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도저히 일에 집중할만한 기분이 아니었지만, 다정은 이러한 마음을 애써 다잡으면서 손님들을 응대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이미 이런저런 생각들로 꽉 차 있어서 자신이 지금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조차 실감이 나질 않았다.
“다정 씨, 어디 안 좋아?”
그녀의 모습을 본 식당 주인이 다정에게 물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정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근무를 계속했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 점차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진실들. 이것이 진실이라는 누군가의 외침으로부터 저 멀리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외침은 이미 다정의 귓속에 대못처럼 깊게 박힌 채 떨어지질 않았다.
어느덧 근무시간이 끝나자 다정은 황급히 가게를 나섰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기도 했다. 심장은 두근거리고 손발은 떨려 왔지만 자기도 자기 몸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덧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한 그녀는 지난번 진우를 만났을 때의 일을 회상했다.
‘이 사람은 당신 고모부가 아니에요. 저희 아빠예요.’
이 말을 듣자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아빠’라는 단어가 자신이 알고 있던 그 뜻이 맞나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지해지는 진우의 표정을 보면서 다정도 점차 그 표정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직시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고모부가 아니었다. 진우의 아버지였다. 아내와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진우의 아버지와 고모와의 관계, 그리고 아버지의 범행. 둘 사이에 깊은 관련이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진상을 알고 있을 유일한 사람인 아버지는 돌연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아버지가 쓰러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다정은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아버지의 병 앞에서의 무력감.
진실 같지도 않아 보이는 진실 앞에서의 무력감.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
버스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점차 희미해졌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오자마자 청소를 시작했겠지만,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다정은 집에 오자마자 가방을 구석에 집어던지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깊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몸무게가 바윗덩어리라도 된 것처럼 침대 밑으로 푹 꺼지는 기분이었다.
하…….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서도 다정은 정신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언니, 나 왔어.”
다윤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정이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자 신발을 벗은 다윤의 모습이 보였다.
“일찍 오네.”
“응. 아, 피곤해.”
다윤은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바닥에 털썩 내려놓은 채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씻고 누워.”
“잠깐만, 좀만 누워있고.”
다정의 잔소리에 다윤이 대꾸했다. 이럴 때는 꼭 모녀지간 같다.
“맞다, 아빠 면회 간 건 어떻게 됐어?”
갑자기 다윤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빠한테 뭐 물어볼 거 있다며.”
다윤의 질문에 다정이 “아…… 그거.”라며 말을 흐렸다.
“다 못 물어봤어.”
“왜?”
그 이유가 아버지가 눈앞에서 쓰러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언니가 좀 소심하잖아.”
다정이 멋쩍게 웃으며 말하자 다윤이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역시 A형.”이라고 대답했다.
“근데 너 혈액형이랑 성격이랑 전혀 관계없는 거 알아?”
다정의 질문에 다윤이 “몰라.”하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언니처럼 A형이라고 다 소심한 것도 아니고, 너처럼 O형이라고 해서 다…….”
그 순간 무언가가 번쩍하고 다정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뭔가 이상하고 어색하고 의심스러운 생각, 하지만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그런 기분 나쁜 생각.
다정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언니, 왜 그래?”
다윤이 걱정스럽게 묻자 다정은 “쉬고 있어.”라고 대답한 후 방으로 돌아왔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손은 부들부들 떨렸지만, 정신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또렷했다. 다정은 핸드폰을 켜고 검색어를 입력한 다음 정신없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렇게 5분쯤 핸드폰만 쳐다보던 다정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보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부지런히 두리번거리던 다정의 눈에 드디어 그 종이뭉치가 나타났다. 다정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편 후 안에 있는 내용을 확인했다.
‘이름 이두오, 나이 58세, 신장 172cm, 체중 64kg, 혈액형 AB형, 혈압 145/95’
다정은 곧 주저앉아 버렸다. 다리에는 아무 힘도 느껴지지 않았고, 몸에는 어떤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또렷했다.
순간적으로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날카로운 의심이 되어 깊이 뇌리에 박혔다. 다정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