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자욱하게 낀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다정은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차의 향을 맡으면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가방을 멘 채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 핸드폰만 바라보며 보도블록 위를 걷는 사람, 팔짱을 낀 채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커플…….
저 사람들은 다들 어떤 사연을 갖고 살아가는 걸까?
그리고 그 사연이 자신 앞에 놓인 현실처럼 아프고 외로울까?
어렸을 때부터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고 불리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공평하다면, 그건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초코파이일 것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느냐에 관계없이 늘 똑같은 모양에,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맛을 지닌 초코파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계단 끝부분에서 진우의 모습이 보였다. 다정은 진우 쪽을 향해 손을 들고 흔들었다. 자신을 보고 다가오는 진우의 모습을 보며 다정은 진우와의 만남이 이제는 꽤 익숙해진 것 같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편해진 건가?
“어떻게 됐나요?”
카운터에 가서 커피잔을 받아 온 진우가 다정에게 물었다. 순간 다정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에 가방을 열었다.
“여기요.”
다정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종이봉투를 건넸다.
“역시.”
진우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다정 씨 말이 맞았어요.”
진우는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생각들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엄밀히 말하면 이 결과지는 다윤이 다정의 고모인 두정의 딸이 아니라, 진우의 아버지인 태우의 딸이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다윤의 아버지인 태우가 두정과 연인이었고, 두정의 오빠인 두오가 다윤을 친딸처럼 키웠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동생이 다정 씨 고모의 딸인 거군요.”
진우의 말에 다정이 힘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빠가 진우 씨 아버님의 딸을…… 생판 모르는 다른 사람의 딸을 키우셨을 리가 없죠.”
다정의 힘없는 말에 진우는 멍한 얼굴로 창문을 바라봤다.
동생이라니……. 그것도 아버지의 외도로…….
“진우 씨?”
다정의 말에 생각 밖으로 빠져나온 진우는 “네?”하고 되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다정 역시 직감하고 있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그 사람에게서 진실을 듣는 것만이 다정과 진우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다정 씨 아버님을…… 다시 한번 봬야 할 것 같아요.”
진우가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음날 다정은 버스정류장에서 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연을 내뿜으며 질주하는 버스들을 바라보며 다정은 잠시 후 있을 아버지와의 만남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 아버지는 오늘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모와 진우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다윤이에 대해 언급한다면……. 그때는 모든 걸 내려놓고 사실 그대로의 일을 들려줄지도 모른다.
다정은 그 일말의 희망에 모든 걸 걸었다.
십 여분 후 진우가 나타났다.
“딱 맞춰 오셨네요.”
다정이 시계를 보며 말하자 진우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했고, 두 사람은 버스에 올라타 맨 뒤쪽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버스가 문을 닫고 출발하자 진우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두오,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
그의 머릿속에 얼마 전 토크쇼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 변호사의 단호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생명의 신성함을 모독한 살인자일지라도 그 안에 있는 생명 역시 신성합니다.’
생명에 대한 권리.
인간이 가진 기본적 권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권리.
다른 사람이 가진 그 권리를 박탈한 살인자,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있는 생명 역시 신성하다면…….
그렇다면, 아버지를 죽인 그 사람의 생명 역시 신성한 걸까?
그리고 그 변호사의 또 다른 목소리.
‘사회는 복수를 위해 처벌하지 않습니다. 발전을 위해 교정할 뿐입니다.’
과연 그들에게 죄수 번호를 부여하고 몇십 년 동안 가둬두는 것만으로 교정이 될까? 아버지를 죽인 이두오는 둘째 치고, 저 흉악한 살인마 A 씨에게 과연 교정의 가능성이 있을까? 교정과 교화는커녕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사람만 해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교정의 가능성이 있는 죄수들이 단 몇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그들을 위해서라도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다정의 질문에 진우가 정신을 차렸다.
“그냥요. 이런저런 생각이 나네요.”
진우에게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다정을 쳐다봤다.
“궁금한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다정 씨 아버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 말에 다정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저희 아빠요?”
“네.”
“아빠는…….”
다정이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한 사람이에요. 외모도 그렇고, 성품도 그렇고.”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 속 두오의 모습을 떠올렸다. 체격이 크진 않지만 남자다운 얼굴, 남모를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부모님을 잃고도 꿋꿋하게 살아오셨어요.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고모를 키웠고요. 물론 저와 다윤이도요. 의지가 강한 분이세요. 마음도 바른 분이고요.”
다정이 갑자기 고개를 떨구며 “그래서…….”라고 중얼거렸다.
“아빠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절대 그럴 분이 아니었거든요.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지더군요. 아빠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그랬군요.”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어요. 도대체 왜 그 사람을 죽였는지. 아빠는 처음부터 돈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어요. 왜 아빠가 저렇게까지 거짓말을 하는 걸까 궁금했었는데……. 어쩌면 오늘은 그 궁금증이 풀릴 수도 있겠네요.”
다정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왼쪽 손을 다정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꼭 그렇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