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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제 Aug 10. 2021

내게 책임감을 요구하지 않는 유일한 것

우리가 스마트폰 중독에 빠지기 쉬운 이유

가만히 생각해본다.

나는 왜 스마트폰 중독인 것처럼 느껴질까.

객관적인 어떤 문항 검사지 같은 것에 기대어 확인하지 않아도,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스스로 원하는 내 모습보다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스마트폰 '따위'에 빼앗기고 있다는 거였다.

매일 밤 혹은 새벽에 하루를 끝내기 싫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스마트폰이었다.

- 그건 스마트폰에서 유튜브나 웹툰 따위를 보느라 그런 것도 있지만, 보다 많은 경우 스마트폰으로 인해 계획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일단 하루를 마감하는 것을 기피하고자 보는 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으로 인해 초래된 자괴감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스마트폰으로 회귀된다는 게 더 큰 문제였고 말이다.


이럴거면 차라리 영화나 책을 보는 게 낫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딴짓을 할 거면, 어차피 영상물로 시간을 때운다면, 유튜브 shorts나 인스타그램 reels 같은 거 말고, 한 편의 완결된 이야기가 있는 영상을 보자. 문화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양질의 영상을 보자.

(이렇게 말하니까 마치 짧은 길이로 재미를 주는 영상을 만드는 많은 컨텐츠 크리에이터의 노고를 폄하하는 것 같아 우려가 되지만, 포인트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싶다. 그리고 그 포인트를 뭐라고 말로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수 있을지 지금 당장은 머리가 굴러가질 않는다. 머리가 굳은 건지 작가 되기는 글른건지 둘 다 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시청하기 전에 내가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겠다고 다짐을 한 뒤 해당 컨텐츠를 소비하는 과정'이 나의 내면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그래, 주체성.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유튜브 영상들,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서 내 관심사를 골라 보여주는 - 근래 들어 인스타그램이 광고로 도배되면서 내 관심사 밖의 것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좁은 관심 영역을 제멋대로 확장시켜버리는 것이다)도 많이 뜨긴 하지만 어쨌든 - 게시물들을 보다 보면 나라는 인간이 한없이 수동적이고 피상적이고 지나치게 단순한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단순한 존재,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는 단순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 띠지에 적혀져 있는 문장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막으면 막아지고 닫으면 닫히는 것이 마음이라면,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까."

마음이 주는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평생을 가벼워지고 싶었지만 (물리적으로도 그렇지만 그거 말고..!) 결코 가벼워지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의 말이나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부러워했지만 나라는 존재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듯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 최은영, 『밝은 밤』, 문학동네 中에서.


- 개인적으로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인용한 위의 문장에서 '한 술 더 뜬' 문장으로 느껴졌다. <쇼코의 미소> 작가의 말의 일부와 연결되어 생각되기도 하였다. 마음을 씻을 수 있다면 나는 박박 닦아주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길 바라면서 그럴 수 없음에 안도하겠지.


어쨌거나,

이렇게 스마트폰을 하는 내 모습이 다른 누구보다 내 자신을 가장 먼저, 가장 정직하게 괴롭게 만들면서도 스마트폰을 쉽사리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주체성과 책임감을 맞바꾼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마트폰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싫어하는 것을 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교육심리학의 강화 이론이 떠오르기도 한다. 너무 오랜만이고 정적 강화, 부적 강화, 소거,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가 무엇인지 생각이 안 난다. 

- 책을 찾아보니 정적 강화, 부적 강화, 제거성 벌, 수여성 벌 이렇게 네 가지 개념이었다. 지금 대응되는 개념으로는 

1) [주체성을 상실하는 것] - [제거성 벌 : 좋아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 

2) [책임감을 요구하지 않는 것] - [부적 강화 : 싫어하는 것을 강화하는 것] 인 것 같다.


물론 제거성 벌은 궁극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약화시키거나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가령, 수업 중 자리 이탈 시 자유시간을 박탈하는 식으로) 여기서는 아무 상관 없다. 그냥 이리 저리 뻗치는 생각일 뿐이니까.


학교와 직장은 당연하고 하물며 여가 생활까지도 나에게 책임감을 요구한다.

영화를 보려면 적어도 두 시간 가량은 자리에 앉아 끝까지 집중해야 한다.

뮤지컬이나 연극은 넷플릭스로 대체되지 않으므로, 더 불편한 좌석에 앉아 엉덩이가 아픈 걸 긴 시간 견뎌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된다.

책은 어떻고. 그 어떤 이야기의 형태보다 인지적으로 가장 많은 관심과 집중과 노력을 요구하는 컨텐츠이다. 생각 없이 향유하는 게 결코 불가능한 자료 형태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왜 소설을 읽는가, 와 관련하여 이전에 시청했던 영상이 떠올라 남겨둔다. KBS에서는 다른 사이트에서는 영상을 재생하지 못하도록 막아두어 썸네일은 흉흉하지만...)


https://youtu.be/3CZN6mkZfDM

대화의 희열 - 인간은 왜 소설을 읽을까? :: 어쩌다 보니 연달아 인용하게 된 김영하 작가의 말.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과 일상에서 지켜야 할 크고 작은 규범들의 압박감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에서조차 어떤 의무를 부여받기가 달갑지 않다. 그래서 언제든지 '내 의지대로' 그만둘 수 있는, 깊게 몰입할 필요 없이 그저 '발만 담그고 있다'고 생각되는 얕은 수준의 인지적 행위를 스마트폰을 통해 수행한다. 무언가를 끝까지 지켜보아야 한다는 책임감과 그것을 성공하지 못했을 시 나를 찾아올 옅은 패배감의 우려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부담스럽도록 소중한 이 시간을, 과연 어떻게 하면 내가 나를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보람차게 쓸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강박을 잠시, '아주 잠시만' 잊어버리기 위해. 매 순간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니까, 인생은 짧지만 하루는 스물 네 시간이나 되니까. 


오늘만큼은 중독의 늪에 빠지지 않을 잠시 후의 나를 믿어주기로 했으니까. 

나는 나의 열렬한 지지자이다. 내가 힘들지 않기를 바라고 내가 잘 해낼 수 있다고 믿고 나의 과오를 눈감아주는 관용을 베풀어준다. 

나는 나의 배척자이다. 나는 나를 혐오하고 누구보다도 나의 잘못과 수치를 가장 먼저 파악하여 내 죄를 속단한다. 나는 내가 살아있지 않기를 바라며 내 존재와 미래를 저주한다. 악담을 퍼붓는다.


어쨌거나 피곤한 건 싫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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