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빨리 와.”
병원 지하 1층에 위치한 식당에서 호수가 서율을 재촉했다. 이제 일곱 살이지만 달리기만큼은 누나보다 더 빠른 듯하다. 서율은 “알았어, 꼬맹이.”라고 대답하며 호수를 쫓아갔다.
주영은 기운을 회복하고 다시 태호가 누워있는 병상을 지키고 있다. 그녀는 서율에게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주영에 대한 의사의 말을 들은 서율의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호수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지금도 눈에 보이는 호수보다 병실에 있을 주영이 더 신경 쓰였다.
아픈 엄마, 아픈 새엄마.
도대체 내 팔자는 왜 이럴까.
서율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어린이 돈까스 세트를 시킨 호수가 “누나, 왜?”라고 물었지만, 서율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호수의 뒤를 이어 음식을 주문한 서율은 호수를 데리고 빈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주영까지 쓰러지는 상황이 되자 온 가족에 비상이 걸렸다. 서율은 하루종일 병상 옆을 지키는 것이 주영의 몸에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율과 상의한 끝에 남매가 교대로 주영을 대신하기로 했다. 식사를 제때 잘 챙겨 먹는 것 또한 중요했기에 주영과 지율이 밥을 먹는 동안엔 서율과 호수가 병실에 있기로 했고, 반대로 서율과 호수가 밥을 먹는 동안엔 주영과 지율이 병실에 있기로 했다.
원래 서율은 지율과 함께 움직이고 싶었지만, 지율의 생각은 달랐다. 호수 혼자서는 주영을 잘 돌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누나가 호수와 친해지길 바라서였다.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서율 역시 이러한 지율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눈치채고 그 의견에 찬성했다.
“이리 앉자.”
마침 구석에 자리가 나자 서율은 호수와 함께 앉았다. 앉자마자 온몸이 쑤시는 듯 뻐근했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자 호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 왜?”
“꼬맹이, 넌 몰라도 돼.”
서율이 자기도 모르게 매몰차게 말하자 호수의 입이 삐쭉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옆 테이블에 놓여 있는 음식들을 바라보며 “우와, 저거 맛있겠다.”라고 중얼거렸다.
“먹고 싶으면 저것도 더 시키던가.”
서율의 말에 호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빨리 가봐야 하잖아. 엄마랑 형 기다려.”
그러고는 다시 옆에 보이는 음식들을 바라봤다.
지율도 그렇고, 호수도 그렇고…….
문득 서율은 두 동생들이 모두 자기보다 더 어른스럽다고 느꼈다. 지율이 그렇다는 건 원래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는 일곱 살 꼬맹이까지 자기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그만큼 자기가 어리다는 건가.
진동벨이 울리자 서율이 일어나서 동생 음식까지 모두 가져왔다. 지금껏 옆 테이블만 쳐다보던 호수는 음식이 오자 “잘 먹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신나게 포크를 들었고, 서율 역시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먹는 학생 정식보다 훨씬 더 맛있게 느껴졌다.
비싸서 그런 건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앞을 보니 호수가 정신없이 돈까스를 먹고 있었다. 그때 서율은 문득 느꼈다. 호수의 이런 모습이, 어느새 자신에게 꽤 익숙해진 것을. 호수의 존재가, 어느새 자신의 일상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 된 것을.
한참이나 동생을 빤히 바라보자 호수가 누나를 쳐다봤다.
“왜 안 먹어?”
그 순간, 서율은 얼마 전 지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가족이 될 수 있어.’
호수의 모습이 자신에게 익숙해졌다는 것은 자신이 이제는 호수를 가족으로 여기고 받아들인다는 뜻일까. 그리고…… 어쩌면 새엄마까지도, 이미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럴 때 아빠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울컥했다. 의식을 잃은 지 넉 달이 되어가는 아버지, 그를 바라보는 서율의 마음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낯선 희망과 어림도 없다는 차가운 현실, 그 둘 사이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삶. 아버지가 깨어나길 바라며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더욱 고통스럽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치료를 포기하며 ‘안락’이라는 단어를 내미는 것은 비겁한 행동일까?
생각에 빠진 서율의 눈앞에 호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밥 안 먹어?”
“아냐, 먹어.”
