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병실 안이 건조한듯했다.
주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습기를 틀고는 분무량을 최대로 설정하자, 희뿌연 수증기들이 구름처럼 솟아오른 후 병실 구석구석 퍼지기 시작했다. 자리로 돌아와 앉은 주영이 창문을 통해 말없이 바깥을 바라봤다. 이제 조금씩 선선해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두터워진 것이 느껴졌다. 걸음을 서두르며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 어딘가 아파서 병원을 찾은 사람들.
세상엔 왜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은 걸까?
주영이 이런 생각을 할 무렵 병실 문이 열렸다. 주영이 문을 바라보자 이전에 주영을 진료했던 의사가 나타났다.
“지금 대화 괜찮으신가요?”
“네, 그럼요.”
병실 문을 열어놓은 채 걸어오는 의사를 보며 주영은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의사와의 면담 중 호수가 울어버려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아드님은요?”
“둘 다 집에 있어요.”
주영이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오늘 밤은 큰아들이 병실을 지킬 거라……. 조금이라도 더 쉬라고 했거든요.”
“그렇군요.”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경테를 만졌다.
“어제 이야기를 계속해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최근에도 통증이 자주 발생하시나요?”
의사의 말에 주영이 얼굴을 찡그렸다.
“재작년쯤부터 심해진 것 같네요.”
“이식수술은 언제 하신 건가요?”
의사의 말에 주영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한 십여 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이식받으신 분은 가족분이었나요?”
그 말에 주영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가족은 아니었고…… 친한 언니 동생 사이였어요.”
주영의 말에 의사가 “그랬군요.”라고 중얼거렸다.
“아시다시피 간은 탁월한 재생능력을 가졌습니다. 때문에 간의 일부를 떼어내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원래 크기만큼 커지지요. 하지만 일부의 경우 부작용도 나타납니다. 지금 겪고 계신 만성적인 통증처럼요.”
의사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주영을 바라봤다.
“이식수술을 하셨을 때 연세가 어떻게 되셨나요?”
“지금이 마흔여섯이니까…… 삼십 대 중반이네요.”
“그땐 간의 상태가 괜찮았나요?”
“그럼요. 검사도 한걸요.”
“앞으로 잘 관리하셔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스트레스를 최대한 멀리하세요. 요즘처럼 계속 무리하셨다간 더욱 심해질 수 있습니다.”
의사의 조언에 주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에서 나가려던 순간, 갑자기 누군가 성큼성큼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서율이었다.
“너, 언제부터…….”
주영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간 이식이라니요?”
의사가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서율을 난처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병실을 나갔다.
“별것 아니야. 옛날에 수술을 한 적이 있거든.”
“별 게 아닌 게 아니라…….”
그 순간 서율의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였다.
간 이식, 십여 년 전, 친한 언니 동생…….
그리고 그 결혼식 사진.
“설마…….”
서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우리 엄마한테 간 이식을 해준 게…… 새엄마였어요?”
서율의 물음에 주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얼굴빛은 점차 가라앉았지만 이번에는 눈가가 붉어졌다.
“그래, 맞아.”
“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그건…….”
주영이 뭐라 대답하려는 순간 서율의 뒤편에서 지율과 호수가 나타났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영을 바라보는 두 동생이 나타나자 서율은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지율이 누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주영이 그를 말렸고, 호수는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안 된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병실을 나선 서율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갔다. 중간에 한 여자와 어깨를 부딪쳤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는 엘리베이터가 오질 않자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1층까지 내려가는 도중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거친 발걸음은 잦아들 줄 몰랐다.
서율은 무작정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 후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눈물범벅이라는 것을.
왜 진작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걸까? 내가 자기를 그렇게 미워하는 줄 알면서…….
서율이 한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지율이 집에 찾아온 것은 밤 10시가 지나서였다.
집에 온 후로도 서율은 그저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십여 년 전 어머니의 병, 기증자를 찾아 헤맸던 일, 평생의 은인이었던 기증자, 그리고 그 기증자가 자신이 미워하던 주영이었다는 사실. 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섞인 채 해괴한 모습으로 서율의 머릿속을 둥둥 떠돌아다녔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생각에 잠길 무렵, 현관문이 열리며 “누나.”라는 소리가 났다. 지율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지율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서율에게 다가왔다.
“엄마한테 얘기 들었어.”
지율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서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지율이 “자, 이거.”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하얀 편지봉투였다.
“엄마가 전해주래.”
