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현 Jan 22. 2022

경계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

연극 <테라피>

 누군가는 죽음을 맞아서, 또 누군가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져서, 누군가는 완치에 가까워져서. 각자 다른 이유로 병실의 침대는 비워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6명의 여성 인물이 암이라는 병과 고통을 대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연극 <테라피>는 누구보다도 죽음과 가까이에 있는 여성 암 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특히 병실이라는 한 공간에서 암을 투병하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 현실에서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병과 죽음에 관한 내용을 무대 위에 올린다. 그들은 암의 선고 이후, 일상의 모든 것이 변해버린 상황에서 자신의 삶과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이야기가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그들은 부딪히고 갈등하기도 하지만, 서로의 존재에 유대와 위로를 받기도 하며 주어진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나간다.


  

채워지기 시작하는 공간

 극장에 들어서면, 무대 뒤편에 세워진 갈색 벽과 차례로 놓여있는 6개의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연극 <테라피>는 병실을 주된 극 공간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무대는 전반적으로 단순화되어있고 병실 공간이 사실적으로 재현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단번에 병실이라고 파악되지 않는 모습으로 이후 무대 활용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했다. 자신만의 평상복을 입은 인물들 또한, 서로 다른 모양의 의자처럼 각자의 삶과 성격, 배경을 지니고 있다. 병실에 있는 모두가 암 환자이지만, 인물들은 그 사실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이의 엄마이고 또 누군가는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가고 있다. 치료를 위해 처음 입원을 한 젊은 환자도 존재한다. 의자 아래에는 물건들이 담긴 작은 종이상자가 놓여있다. 배우들의 등장에 따라 의자는 각자의 병실 침대가 되고 상자 안의 물건들은 병실에서의 소지품이 된다. 공간의 전환은 배우들의 지문 낭독과 최소한의 의자 위치 변화로 이루어진다. 공간은 사실적인 구현을 피함으로써, 오롯이 인물들과 그들이 발화하는 상황에 집중하게 한다.


 병실에는 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종교와 민간요법에 의지해보려는 이들도 있지만, 선우는 냉소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암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과 직면하려 한다. 미란도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며 얼마 남지 않은 앞날을 걱정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물들의 병과 삶을 대하는 다른 태도가 드러난다. 연극적으로 동정심을 유발하는 인물도, 슬픔을 강요하는 인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6명의 극 중 인물 모두 평범하고 우리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들이다. 연령대도 20대부터 중장년의 인물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공동 공간인 병실에서 모든 일상을 함께 하고 있다. 가치관과 행동의 차이로 다투고 심하게 갈등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대화와 위로를 주고받기도 하며 삶을 살아간다.


 개개인이 가진 서사와 병실이라는 한 공간 속에서 서로의 관계성이 중심이 되는 작품의 특성상 인물 모두가 중요했다.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는 그들이 전달하는 언어와 감정에 집중하게 했다. 대사와 함께 인물들의 행위와 생각을 전달하는 지문이 낭독되는 형식은 배우들이 서술자와 인물 사이를 오가도록 했다. 배우들은 자신의 장면이 끝나도 퇴장 없이 무대의 양편에 앉아 관찰자의 자리에서 극을 지켜본다. 병실에 있는 환자들이라는 설정이지만, 배우들의 움직임은 제약 없이 비교적 자유롭다. 이렇듯 극에는 사실적인 재현과 비사실적인 요소들이 뒤섞여있다. 이와 같은 연출은 관객이 상상으로 열려있는 공간과 장면을 채워낼 수 있도록 하였고, 무대의 제약을 넘나드는 유의미한 공간을 구현해냈다. 동시에 대사와 장면의 흐름을 분절시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지켜볼 수 있도록 한다.      


