다. 여학교 MT라서 거하게 술판이 벌어지지 않았다. 페트병으로 사 온 깡 소주는 방 한구석으로 밀려났고 탄산음료와 과자로 '수다방'이 열렸다. 그러다 회장 선배가 제안을 했다. 서로서로를 꽃으로 표현해 보자고 했다. 장미니 국화니 하는 흔한 꽃이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다 후배 하나가 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언니는 수국 같아요. 화려해 보이는데 다가가 자세히 보면 꽃 하나하나가 단아한 수국이요."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반 이상은 수국이 어떤 꽃인가 생각하는 것 같았고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반 이상은 소려가 그런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을지 모르지만 그 후배는 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돌아와 수국을 찾아보았다. 처음에는 커다란 꽃 뭉텅이가 부담스러웠다. 화려하기도 하고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꽃송이를 보았다. 정말 꽃이 단아했다. 어차피 꽃덩어리들 사이에 섞일 거라고 함부로 제 잎을 굴리는 꽃송이는 하나도 없었다. 하나하나가 꽃잎을 다듬고 가늘고 긴 목을 빼고 있었다.


난 단아하지 않은데 후배가 너무 곱게 봐준 것 같아  민망했다. 화장도 하지 않는데 왜 화려해 보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다 부끄러워졌다. 선배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세상을 다 아는 척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아픔을 숨기기 위해 더 요란하게 굴던 속내를 후배에게 들킨 것도 같았다. 귀에서 찰랑거리던 분홍색 링 귀걸이를 떼어냈다.

단아해지고 싶었다. 겉으로도. 속으로도. 바람에 꽃 뭉텅이를 휘청거리더라도 한 잎 한 잎 고운 꽃을 피워내고 싶어졌다.


우리 집을 지어주시던 사장님이 좋아하는 나무 있냐고 물으셨다.

"수국이요."

"잘 됐네요. 저 쪽 땅에 수국이 많거든요."


사장님이 수국이라며 5그루를 심어주셨다. 하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알던 수국이랑 달랐다. 목수국이라고도 불리는 불두화였다. 

물론 불두화도 아름답다. 꽃들은 부처님 머리카락처럼 몽글거리고 만지면 적당한 무게감으로 손바닥에 몸을 기댄다. 향기는 별로 없지만 꽃잎들은 다른 하얀 꽃들과는 달리 잎이 누렇게 변하기 전에 땅에 내려앉는다. 이른 봄에 내린 눈 같다. 그리고 소리소문 없이 땅 속으로 스며든다.

쭈그리고 앉아 꽃이 떨어진 불두화 꽃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쓸쓸해 보였나 보다. 남편이 수국 사러 가자고 한다. 얼른 따라나섰다. 장날, 파란 수국을 사다가 연못가에 싶었다. 

수국은 땅이 알칼리냐 산성이냐에 따라 파래지기도 하고 붉어지기도 한다는데 연못가에 옮겨 심은 수국은 여전히 파랗다. 이제 5년 차가 된 녀석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보다 10배는 커졌다. 가지는 내 손가락보다 굵어져서 꽃을 뭉텅이로 피워내도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로 하늘을 찌르고 있던 녀석이 다시 여름이 온다고 푸른 새싹을 내밀며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자연의 섭리니 수국은 여전히 화려하고 쓸쓸하고 단아할 것이다. 벌레가 무서워 마당에도 나가지 못하는 나는 2층 테라스에 앉아서 녀석을 바라볼 것이다. 화려한 머리를 휘청거리겠지만 안다. 녀석은 하나하나 단아한 꽃잎을 만들어 낼 것이다. 


 안방 창가, 아직 어린 분홍색 나비 수국을 바라본다. 나에게 날아와 내려앉은 인연. 원한다면 너도 마당에 심어줄게. 무럭무럭 자라주렴. 나도 너처럼 살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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