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말_"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by 혜담


늦은 설거지를 하느라 달그락거리고 있는데, 아이 방에서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 소리 같기도 한 것이 들려서 놀라 뛰어들어갔다. 아이는 화가 난 듯 인상을 쓰며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아 정말! 뭐야! 아이씨!"

성질을 내며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또 웅얼거린다. 매우 슬프고 화나고 안타깝고 울먹임이 느껴졌다. 저녁에 본 야구 경기를 꿈에서까지 되짚고 있는 것이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이 인천 문학 경기장에서 있었고 우리 팀이 안타깝게 패배했다. 토요일에 치러진 4차전에 승리하여 2:2가 되면서 승부는 다시 원점이었는데, 이번 경기에 져서 2:3이 된 것이다. 내일은 상대팀의 최강 투수가 선발이라 승리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아서 오늘의 패배가 너무나 뼈아픈 일이 되었다.


어제부터 이 경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려 온 아들에게 (물론, 나에게도) 너무나 충격적인 패배였다. 저녁 6시 30분에 시작한 경기는 8회까지 거의 3시간을 완벽한 플레이를 펼치며 4:0으로 이기고 있었다. 그러다 8회 말 실책을 시작으로 4:2로 쫓기고 다시 9회 말에 스리런 홈런을 맞아 불과 몇 분 만에 역전패를 당하고 만 거다. 나는 그 황당함에 지금까지 명치에 뭔가 탁 걸린 듯 답답하고 아픈데 아들은 꿈속에서 저렇게 울부짖을 만큼 속이 상했나 보다.


내가 야구팬이 된 것이 2019년이니 오래된 팬은 아니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무관중으로 경기를 진행하다가 관중 입장이 가능해졌을 무렵이었다. 방학이라 한국에 나와 있던 나는 뜬금없이 야구장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밤늦게 중계되는 각종 스포츠 중계를 즐겨 보셨다. 덕분에 나도 야구나 축구 같은 스포츠 경기를 좋아했다. 대학 때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농구장으로 달려가 허재, 서장훈, 현주엽 같은 걸출한 스타들의 경기를 보곤 했다. 배구 시합도 자주 보러 다녔다. 특별히 응원하던 팀은 없었지만 소리 지르고 손뼉 치며 선수들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식었고 이후 오랜 세월을 그것들과 담을 쌓고 살아왔다.


코로나 때문에 답답하던 나는 관중 입장이 허용된 탁 트인 야구장에서 해방감을 맛보고 싶었는지 야구장에 갈 결심을 하게 된 거다. 응원할 팀을 골라야 했다. 연고지를 중심으로 정하자면 두산과 LG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이미 어마어마한 팬들이 있는 팀들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이 연고지인 팀이 또 있었다. 나는 다음 세 가지 연관성에서 운명을 느꼈다.


첫째. 버건디 색(내가 좋아하는, 보라색과 더불어).

둘째. 마블 히어로즈 광팬 아들

셋째. 내 증권계좌


그리고 홈구장이 돔구장이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경기를 보러 갈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쏙 들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이 팀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방학이 끝나고 멜버른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총 6개월을 코로나 락다운으로 집밖 5 킬로미터 이상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 기간에 우리 가족의 유일한 낙은 KBO 경기를 보는 것이었고 이 팀을 응원하며 2019년과 2020년을 버텨냈다. 너무나 고마운 팀이다.


이 팀, 남들 다 있는 대기업 구단주도 없는 그야말로 언더독이 천신만고 끝에 올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팬이 되고 난 후에야 그동안 이 팀이 거쳐온 역사를 알게 되었다. 많은 사건 사고로 우여곡절을 겪었고 야구팬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는 거친 팀이다. 팀 선수 전체가 받는 연봉이 메이저리그급 선수 한 명의 연봉보다 적은, 그야말로 열정페이에 몸을 불사르는 선수들이다.그래지 나는 더 애틋하고 감싸주고 싶다. 우리 가족들의 첫사랑이었던 영웅 몇 명이 국내외 다른 팀으로 트레이딩 되는 서럽고 마음 아픈 일도 겪었다. 팀에 돈이 없어 서란다. 그래서 한국 야구의 내로라하는 간판선수들보다는 젊은 선수들이 많다. 경험이 부족하고 심리 컨트롤에 능하지 못한 선수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번 경기만 해도 상대팀 선수들의 노련함이 돋보였다. 그들의 역전승이 바로 그 관록을 보여줬다.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늘과 같은 드라마를 자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비록 오늘은 남의 것이긴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다 이겼다고 생각했을 우리 선수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면서 마음이 짠했지만, 야구는 그런 것이다. 오늘 그들의 환호성은 몇 이닝 전 우리들의 것이었고, 어제도 우리들의 것이었다.(앞으로도 우리들의 것...) 모든 스포츠가 그럴 테지만,
야구의 매력은 바로, 결과를 '더 알 수 없다'에 있는 것 같다 마치 인생처럼!

다 잡은 승리가 한순간 상대편의 상승 기류에 휩쓸리면 대량 실점으로 판이 뒤집어진다. 반대로 다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의 작은 실수 하나가 기회가 되어 역시 판을 뒤집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야구는 심리게임이라고 한다. 아홉 이닝 동안 어느 쪽이 더 집중력을 발휘하고 방심하지 않느냐에 승패가 갈린다. 또 운도 많이 작용한다. 반드시 실력대로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1위 팀을 이겨 놓고도 자기보다 낮은 순위 팀에 지기도 하고, 유난히 패배가 잦은 천적 팀도 존재한다. 아무리 하위 팀이라도 늘 지는 것도 아니다. 심리전이라 내내 잘 던지고 잘 치다가도 어쩌다 실수하면 와르르 무너져버리니 상대팀 선수보다 자신과 싸우는 것이 더 힘든 싸움이다.

정해진 시간이 없으니 경기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연장으로 이어진 사투에서 선수들이 보여주는 승부욕과 집념은 감동적이다. 또 몸싸움은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이 점이 특히 좋다). 그 어떤 스포츠 못지않은 피 말리는 혈투가 벌어지기도 한다. 거기에 야구공이 배트에 맞을 때 나는 '딱' 소리와 그 공이 담장을 넘겨 버리는 장면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나는 야구 경기를 보면


이길 수 있었는데 끝에 왜 졌느냐? 질 것 같았는데 끝에 어떻게 이겼느냐?


를 생각한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떤 내적 요인이나 외적 작용으로 인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오래도록 지지부진하다가 역시 한순간에 대반전을 맞아 떡상하는 것

힘들게 얻은 것도 경계하며 지키지 않으면 또다시 한순간에 잃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러고도 몇 번의 기회가 남았다는 것

야구와 우리의 삶에서 똑같이 맞게 되는 상황이다. 야구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시합 후 나보다 더 마음 아파했을 선수들이 부디 너무 낙담하지 않길 바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니까. 몇 개의 전투에는 졌더라도 전쟁에 승리할 수 있는 거니까. 열심히 뛰어준 그대들 덕분에 팬들의 삶이 더 풍성하고 행복해졌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 선 것만으로도 그대들은 영웅들이니까!


ps.1 오늘 저녁(날 바뀜 11월 8일) 니케 Nike가 그대들과 함께 있기를, 파이팅!


Ps.2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한 이 팀을 나는

"골리앗과 싸워 진 다윗" 이라고 부르련다!

행복했던 2022년 가을이었다. 생했어요. 나의 멋진 히어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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