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신입에게 27년 경력이 묻다
당신이 나를 상담한다고? 1.
한 직장에서 27년 일하고 정년퇴직을 한 박정필 씨.
노후에도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고용노동부의 취업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한다.
상담 진행을 위해 우리 기관에는 일주일 전 처음 방문했고 오늘은 2회 차 상담을 위해 사무실 문을 막 열고 들어서는 참이다.
박정필 씨의 상담을 담당하고 있는 이누리가 얼굴에 번져있던 웃음기를 거두면서 힐끗 시계를 쳐다본다. 나도 그 눈길을 따라 시계를 본다. 12시 30분.
점심시간이 아직 30분이나 남아있다.
"오셨어요, 선생님. 아직 저희가 점심시간이 안 끝나서요. 상담실에 들어가서 조금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서류 챙겨서 들어갈게요"
만면에 함박 미소를 지으며 안내하는 이누리를 따라 박정필 씨가 가타부타 말없이 상담실을 향해 걸어간다. 상담실 문을 닫고 돌아서는 이누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작은 소리로 푸념한다.
"너무 일찍 오시네요. 아직 이도 못 닦았는데"
"차 한 잔 드리고 양해를 구하세요. 이해해 주실 거야"
박정필 씨는 현재 57세이고 이누리는 27세이다.
처음 담당자로 배정됐을 때 이누리는 어쩔 줄 모르며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도 자기의 아버지 뻘이고,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시험 준비하다 직업상담사로 돌아선 후 우리 기관을 첫 직장으로 들어왔으니 경력 또한 비교가 안됐다.
이제 겨우 입사 4개월 차 이누리가 감히 박정필 씨를 상대로 상담을 주도해가기에는 사회에 대해서도, 인생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했으니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정부의 직업상담은 정해진 업무 매뉴얼이 있어서 그대로 진행만 하면 된다. 막히거나 모르는 것은 선배 상담사나 팀장인 내게 묻기로 하고 이번 기회에 나이를 극복하는 상담사로 거듭나기를 바라면서 배정을 그대로 진행시켰다. 첫 상담이 끝나고 이누리는 할만하더라며 함박웃음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사실 난 일주일 전 이누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박정필 씨의 전화를 받았었다.
행정직원이 누가 팀장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넘겨주는 전화를 받아보니 그날 첫 상담을 하고 간 박정필 씨였다.
"전화 바꿨습니다. 여수 팀장입니다."
"예. 오늘부터 거기 사무실에서 상담을 하게 된 박정필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를 찾으셨다구요.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예. 다름이 아니라 담당자를 좀 바꿀 수 있을까 해서요."
순간 등줄기에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정부의 서비스를 제공받는 입장에서 참여자들은 약간의 불편함에 대해서도 잘 참으려 하지 않는다.
정부의 사업은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이므로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다. 당연한 말이고 맞는 말이다.
다만 정부의 일도 결국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정부지원이 국민들 개개인에 전달되는 체계의 마지막 단계에는 사람대 사람이 남는데 서로에 대해 신뢰가 있으면 약간의 불편부당 정도는 또 너그럽게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이다.
담당자가 정해지면 길게는 1년 가까이 한 사람과 계속 상담을 해야 되는 시스템에서 서로 간에 신뢰가 있으면 예산이 들어간 만큼 효과는 더 크게 발휘된다. 해준만큼 돌아오는 것은 인지상정.
그건 상담사나 참여자 둘 다에 해당한다. 그래서 첫 만남에서 서로 간의 신뢰를 위한 라포 형성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라포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부분의 상담사는 첫 만남에서 친절한 모습을 보여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참여자의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제도에 대한 불만은 토로해도 상담사에 대한 불만은 드러내 놓고 터뜨리는 경우는 잘 없고 더구나 변경을 요청하는 경우는 드물다.