정신을 차린 서율이 다시 젓가락을 집었다. 그러고는 호수를 쳐다봤다.
“호수야.”
“응?”
“만약에 말이야……. 아빠가 저렇게 평생 일어나지 못하면…….”
본론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호수의 표정이 벌써 울상이 되었다.
“만약 그러면…… 호수는 아빠를 보내드릴 수 있겠어?”
“보내드린다는 게 무슨 뜻이야?”
“음…… 그러니까, 이별하는 거야. 헤어지는 거.”
누나의 질문을 들은 호수가 울상을 지은 채 가만히 있었다.
“누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려고 그랬거든. 그런데…… 아주 만약에 아빠가 저렇게 평생 일어나지 못하면…… 그땐 아빠를 보내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왜 보내드려?”
“음……. 왜냐면, 아빠가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까.”
“왜 못 돌아와?”
“음……. 왜냐면…….”
대답하는 서율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돌아오기엔…… 아빠가 너무 많이 아프니까.”
더 이상 참지 못한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서율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엎드린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호수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누나를 쳐다봤지만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저녁을 먹은 후 호수와 함께 병실로 올라가자 주영과 지율이 겉옷을 입고 있었다. 두 눈이 아직도 퉁퉁 부은 서율의 눈을 보자 주영은 마음이 안쓰러워졌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고, 알았지?”
“알았어요.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주영이 병실을 떠나기 전 서율에게 신신당부하자 서율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는 표정의 주영 옆에는 지율과 호수가 서 있었다. 호수의 표정에는 벌써 졸음이 가득했다.
오늘 밤은 세 사람이 집에서 잠을 자고 서율이 병상을 지키기로 한 날이다. 아버지의 사고 이후 병원에서 잠을 잔 적은 많지만 혼자서 밤새 병상을 지키는 것은 처음이다. 긴장과 함께 엄청난 책임감이 서율을 엄습해 왔다.
10시가 지나자 조금씩 졸리기 시작했다. 서율은 잠을 쫓기 위해 교재를 펼쳤지만 오히려 더 졸릴 뿐이었다. 짜증이 난 서율이 뭔가 마실 게 없나 하고 서랍을 열자, 기대했던 음료수 대신 앨범들이 쌓여있었다. 꽤 두꺼운 게 두 권이나.
호기심이 생긴 서율이 오른쪽에 있는 앨범을 꺼내 가운데쯤을 펼쳤다. 아주 포근한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지금은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어머니, 자신보다 어리긴 하지만 속은 더 깊은 동생,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사춘기 소녀.
다음 장에도, 그다음 장에도 네 명의 식구가 나타났다. 어떤 사진은 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사진은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서율의 눈이 사진들을 하나씩 하나씩 훑어봄과 동시에 사진 속 소녀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할 텐데.
서율은 앨범을 다시 서랍에 넣고는 이번에는 왼쪽에 있는 앨범을 꺼내 펼쳤다. 맨 앞장을 보자 갓난아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옆의 사진에는 주영이 그 아이를 안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주영이 안고 있는 것을 보니 호수의 어린 시절인 듯했다. 7년 전 주영의 모습은 지금이랑 별반 차이가 없었다.
몇 장을 더 넘기자 주영이 어떤 남자와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서율은 본 적 없는 호수의 친아버지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주영의 과거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를 낳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호수의 친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사람과는 어떻게 만났는지 등에 대해…….
몇 장을 더 넘기자 더 젊어진 주영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뒷배경을 보니 신부 대기실인 듯했다.
예쁘네.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사진 속의 주영이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주영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미소 짓고 있었다.
다음 장에는 주영이 노년의 부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 주영의 부모님인 듯했다. 할아버지는 머리에 눈이 하얗게 내린 채 딸 옆에 서 있었고, 할머니는 한 손을 딸의 어깨에 올려놓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화목해 보여.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옆의 사진에는 주영의 양옆에 두 남녀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낯익은 듯하여 자세히 본 순간 서율의 몸짓이 얼어붙었다.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한쪽에는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 그리고 반대편에는…… 돌아가신 어머니.
부모님, 그리고 새엄마가……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병상에 있는 태호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와 함께 태호의 한쪽 눈도 잠시나마 움찔거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