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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현 Dec 28. 2021

21세기의 자발적 아날로그

글과 사진, 그리고 당신의 마음

2020년 2학기, 학교에서 부전공 수업 중 하나인 '미디어 활용'이라는 수업을 수강했다. 수업은 미디어와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예술을 배우고 기말 과제로 나만의 프로토타입을 구축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기획이라는 것에 관심은 있었지만, 사실 두려움이 컸던 나는 수업 초반부터 과연 내가 어떤 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을지 걱정했다.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활용 사례들은 너무나도 대단하게 느껴졌고 VR, 기술 등에 아무 지식이 없던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그저 내용을 받아 적기만 했다. 괜스레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중간고사 시즌이 다가오고 중간 평가는 발표로 대체되었다. 기말 프로젝트로 어떤 것을 진행할지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것이었다. 최종 프로젝트의 목표는 기획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타깃 유저를 설정해 실제 기획한 바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발표 이전에 선생님과 가볍게 아이디어에 대해 면담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 당시 나는 '노인과 어린이'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현재도 그렇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실제로 실행하는 단계가 필요했기에, 노인을 대상으로 한 기획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지금까지도 함께 지내고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통해 할머니와 어떠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싶었다.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일상이 완전히 변화된 해였다. 비접촉과 비대면이 일상화되었고,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 대신 두려움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변화 아닌 변화로 인해 할머니는 우울감과 무기력함을 느끼셨다. 시장에 가는 것이 작은 행복이었던 할머니는 그마저도 감염병의 위험으로 포기하셨고 대부분 집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셨다. 프로젝트 기획을 고민하면서, 울적해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고 할머니와 진정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구 고령화와 노인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전부터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완화되는 양상을 전혀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의 원인과 노인 존재에 관한 고민의 과정에서 노인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집중해보았다. 사회 내부에서 노인이라는 존재는 개인으로 고려되지 않고, 한 집단의 형태로 비추어지곤 한다. 개별마다 다른 노인들의 층위가 고려되기 이전, 사회에 만연한 노인에 대한 통념으로 그들의 삶과 생각이 단정 내려진다. 한 개인이 아닌, ‘노인이라면 마땅히 이럴 것’이라는 어긋난 시선은 노인의 서로 다른 고유성은 배제한 채, 노인들을 하나의 단일한 통념에 가두어 바라보게 만든다. 노인이 된 사실 자체가 아닌,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낙인이 불안과 우울증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밝혀진 연구 결과 또한 존재한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손편지'였다. 이 기획에서 나에게 필요한 미디어는 바로 손편지였던 것이다. 사실 할머니와 20년의 시간을 보냈지만, 누군가에게 70대의 할머니가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어떤 꿈과 생각을 가졌었는지 설명하라고 한다면 부끄럽지만 명확히 말할 수 없었다. 따라서 글과 사진이라는 아날로그적 미디어를 활용해 할머니와 내면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 <상호 메일링 서비스>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구분되었던 기존 메일링 서비스에서 경계를 없애고 일상 속에 그저 존재했던 것들에서 새로운 지점들을 발견하고 관찰하며 이를 간단한 방식으로라도 표현해 볼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본 프로젝트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움을 감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사소한 것이더라도, 변화 없이 흘러가는 삶 속에서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유의미한 경험과 감각들을 발견하고 확장해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두 번째는 그 과정에서 노인이 능동적으로 우울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프로젝트에서 노인이 프로그램을 제공받는 것을 넘어서, 직접 참여해서 결과물을 도출하고 전달하는 행위를 통해 우울감을 점차 극복해내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잡았다.



할머니께 전달한 사진들


본격적인 프로젝트 실행 전, 할머니와의 사전 인터뷰를 통해서 감정 상태, 현재의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집에서만 한정된 생활을 하다 보니 새로운 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일상의 단조로움이 무력감의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는 중요한 말을 건네주셨다. 예술이라는 다채로운 소통 방법을 활용해 일상의 새로움을 더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나는 매일 아침 주제를 담은 편지를 전달했다. 4일간, 프로젝트의 예술적 역할에 해당하는 창작 에세이, 소설, 사진을 내용에 담았다. 할머니는 편지를 읽고 형식의 제한 없이, 그날 자신의 방식대로 답장을 작성하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새로운 편지와 전날의 답장을 교환하는 과정이 이루어졌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구분되었던 기존 메일링 서비스에서 경계를 없애, 타깃 유저(할머니)와 프로젝트 실행자(나) 모두가 발신자이자 수신자가 되도록 기획했다. 특히 손편지라는 미디어를 활용해서 상호 간의 감정적인 공유와 교류를 강조하고 노인 세대인 할머니가 어렵지 않게 프로젝트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편지를 받고 일상에서 생각해보거나 이야기하지 못했던 주제와 생각들을 직접 글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해보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할머니는 매일 아름다운 문장과 이야기들로 편지지를 채워주셨다.



할머니로부터 온 답장


피드백 인터뷰에서 할머니는 전달받은 글을 읽고 생각하고 직접 써보는 시간에는 우울하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말씀해주셨다. 이전에는 누군가와 소통하는 상황이 아니어서 외롭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이번 기회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자체가 인상적이었다고 덧붙여주셨다. 발신자가 되는 입장에서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었고 일상에서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 생각을 떠올려본 점이 좋았다고 하셨다. 나는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이 과정을 함께 해준 할머니에게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전혀 알지 못했던 할머니의 경험과 생각들을 글을 통해 전달받을 수 있었다. 편지에 가득 담긴 온기와 마음들까지. 3일 차에는 처음으로 할머니가 쓰신 시도 읽을 수 있었다. 아마, 이번 프로젝트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읽을 수 없었을 소중한 시이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처음 편지를 받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엉엉 우셨다고 한다. 나도 할머니의 답장을 받고 몰래 눈물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보았다.



바삐 돌아가는 21세기에서 잠시 멈춰, 소중한 이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아날로그식 소통을 해보는 건 어떨까. 그 속에서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할 무언가를 만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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