입사 4개월 차 이누리는 그 친절함이 노련한 상담사들에 비해 1.5배는 더 많아서 업무 경험의 모자람을 친절함으로 메우려는 사람처럼 더 열심히, 성실하게 친절하게 구는 편이다.
그런데 그 드물게 일어나는 상담사 변경 요청이라니!
이건 일종의 사건이다. 민원발생의 경계에 서 있는 셈이다.
"아.. 네. 뭐 바꿀 수는 있습니다만, 무슨.. 문제가 있으신가요?"
나도 모르게 등허리를 의자 등받이에서 떼서 전화기에 머리를 더 가까이 대고 다음에 나올 말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저를 상담해주시는 분이 뭐를 잘 모르는 것 같던데 좀 잘하시는 분으로 바꿔주이소"
이럴 땐 살얼음 위를 걷듯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해서 선택하고 말의 톤을 신중하고 신뢰감 있게 조절해야 한다.
"아.. 그러세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불편하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상담이사 내보다는 더 잘 알겠지만 그래도 자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니까 솔직히 기분이 나쁩니다. 또 나이도 보니 얼마 안 된 것 같던데 도움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이럴 땐 상대의 감정을 무조건 인정해야 한다. 이유를 막론하고 어쨌든 기분이 나빴다잖은가.
만약 변명부터 하거나 사실을 따져 묻고 설득하려고 들면 위태롭던 살얼음은 깨지고 만다.
"어머나 그러셨어요.. 기분 나쁘셨다면 우선 제가 잘 가르치지 못한 점 사과부터 드릴게요. 선생님이 방문 상담하신 첫날인데 불편을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박정필 씨가 기분 나쁘다고 한 이유가 충분히 짐작이 된다. 그건 상담사의 자세나 태도의 문제이지 내용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나이.
이누리만한 자식이 있을 수도 있다. 집 안에서는 하늘 같은 남편이고 아버지였겠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추앙받던 그가 이제는 젊은 사람들에게 중심자리를 내어주고 또다시 노후의 삶을 살기 위해 눈높이를 낮추어 자존심을 내려놓고 이렇게 찾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존심을 건드렸다.
조심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저 허들을 넘어야 한다.
"선생님. 아마 이누리 상담사가 일에 대한 의욕이 앞서서 내용을 전달하다 보니 좀 과했던 것 같은데 일부러 의도를 가지고 선생님을 불편하게 해 드린 것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이누리 상담사는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고 제가 죽 지켜봤는데 자기가 맡고 있는 분들께 정말 최선을 다하고 제도나 정책에 대해서도 늘 연구하고 공부해서 사무실 내에서도 똑똑하다고 칭찬받는 상담사입니다. 선생님께서 그래도 상담사를 바꾸고 싶으시면 바꿔 드릴 수는 있지만 양해해주신다면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가요."
거의 다 됐다. 이제 쐐기를 박을 때다.
"그럼요 선생님. 그리고 지금 다른 상담사들이 모두 더 이상 참여자를 받을 수 없을 정도로 꽉 차 있기도 하네요. 저를 믿고 맡겨주시면 불편함 없이 상담 진행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제가 이누리 상담사에게 한 번 더 주의를 당부하겠습니다."
"아 뭐 그럴 것까지는 없고요. 뭐 알았습니다. 할 수 없지요"
"선생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선생님 말씀은 안 꺼내고 다시 이누리 상담사의 상담태도에 대해 점검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정필 씨는 그나마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였다. 아니 인생의 대부분을 쉴 틈 없이 정년까지 꽉 채워 성실하게 일한 사람들은 직장이 어떤 곳인지를 잘 안다. 그래서 더 억지를 부리지 않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별 걸 아닌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난 진심으로 박정필 씨가 고마웠다.
왜냐면 내 입장에서는 덕분에 놓치고 넘어갈 뻔한 입사 4개월 차 상담사 이누리에 대해 점검할 계기가 생겼기 때문에.
다음 날 조금 한가로운 오후에 이누리를 회의실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