[사진='테라피', 2019년 공연 모습 / 출처=글과무대]


고통과 마주하는 것, 그리고 이해한다는 것

 작품은 인물 개개인을 존중하며 그들의 서사를 깊이 있게 그려낸다. 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 뗄 수 없는 것은 죽음이다. 미란은 가장 먼저 죽음을 맞고 이 사실은 선우에 의해 전해진다. 인물들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죽어서 떠나는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죽은 미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애도의 말도, 슬픔의 말도 병실에서는 오가지 않는다. 그 죽음이 자신에게도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루어진 일종의 암묵적 합의이다. 그렇게 가장 두려운 이야기는 발화되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내면에 만연하고 있지만,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어떻게든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암 환자들에게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타인의 말들은 상처로 돌아온다. 두 아이의 엄마인 미란은 심리 상담사에게 당신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다 괜찮아질 거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가두어버리는 상황에 화를 낸다. 관객도 그 모든 감정과 고통의 깊이를 함부로 짐작하고 이해할 수 없다. 암 투병의 부정적인 현실과 고통에 대한 말 외에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던 미란은 처음으로 순옥에게 자기 존재가 잊히는 것이 두렵다고 말한다. 순옥은 미란에게 다 괜찮을 것이라고 위로하고 미란도 아들을 걱정하는 순옥에게 결국 괜찮을 것이라고 말을 건넨다. 그렇게 서로에게 마치 자신에게 되뇌듯이, 모두 다 괜찮을 것이라는 말과 위안이 오고 간다. 같은 상황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던 그 괜찮다는 말이 진정한 위로의 말로 다시 돌아온다. 미란은 죽음을 맞지만, 병실에 TV를 남긴 채 떠난다. 그것도 병실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가까운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미란의 진정한 진심이었을 것이다.


 병실의 인물들이 외부의 가족들과 유일하게 소통하는 방법은 전화를 통해서이다. 하지만 진실한 감정과 사실은 전달되지 못한다. 눈에 눈물이 가득 찬 은희와 순옥도 병에 대한 사실을 전하지 못하고 아진은 현실과 마주한 혼란스러운 마음을 단편적으로 쏟아낼 뿐이다. 전화 너머에 있는 상대방은 그들의 표정과 감정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고통을 대신해줄 수 없고 홀로 겪어나가야 하는 현실을 알고 있는 인물들은 말을 멈춘다. 그러나 병실에서 함께하고 있는 이들은 다르다. 병실이라는 공통의 공간에서 일상을 함께 보내며 서로의 감정과 상태,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인물들은 서로를 동지들이라고 부르며 간식을 나누어 먹고 웃음 지으며 시간을 견뎌 나간다. 그 속에서 가족들에게도 꺼내놓지 못했던 사실들이 이야기되기도 한다. 동성애자인 남편과의 이혼과 자신의 병에 대해 아들에게 말하지 못한 순옥의 아픔, 병원의 유부남 방사선사와 열렬한 사랑에 빠진 서영의 감정이 서로에게 나눠진다. 스스로 고통을 이겨내야 함은 분명하지만, 같은 병을 가진 이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서로를 위안한다.


 은희와 선우의 큰 말다툼 뒤,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만을 보이던 선우가 사실 과거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었다는 아픔이 드러난다. 계속해서 갈등하던 은희와 선우의 연대는 공통으로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진정으로 공감한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 평소와 다른 특별한 행동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경험한 심리 치료의 우스꽝스러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은희는 자연스레 선우에게 화해의 말을 건넨다. 이후에 끝내 병세가 호전되지 못한 은희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진다.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는 은희의 옆에서 선우는 산에 올라 살아있음을 느꼈던 이야기를 한다. 관객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선우 역의 강애심 배우의 모습은 정적이고 담담하지만, 강한 인상과 울림을 남긴다. 힘든 과정 끝에 산 정상에 오르자, 과정에서의 아픔과 고통이 모두 사라지며 열려있는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았던 경험을 말하며 은희를 위안한다. 선우는 은희의 손을 잡고 그 감정을 전하려 하고 은희는 그 손을 붙잡은 채로 극은 막을 내린다.

 

 연극 <테라피>는 개인의 이야기만이 가지는 가치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출발점과 도착점이 있는 산처럼, 삶은 누구나 그 산을 올라 도착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6명의 인물은 그 과정을 함께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연대한다. 삶과 죽음을 다룬 이 연극에 있어, 어떤 결론이 지어지지는 않는다. 극은 삶과 죽음, 그 경계에 놓여있지만,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위안을 주며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겨둔다.

작가의 이전글 엎치락뒤치락 앞으로 나아가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