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뭇국

by 혜담




긴 시간 푹 우려낸 육수에

네모난 무가 달큰하게 어우러진

소고기뭇국


명절날, 제삿날

어린 내가 좋아한 것은

지글지글 지짐이 보다 말간 무가 끓고 있는 국솥


엄마, 고모, 할머니

이제는 먼 길 떠난 님들이

새벽,

불 켜진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끓여 내어

아침 한상에 둘러앉아 훌훌 떠먹던

소고기뭇국


꼬물꼬물 병아리 같던 내 아이가

가장 먼저 먹은 국도

소고기뭇국


맑은 물 받아

다시마,납작 썬 무, 쑹덩쑹덩 소고기를

작은 무쇠솥에 넣고

한소끔 두소끔

다진 마늘 송송 썬 파

심심하게 간을 해서

소꿉장 같은 그릇에 담아

모락모락 흰쌀밥과 후후 불어 떠먹여주던

소고기뭇국


한솥 끓여 하루 먹고

또 하루 끓여 내고

엄마가 그리운 날 더 생각나는

소고기뭇국


오늘 아침 나는 부엌에 서서

소고기뭇국을 끓인다.



'쾅'.

비까지 얹은 바람이 힘껏 밀어버렸는지 창문이 큰 소리를 내며 저 혼자 닫혔다.

놀라 다가가 창밖을 내려다보니 후두득후두득 빗줄기가 가로수 단풍나무들의 정수리를 매섭게 때리고 있다. 잠깐 내리다 그친 비였는데도 그새 서늘해진 공기가 훅 들어와 코가 매큼하고 찡찡하다.


폭염, 가뭄, 홍수

성난 자연의 따끔한 맛에 모두가 벌벌 떨었던 여름이었다.

에어컨을 틀어놓았는데도

불앞에 서서 끼니를 지을 때면 여전히 땀이 흘러내렸다.

설렁설렁 가볍게 조리해서 시원하게 뚝딱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면 충분했다.

뜨거운 것이 싫어서 삼계탕 한 번 안 먹고 삼복을 넘긴 여름이었다.


그런데 요즘 슬슬 뜨끈한 국이 먹고 싶어진다.

소고기뭇국, 미역국, 김치 콩나물국, 우거지 된장국, 굴 해장국, 아욱국, 오징어 뭇국. 배춧국.

나도 좋고 식구들도 좋아해서 곧잘 끓여 내는 국 들이다. 그중 소고기뭇국에는 나만의 애틋한 이야기가 있다.


어렸을 때 나는 육고기(소고기,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기억으로는 중학교 들어가고 한참 지나서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될 것 같기에 결심하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입도 짧은 데다가 고기도 입에 안 대니 내 별명은 늘 '이쑤시개', '젓가락', '빼빼시' 였다. 몸도 약해서 걸핏하면 다리에 쥐가 나 데굴데굴 굴렀고 가족들에겐 말 안 했지만 헛것도 보고 밤이면 가위에 눌리기도 했다. 어른이 된 후 고기를 가리지 않고 먹게 되었는데 여전히 조금 많이 먹었다 싶으면 종일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장을 비워내야 하는 딱한 처지이긴 하다.


고기를 안 좋아하던 내가 유일하게 맛있게 먹었던 고기가 소고기뭇국에 빠져 있는 고기였다. 소고기뭇국은 주로 명절날이나 제삿날 혹은 집안 행사 밥상에 많이 올라왔다. 푹 익혀 부드러운 소고기와 납작한 무가 푸짐하게 들어간 국 대접에 흰쌀밥을 말아 먹으면 너무나 맛있었다. 이 맛있는 국밥을 평소에도 자주 먹고 싶었지만 소고기(한우)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쌌다. 게다가 우리 집안 장남인 남동생은 구운 고기, 그것도 소고기가 없으면 밥을 안 먹었는데 둘째 딸 입에 들어갈 소고기까지 챙기자니... 우리 엄마가 좀 힘드셨을 것 같다. 이해한다.


'소고기뭇국'을 생각하면 늘 시끌벅적하다. 아버지께서 7남매 장남이셨던 까닭에 이런저런 집안 모임이 정말 많았었다. 그런 날이 되면 우리 집엔 할머니 고모, 고모부, 작은 아버지들, 작은 엄마들, 아직 장가가지 않은 삼촌들 거기에 사촌들까지 바글바글했다. 그리고 울 집에서 가장 커다란 국솥에 소고기뭇국이 팔팔 끓는다. 집안 가득 퍼진 그 달큰하면서 깊은 풍미에 행복해진 나는 서둘러 밥상에 앉아 조용히 나의 배식을 기다렸다.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하던 소고기뭇국은 이제 내 아이들도 잘 먹고 아무 때나 내 마음대로 끓여 올릴 수 있는 만만한 음식이 되었다. 엄마가 끓여주신 소고기뭇국의 맛은 내 미각 세포와 대뇌 장기 기억 장치에 저장된 가장 완벽한 레시피다. 나는 늘 그 기억을 꺼내어 다시마, 마늘, 소금, 파로 간을 맞춰간다. 내 어린 시절과 내 뿌리인 사람들이 함께 있는 소고기뭇국. 내 아이들도 이 엄마가 끓여준 소고기뭇국을 달큰하고 진한 사랑과 추억의 맛으로 오래오래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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