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기상 시간이 되었다. 아침부터 머리가 깨질 듯하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힘든 하루가 될지 짐작이 갔다.
문득 두오의 눈이 베개로 향했다. 오늘따라 베개에 묻은 머리카락이 유난히 많아 보인다. 교도소 밖에 있을 때도 머리가 많이 빠지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몸이 그만큼 약해졌단 건가.
얼마 전 만난 의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혈압이 아주 심하게 높습니다. 두통과 구토가 심하셨을 텐데……. 유감이지만, 이 상태로는 얼마 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두오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건더기가 거의 없는 멀건 국은 이제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되어있었다. 싱거운 반찬, 질퍽한 밥, 그리고 가슴 쪽에 새겨진 죄수 번호……. 이것들이 자신의 마지막을 함께해 줄 짓궂은 친구들이란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났다.
오후가 되자 운동시간이 주어졌다. 철제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밝은 햇빛이 날카롭게 두오의 눈을 비췄다.
이런 따뜻한 햇빛을 앞으로 얼마나 더 볼 수 있을지…….
두오는 느린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팔 굽혀 펴기 하는 수감자, 동료들과 함께 조깅을 하는 수감자,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냅다 누워있는 수감자까지. 이젠 이 사람들이 너무나 익숙한 이웃이자 친구가 되어있었다. 마음을 나눈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운동시간이 끝난 후 두오는 자신이 속한 방으로 돌아와 앉았다. 자신이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기간은 20년이지만, 아마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몸이 버틸 수 있을까.
다정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모습, 다윤이 대학을 졸업하는 모습.
보고 싶은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두오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교도관 한 명이 문을 두드렸다.
“죄수 번호 2448, 면회.”
아마 다정일 것이다.
교도관을 따라 복도를 걸으며 두오는 지난번 다정과의 면회를 떠올렸다. 다정이 뭔가를 알아차린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오늘 면회 온 목적도 진실을 추궁하기 위함일 것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면회실로 들어가 앉자 눈에 익은 아크릴판이 보였다.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린 하찮은 판일 뿐이지만, 이 하찮은 판이 자신과 딸들을 20년 동안이나 갈라놓을 것이다. 얼굴을 만지고 싶어도, 손을 잡고 싶어도…… 이 아크릴판은 그것을 허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역시 다정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다른 사람이 따라 들어온다. 다윤일 것이라 지레짐작한 두오의 눈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정이가…… 왜 저 사람과…….
두오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동안 다정과 진우는 면회실에 들어와 앉았다. 몇 초 동안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다정과 진우가 함께 면회를 온 이 상황, 두오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저 왔어요, 아빠.”
차가운 침묵을 깨고 다정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니.”
두오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어떻게 저 사람과 같이…….”
“함께 와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진우의 말에 두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게 뭔가?”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듣고 싶습니다. 당신에게서.”
진우의 대답에 두오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표정을 진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감정을 진우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 알게 됐습니다. 저희 아빠와 당신 동생과의 관계, 그리고…… 다윤이에 대해서도.”
“뭐라고?”
“사실이에요, 아빠. 진우 씨 아버님과 고모와의 관계, 그리고 다윤이가 고모의 딸이라는 것도…….”
이 말과 함께 다정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크릴판 너머로 보이는 사진, 동생과 그 사람이 함께 나온 유일한 사진이다.
설마, 딸에게 맡겼던 사진들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건가?
그리고 다정이 꺼낸 또 다른 물건. 종이에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있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다정을 바라보자 다정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와 다윤이, 그리고 진우 씨 아버님의 유전자 검사 결과예요.”
그 말에 두오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정이 저 사진 속의 남자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됐는지, 어쩌다가 유전자 검사를 할 생각을 했는지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기억 속에 그토록 가둬두려고 했던 사실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부탁해요, 아빠.”
다정이 애원했다.
“진실을 이야기해 주세요.”
하지만 두오의 눈빛은 초점을 잃은 채 엉뚱한 곳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두 눈이 떨리는 것을 진우 역시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에게서 어떠한 반응도 나오지 않자 진우가 나섰다.
“만약 당신의 마음속에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다면, 진실을 이야기해 주세요. 그것이…… 당신이 저에게 속죄하는 길입니다.”
진우의 입에서 ‘속죄’라는 단어가 나오자 더는 버티지 못한 두오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인 두오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속죄.
잠시의 침묵 끝에 두오가 고개를 들어 다정을 바라봤다.
“네 말이 맞다. 그 사람은…… 네 고모가 사랑하던 사람이었고, 다윤이는…… 네 고모의 딸이다. 아빠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구나. 두정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좋아하던 모습이. 네 고모가 직장 동료와 저녁 식사를 하던 날 그 사람, 우태우와 처음 만났다더구나. 직장 동료가 그 사람과 대학 선후배 사이였기에 같이 합석해서 저녁을 먹었다지. 그게 둘의 첫 만남이었어.”
조금은 침착해진 두오가 기침을 했다.
“두정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좋아할 때, 난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것보다 열 배, 백 배는 더 행복했어. 두정이도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게 아빠의 오랜 소원이었지. 하지만 두정이는 그 사람과 나이 차이가 열 살이나 난다는 것을 나에게는 얘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 사람이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라는 것도. 내가 둘 사이를 반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구나. 어느 날 두정이와 만났을 때 그 아이가 그 사람과 찍은 사진을 건네줬지. 그게 바로 지금 네가 가진 사진이다. 그때 처음으로 그 사람 얼굴을 보았지.”
