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강단에 선 중년의 교수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교수의 말이 너무 빨라서 받아 쓰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지만, 다윤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오른손에 힘을 줘가며 펜을 움직였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다윤에게 즐거움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무이기도 했다. 아버지와 언니의 희생과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해진 그녀의 대학 생활, 이것에 대해 의식할 때마다 다윤은 필사적으로 책을 읽고 교재를 펼쳤다. 아버지와 언니가 누리지 못한 삶을 살아가면서 아버지와 언니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는 것. 이것이 다윤의 삶의 목적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놀러 가는 와중에도 다윤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대학 생활과 공부가 이제는 그녀의 일상이 되었지만, 다윤은 한 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더욱 다잡았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아버지의 청춘이었고, 이곳에서의 꿈은 언니의 이루지 못한 바람이었다.
아빠와 언니의 희생과 노력을 헛되이 해선 안 돼.
다윤은 늘 이렇게 되새기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올해 막 입학한 새내기 대학생이었지만 노력하는 모습은 꼭 졸업을 앞둔 4학년 같았다.
하루의 모든 수업이 끝난 후, 다윤은 빠른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지출을 최대한 줄이려면 저녁을 집에서 먹는 편이 좋다. 영어 단어를 암기하며 버스에 탑승한 다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단어를 되뇌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언제 어디서나 공부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었다.
얼마 후 버스에서 내린 다윤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났다. 언니였다.
―어디쯤이야?
“지금 버스에서 내렸어. 다 와 가.”
―얼른 와, 밥 다 차려놨어.
“알았어.”
전화를 끊은 다윤이 걸음을 재촉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친 후 곧장 집으로 돌아와 언니와 함께 저녁을 먹는 삶,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렇게 십여 분 후, 다윤이 현관문을 열며 “나 왔어.”라고 말하자, 안에서는 다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오며 “왔어?”라고 대답했다.
“바로 저녁 먹을까?”
“응, 나 진짜 배고파.”
다윤은 가방을 방에 두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부엌으로 향했다.
“잘 먹겠습니다.”
다윤의 말과 함께 자매의 식사시간이 시작됐다. 간단한 국에 김치와 콩나물, 시금치와 두부가 전부였지만 다윤은 정신없이 젓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다정은 말없이 다윤을 쳐다봤다.
이렇게 보니까…… 사진 속 고모랑 닮은 것 같아.
다정이 이런 생각을 하자 다윤이 “뭐 해?”라고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다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지만,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뒤죽박죽이었다.
친동생인 줄 알았던 다윤이가…… 사실은 친동생이 아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모의 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다윤을 친딸처럼 키워왔다.
다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동생을 바라보는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딸을 바라보는 심정이었을까.
이게…… 이유였나요?
경찰에게도, 판사에게도, 심지어 딸인 나에게도 거짓말을 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나요?
다윤이가 사실은 자신이 아빠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까 봐?
당장에 아버지를 찾아가 따지고 싶었다. 아버지고 딸이고 할 것 없이 매몰차게 자신의 속에 있는 감정들을 토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몸이 성치 않은 아버지. 그의 앞에서 또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아버지는 또 쓰러질지도 모른다.
하…….
다정이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자 다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 요즘 무슨 일 있어?”
“아냐, 일은 무슨…….”
“요즘 표정이 심각해.”
다윤이 이렇게 말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즘 피곤해서 그래.”
다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은 채 숟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요 며칠 동안은 뭘 먹어도 모래알을 삼키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다윤은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다정은 홀로 방에 앉아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그러고는 맨 앞장에 끼워져 있던 사진들을 꺼내자 아버지와 고모의 모습들이 나타났다.
고모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빠는…… 어떻게 다윤이를 키우게 된 걸까?
다윤이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어쩌면 고모의 딸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진우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리 진우라고 하더라도 진실을 알아내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진우의 아버지와 다정의 고모는 이미 죽고 없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버지밖에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껏 모든 사실을 숨긴 채 애써 외면해 왔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급급했던 아버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당사자에게 물어보지 않고는 알아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결심을 굳힌 다정은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터치했다. 잠시 후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다정 씨.”
“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우리 짐작이 맞나요?”
진우의 물음에 다정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을 굳혔다.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전화로 할 수는 없다.
“내일 당장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