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질문을 멈추게 되는 걸까. 어린아이는 “왜?”를 입에 달고 살지만, 어른이 되면 “말해 보았자 달라지는 건 없잖아.”라고 말한다. 질문은 점점 사라지고, 확신과 회피, 단정과 피로가 그 자리를 채운다.
하지만 내 논술 수업에서는, 그 멈췄던 질문이 다시 고개 들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손 들기, 망설이다가 꺼낸 한마디.
“선생님, 이건 꼭 정답이 있어야 하나요?”
“이건 이렇게 다르게 해석할 수 있지 않나요?”
그 순간, 수업은 설명이 아니라 사유의 장이 된다. 그리고 질문이 시작되었을 때, 비로소 진짜 수업이 시작된다.
질문은 단지 궁금증의 표현이 아니다. 질문은 권력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왜 그래야만 하죠?”
라는 질문은 이미 기존 질서에 대한 문제 제기다. 진정한 교육은, 아이들이 기존의 정답을 의심하고 자신의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그 시작은 언제나 질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질문은 용기가 있어야 한다. 틀릴 수도 있다는 불안, 다르게 본다는 두려움, 고요한 교실의 공기를 깨야 한다는 부담. 그래서 나는 질문하는 아이를 작은 혁명가라고 부르고 싶다. 그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교실은 비로소 살아나고, 진짜 글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논술 수업 현장에서 질문은 생각보다 드물다. 아이들은 좀처럼 질문하지 않고, 질문받기를 기다린다. 아니, 질문받기조차 꺼리는 것이 다반사이다.
질문은 주로 강사인 나의 몫이다. 아이들이 필독서를 읽고 오면 (너무 바쁜 고학년 아이들의 경우 필독서를 읽고 오는 것조차 기대하기 힘든 날도 많다.) 논술 교재에 정해진 질문이 준비되어 있다. 아이들은 답변하거나 교재에 자신들의 생각을 쓰고 발표한다. 나는 예상 답변(?)과 비교하여 부족한 부분에 설명을 덧붙인다. 정답을 찾는 데 익숙한 아이들은 열심히 필기를 시작한다. 심지어 ‘자신들의 답변이 틀렸다!’라고 생각하며 아쉬워 하기도 한다. 수업 마지막 순서로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그날의 글쓰기'를 하는 동안 나는 아이들의 교재를 읽어보며 첨삭을 남긴다. 아이들이 제출한 글은 첨삭과 간단한 소감을 곁들여 다음 수업 시간에 돌려주며 1:1 코칭으로 마무리한다. 매일매일 수업 시간이 너무 짧다고 나는 느낀다.
나는 이 구조가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하지만 논술 교육이 학원의 상품이 되는 순간, 교육은 설명과 생산으로 귀결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아이들이 받아 적은 문장, 교사의 흔적, 부모가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겨야 하는 것이 강사가 직면한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사유는 정답 속이 아니라 질문 사이에서 태어난다고 믿기에 나는 말수를 줄이고 싶다. 더 말하지 않음으로써 아이들이 스스로 묻게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말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는 어떤 개념도 정의하지 않았고, 어떤 진리도 단언하지 않았다. 다만 질문했을 뿐이다.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선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의 방법은 ‘산파술(Maieutics)’로 불린다. 철학자가 지식을 주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생각을 ‘출산’하게 돕는 존재라는 뜻이다. 논술 수업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교사가 답을 가르치기보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 그 질문이 아이들의 사유를 자극하고, 질문과 질문 사이에서 한 편의 글이 태어나게 하는 것. 이것이 논술 강사의 궁극적 역할이고 책임이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했다. 그의 이 말은 곧, 검토되지 않은 주장, 돌아보지 않은 신념은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논술 수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지 주장을 쓰는 기술을 익히는 게 아니라, 그 주장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겨냥하는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묻고 또 묻는 것. 그 과정이 곧 사유의 훈련이고, 인문 교육의 핵심이다.
“정말 그런가?”, “나는 어떤가?”,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그래서 좋은 글은 곧 새로운 질문을 낳는다. 그 순간 글은 지식이 아니라 ‘사고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된다.
논술 강사는 점점 말수를 줄여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말이 많고 내 목소리는 학원이 있는 상가 2층 복도를 우렁우렁 공명시키며 내 후두를 거칠게 할퀸다. 매일 목이 쓰리고 아프다.
가끔 아이들이 먼저 질문의 물꼬를 트는 날도 있다. 나는 반갑게 되묻는다.
“그건 왜 그렇다고 생각해?”
이렇게 대답하고 나면 교실엔 정적이 흐른다. 하지만 그 침묵을 사랑하고 싶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 생각이 자라고, 그 생각이 글이 된다. 논술 수업은 그런 침묵 속에서 자란다. 질문 하나, 그리고 생각 하나. 나는 말하는 교사가 아니라, 묻는 교사가 되고 싶다. 질문을 남기고 나오는 교실이, 내가 꿈꾸는 수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