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시 56분.
시계를 확인한 다정이 창밖을 바라봤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행인 몇 명이 우산을 쓴 채 걸어가고 있었고, 우산들 사이로 잔 비가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자신의 마음에도 잔 비가 내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정은 초조한 마음으로 진우를 기다리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만약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그렇다면 이 사실은 진우 역시 알아야만 한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확신이 서질 않았다.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버지뿐이지만, 다정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진실을 말해주기를 더는 기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진우에게 털어놓는다면 그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정 씨.”
다정이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진우가 나타났다. 비에 젖은 우산을 접은 후 바닥에 내려놓는 진우의 목덜미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딱 맞춰 오셨네요.”
다정의 말에 진우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급한 일이라고…….”
“저…….”
다정이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진우와 약속을 잡은 후 다정은 줄곧 생각했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땐,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좋을지도 모른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죠?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다정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하자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네, 기억납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윤이에요, 제 동생 이름. 근데 다윤이가…….”
다정이 침을 꼴깍 삼켰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저희 아빠의 딸이 아니라…… 고모의 딸 같아요.”
다정의 입에서 나온 뜬금없는 말에 진우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고모의 딸이라고요?”
“네, 맞아요.”
힘없이 대답한 다정은 어제 자신이 찾아본 내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희 아빠의 혈액형은 AB형이에요. 그리고 다윤이의 혈액형은 O형이고요. 그런데…… AB형의 부모에게서는 O형의 자녀가 태어날 수 없어요.”
다정은 나름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진우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에 답답해진 다정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혈액형은 부모의 혈액형에 의해 결정돼요. 혈액형과 관련된 유전자는 A, B, O 유전자 세 개가 있는데, 부모 양쪽에게서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았느냐가 그 사람의 혈액형을 결정하지요. 예를 들어…… A와 A가 만나면 A형, B와 B가 만나면 B형, O와 O가 만나면 O형의 자녀가 태어나는 것이죠.”
어느새 다정의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A와 B 유전자는 우성이고 O 유전자는 열성이기 때문에, 만약 A와 O가 만난다면 A형의 자녀가, B와 O가 만난다면 B형의 자녀가 태어나요. 둘 다 우성인 A와 B가 만나면 AB형의 자녀가 태어나고요. 그리고 부모 양쪽에게서 모두 O 유전자를 물려받는다면 자녀의 혈액형은 O형이 돼요. 바꿔 말하면, 자녀의 혈액형이 O형이려면 부모 양쪽으로부터 모두 O 유전자를 물려받아야 해요. 그런데…… AB형의 경우에는 O 유전자를 물려줄 수 없어요. A와 B 유전자밖에 없으니까요.”
다정의 설명을 들으면서 진우는 이 얘기를 학창 시절 과학 시간에 들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다정 씨 말은…… 아버님의 혈액형은 AB형이고 동생의 혈액형은 O형이기 때문에 동생이 아버님의 딸이 아니라는 건가요?”
진우의 정리에 다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방금 이야기 한 건 알겠는데, 고모의 딸이라는 건 무슨 소리예요?”
“이건 저도 자신 있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만약 다윤이가 아빠의 친딸이 아니라면, 고모의 딸일 가능성이 커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셨을 리가 없거든요. 그런데 아빠의 유일한 혈육은…… 고모뿐이에요.”
지금껏 아버지가 동생인 다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다정이었다. 어떨 때는 질투가 날 정도로.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아는 다정의 직감은 여전히 날카롭게 불편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근데 이런 얘기를 진우 씨에게 하는 이유는…….”
“동생이 만약 다정 씨 고모의 딸이라면…… 그 얘기는 결국…….”
진우의 말에 다정이 고개를 숙였다.
“진우 씨 아버님의 딸일 수도 있어요.”
그녀의 말에 진우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정 씨의 추측일 뿐이잖아요? 일단 동생이 다정 씨 고모의 딸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리고 실례되는 말 입니다만, 다정 씨 고모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그의 말처럼 애초에 다윤이 다른 사람의 딸일 수도 있다. 만에 하나 두정의 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태우의 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아무 연관성도 없었던 살인자와 피해자 사이에 접점이 생기게 된 것은 태우와 두정의 관계가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접점이 더욱 진해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다윤의 존재로 인해.
“네, 그래서 저도 확신이 서질 않아요.”
다정이 힘없이 대답하자 진우가 생각에 잠겼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자 가능성일 뿐이지만, 만약 다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동생은…… 자신의 동생이라는 뜻이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빠뿐인데, 아빠는 사실대로 얘기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렇겠죠. 애초에 모든 사실을 숨길 작정으로 거짓말을 하셨을 테니…….”
진우의 말에 다정이 “네.”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요?”
다정의 질문에 진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좀 귀찮긴 하겠지만…….”
며칠 뒤, 다정은 인근의 한 유전자검사소에 방문했다. 그녀의 가방에는 세 사람의 머리카락이 각각 지퍼백 안에 담겨 있었다. 자리에 앉은 채 불안한 모습으로 차례를 기다리는 그녀의 머릿속에 며칠 전 진우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집에 아버님이 쓰시던 베개나 빗, 아니면 입으시던 옷이 있나요?”
“네, 아빠 물건은 아직 그대로 있어요.”
다정은 두오의 양복 정장에 잔뜩 묻어있던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아버님 머리카락을 최대한 많이 담아 오세요. 모근이 붙은 머리카락으로요.”
“모근이요?”
“네. 그리고 마찬가지로 동생의 머리카락도 최대한 많이 담아 오세요. 둘이 섞이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그러면…… 진우 씨 아버님 머리카락도…….”
다정이 말을 잇지 못하자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가져갈 거예요. 그러면 그것들을 가지고 친자확인검사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넉 달이나 지났는데 가능할까요?”
다정이 걱정스레 묻자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 거예요. DNA는 보관 상태만 좋으면 수십만 년 이상 보존도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진우의 말에 다정은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다음 분 오세요.”
직원의 말에 정신을 차린 다정이 일어났다. 그러고는 지퍼백 3개를 제출한 후 친자확인검사를 의뢰했다. 결과는 하루 뒤에 나온다고 직원이 말했지만 다정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어떤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겁이 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연락에 검사소를 찾은 다정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두근거렸다.
“결과지 여기 있습니다.”
종이봉투를 받아 든 다정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지만, 직원은 그런 그녀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치 이런 사람들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닌 것처럼. 그녀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 봉투를 열어 안에 든 내용을 확인했다.
위쪽에 적힌 복잡한 알파벳과 수치들은 무시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결과였다. 다정의 눈이 빠르게 종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 쓰인 글자들을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의뢰인 A와 의뢰인 B, 친자관계 성립하지 않음.
다윤과 두오의 검사 결과를 확인한 다정이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역시…… 아빠의 친딸이 아니었어.
마음이 조급해진 다정은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의뢰인 A와 의뢰인 C, 친자관계 성립.
그 순간 다정이 인식하는 세상이 멈춰버렸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 그리고 초침마저도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