이 말을 마치고는 지율은 다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서율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문득 동생이 쥐여준 봉투를 바라봤다. 흔해 빠진 하얀 봉투, 그 안에 편지지 몇 장이 들어있었다. 서율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아무 의식 없이 편지지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직접 얼굴을 보며 말해야 하는데…… 부끄러워서 도저히 그러질 못하겠구나.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쓴단다.
맞아, 네 엄마에게 간을 제공한 사람은 나야. 네 엄마와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였어. 지난번에 너에게 이야기한 적 있지? 우리 할머니를 잘 돌봐 주었던 간호사, 내가 언니라고 부르곤 했다던 사람, 우리에게는 가족 같았던 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네 엄마였어.
할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신 후에도 우리는 가끔 만났었어. 할머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네 엄마와 많이 친해졌거든. 우리 가족들도 네 엄마를 많이 좋아하기도 했고. 그렇게 만나다 보니까 친한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어. 가끔 만나서 수다를 떨곤 했었지. 네 엄마와 아빠의 결혼식에도 갔었고. 네가 태어났을 땐 너를 직접 안아보기도 했단다. 물론 너는 기억나지 않겠지만…….
네 엄마가 간이 안 좋았던 건 너도 알고 있지? 그때 네 아빠는 간을 제공해 줄 기증자를 찾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그 소식을 듣게 됐지. 당연히 나는 이식을 할 의사가 있었고. 다행히 검사 결과 적합 판정을 받아서 이식수술을 할 수 있었어. 수술 후 회복과정은 쉽지는 않았지만, 네 엄마를 살릴 수 있어서 행복했어.
그 후 나는 호수 아빠를 만나서 결혼을 했고, 네 부모님과도 종종 어울렸어. 넷이서 같이 캠핑을 간 적도 있었지. 하지만 몇 년 후에 네 엄마는 다시 아프기 시작했고…… 결국엔 세상을 떠났어.
네 엄마에게 간 이식을 해준 것을 왜 너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그건 미안했기 때문이었어. 내가 조금만 더 건강했더라면, 내 간이 조금만 더 건강했더라면……. 그랬다면 네 엄마가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네 엄마가 떠난 후 이런 생각들이 끊이질 않았어. 네 아빠와 재혼한 후에도 여전히 그런 생각들 때문에 괴로웠고, 그래서 얘기하지 못했던 거고…….
네 엄마가 그렇게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호수 아빠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 나에게는 할머니의 죽음 이후로 가장 힘든 시기였지.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게 나에게는 너무 힘들고 버거웠어. 운영하던 꽃집도 월세를 제때 내지 못해서 장사를 못하게 됐고. 그때 도움을 줬던 사람이 네 아빠였어. 네 아빠는…… 네 엄마에게 간을 제공해 준 나에게 굉장히 고마워했어. 그리고 수술 이후 부작용에 시달리는 나에게 많이 미안해했고. 네 아빠의 도움으로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나는 미래를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 솔직히 말하면,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면 했어. 하지만 호수 아빠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 상황에서 네 아빠를 자주 만나면서……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어.
너에게 이런 말을 하기 정말 미안하구나. 하지만 그때엔 나와 호수를 돌봐 주는 네 아빠에게 점점 끌리기 시작했어. 몇 달 후 난 내 마음을 전했고…… 네 아빠도 비슷한 마음이었나 봐. 그렇게 다시 결혼하게 됐단다. 결혼식 전날, 난 네 엄마를 떠올리며 밤새 울었어. 너무나 미안했거든.
물론 너와 지율이에게도 미안했어. 그래서 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물론 네 엄마의 빈자리를 온전히 채워줄 수는 없을지라도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진심이야.
너는 네 엄마를 참 많이 닮았어. 그래서 너를 볼 때마다 네 엄마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 그리움, 그리고 미안함까지 동시에 느끼곤 했지. 너를 보면 가끔은 네 엄마가 아직도 내 옆에 살아있는 것만 같단다.
어떻게 하다 보니 이런 식으로 내 마음을 털어놓게 됐구나. 언젠간 모든 것을 얘기해 줘야지 하면서도 그러질 못했는데…….
많이 미안하구나. 그리고 사랑한단다.
네 엄마가 되고 싶은 주영.」
편지를 끝까지 다 읽은 서율은 어느새 편지지가 눈물범벅이 된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마치 평생 흘릴 눈물을 오늘 다 흘리는 것만 같았다. ‘엄마’라는 단어가 파도처럼 목구멍으로 밀려왔다가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