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꽃, 해국

by 혜담


내가 아이패드로 꽃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직 멜버른에 살고 있었을 때부터이다

'너의 취미가 뭐냐?"라고 물으면 난 늘 세 가지를 꼽아 왔는데, 첫 번째가 책 읽기, 두 번째가 그림 그리기이고 마지막이 음악 감상이었다. 이제는 독서가 취미가 아닌 '업業'이 되었으니, 남아 있는 것은 그림 그리기와 음악 감상이다. 그림은 유화를 주로 그리고 오래된 jazz를 좋아한다.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무언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라는 과제가 주어지면 잔뜩 그림을 그려놓았다. 한국에 사는 아이들과 달리 학교 다녀오면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아들은 그림 그리기에 빠져들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마블의 히어로들과 스스로 창조해낸 캐릭터, 꼬마 오리 Ducky, 마음에 들지 않던 유치원 친구 빌런 David, 아직까지도 절친인 슈퍼 히어로 Joe, 들이 주인공인 만화를 매일 노트에 그리고 놀았다. 마침 한국에서는 웹툰 작가들의 인기가 엄청났다. 특히, '기안84'가 웹툰 작가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고 혹시나 울 아들도...라는 엄마의 은근한 기대로 아이패드 12인치를 큰마음 먹고 사줬다. 아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메디방'이라는 앱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냥 취미로(^^). 그렸다 지웠다 오려냈다 붙였다 마음껏 신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 디지털 아트의 매력이다.



아들이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옆에서 보다가 '나도 한 번?' 호기심이 발동했다. 보태니컬 아트의 매력에 빠져 파버 카스텔 색연필로 교본을 열심히 따라 그리고 있었던 때였다. 나는 아들이 등교하면 놓고 간 아이패드로 한국의 야생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해외에 살다 보니 '한국의~' 이런 테마는 그냥 좋은 거다. 보태니컬 아트 교본에 실린 꽃들은 화려한 자태와 색감의 서양 꽃들이 많았다. 내가 직접 주제를 선택해 그리기 시작하니 작고 섬세한 우리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햐~ 우리나라 야생화들이 이렇게 예뻤나!" 놀라고 감탄이 나왔다.


우선은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몇 장 추리고 구도를 짜서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마침 방학이라 한국에 나올 수 있었는데 서점에서 한국의 야생화와 식물도감 등을 몇 권 사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다 마음에 안 들면 지우고 다시 그리고 다양한 그림 도구를 사용하면서 채도, 명도, 색 조합 등을 쉽게 조절할 수 있으니 너무 편하고 좋았다. 신세계였다. 틈나는 대로, 때로는 아이 아이패드를 잠시 빼앗아서(?) 꽃 그리기를 즐겼다. '해국'은 그 첫 작품(?)이다.


해국을 첫 그림으로 선택한 이유는, 일단 보라색이어서이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나는 책이나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을 때 보라색 꽃을 보면 무조건 그리고 싶었다.



제비꽃, 도라지꽃, 붓꽃, 산수국, 비비추, 용담, 백리향
고운 빛깔만큼이나 어여쁜 이름을 가진 작은 꽃들!



해국은 옅은 보랏빛을 띄는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나무라고도 풀이라고도 할 수 없는 반목본성 식물이라고 한다. 처음 꽃을 피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한번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여러 해를 피고 진다. 여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늦은 가을까지, 때로는 12월까지도 꽃을 피우는데, 대부분의 꽃들이 꽃잎을 떨구는 가을 끝에 그 빛깔이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게다가 해국이 살아가는 환경도 범상치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바닷가 절벽 돌 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단다. 이름이 海菊인 것도 그 때문이다. 수시로 변덕스러운 바닷바람을 맞는 데다가 초겨울 매서워진 바람에도 끄떡없다니 작고 여린 몸 어디에 그런 야무짐이 숨어있는지 모르겠다. 늘 거친 환경에 놓여있다 보니 줄기와 잎이 나무의 그것들처럼 다부지다고 한다.


해국의 꽃말은 '기다림'이다. 꽃을 피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서 그런 꽃말을 가진 것 같다. 한편으로는 바다를 향해 피어있는 해국을 보면서 바다로 나간 이들의 무사귀환을 기다리던 바닷가 사람들이 붙인 뜻일 수도 있겠다.


너는 무엇을 그리 기다리고 있니? 너의 처지가 꼭 나와 같구나!



연휴 이틀을 비가 내린다. 이 비의 끝에는 진짜 가을이 있을 것이다.

짧게 지나가는 가을, 붉고 노란 나무 잎들이 천지인 길을 산책할 수 있는 계절이 오고 있다.

혹시라도 이 도시의 어느 귀퉁이에서 보라 색이 갈래갈래 바람 춤을 추고 있는 꽃무리를 만나게 된다면...

한 번 멈추어 자세히 들여다보길 바란다. 자기의 때를 기다릴 줄 알고 아이 같은 얼굴 속에 곧은 심지를 감추고 있는 해국일 수도 있으니!


사진출처 : 야생화 백과사전 : 가을편 | 정연옥 | 가람누리



이전 05화호모 이모셔니언 vs AI 이모션리씨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