두오의 말에 다정은 오른손에 쥔 사진을 쳐다봤다.
“그 이후로 몇 주 동안 그 아이와 통화하면서 나는 그 아이가 어느 때는 행복해하고, 또 어느 때는 속상해하는 것을 느꼈단다. 태어나서 처음 하는 연애라 그런가 보다 했지.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두오의 머릿속이 그날의 모습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몇 주 만에 만난 두정이는 많이 야위어있었어. 난 그 사람과 잘 되어가는지 물어봤지만, 그 아이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지. 난 그게 그 사람과 다퉜다는 뜻인 줄 알았단다. 내가 어리석었지. 조금만 더 자세히 물어봤더라면…….”
두오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 아이는 잠시 쉬고 싶다고 하더구나. 직장에는 휴직계를 냈고,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 친구네 집에서 몇 달 쉬다 오고 싶다고 말했지. 그 아이의 지친 모습을 본 나는 당연히 그러라고 했고. 몇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됐단다. 그때 그 아이의 뱃속에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순간이 내가 살아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순간이었다는 사실도…….”
“고모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두정이는 떠난 후에도 종종 메일로 사진들을 보내왔어. 그곳의 산과 들, 나무와 꽃들,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난 그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 줄만 알았지. 그런데 반년쯤 후, 집에 우편물이 도착했더구나. 주소는 모르는 곳이었지만 이름은 두정이였지. 난 편지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편지가 아니라 유서였어.”
이야기를 듣는 진우와 다정이 할 말을 잊은 채 두오를 바라봤다.
“나는 그제야 모든 것을 알게 됐지. 동생이 만나던 남자가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것도, 나이 차이가 열 살이나 났다는 것도, 동생의 뱃속에 그 사람의 아이가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동생이 그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것도.”
두오의 말에 진우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편지…… 아니, 유서에는 그동안의 사정이 모두 담겨 있었어. 한 달이 지나도록 월경을 하지 않자 산부인과에 갔고, 임신 진단을 받았다더구나. 그리고 그 사실을 그 사람에게 얘기했을 때 그 사람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지. 동생은 자기에게 그 사람의 아이가 생겼으니 그 사람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어. 임신 사실을 알린 지 보름이 지났을 때,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는구나. 관계를 정리하자고. 아이 얘기가 나오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더구나. ‘지우는 게 어떻겠냐.’라고…….”
다정이 진우를 쳐다보자 사색이 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 동생은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연락해도 만날 수 없었다더구나. 버림받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열흘이 넘게 걸렸다지. 물론 동생에게는 아이를 지울 생각 같은 건 없었어. 하지만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에게는 사는 의미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지. 유서에 이렇게 적었더구나. ‘이제 그 사람 없이 사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그렇게 그 아이는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한 채 멀리 떠났어. 나에게는 잠시 쉬고 싶다고 말한 후에…….”
갑자기 두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아이가 떠난 곳은 친한 동창의 이모가 원장으로 있는 한 보육원이었어. 몇 달 후 그곳에서 아이를 낳았고……. 아이를 원장에게 맡긴 후엔 한밤중에 종적을 감췄다는구나. 아이를 키워줄 사람이 도착할 때까지 아이를 돌봐달라는 편지를 남기고…….”
이야기하는 두오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유서에는 그 보육원의 주소, 그리고 아이를 부탁한다는 말이 적혀있었어. 아이를 잘 키워달라더구나, 자신을 키워준 것처럼. 나는 당장 차를 몰아 그곳으로 갔지만, 동생은 이미 사라진 뒤였어. 그곳에 남은 거라곤 동생이 가져온 짐들과 원장에게 남긴 편지, 그리고…… 네 동생뿐이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다정의 눈에 다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이내 아크릴판 너머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리고 다음 날 경찰에서 연락이 왔지. 투신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제발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달려갔지만, 내 눈에 보인 것은 이미 창백한 주검으로 변한 동생이었어.”
어느새 두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동생을 그렇게 보내고…… 나는 다윤이를 데리고 올라왔지. 그리고 네 엄마한테 말했어. 이제부터 이 아이를 내 딸로 키우겠다고. 하지만 네 엄마는 날 이해하지 못했어. 그 사람은 우리 신혼집을 두정이 집과 가까운 곳으로 정할 때부터 불만이었지. 내가 동생에게 너무 매여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다윤이를 키우는 문제로 몇 주간 싸운 끝에 네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 후로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두오는 마치 후련하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네 고모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고, 네 엄마는 그렇게 집을 나갔고, 그리고 네 동생은 그렇게 우리 집에서 자라게 된 거란다. 물론 너는 그때 겨우 세 살이라 기억나지 않겠지만…….”
두오의 가슴속에서 후회와 원한의 감정이 솟구쳤다.
“19년 동안이나 후회했단다. 네 고모가 잠시 쉬고 싶다며 떠나려고 할 때, 그때 왜 그 아이에게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는지……. 만약 그랬다면, 그래서 그 아이가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다정을 조용히 바라보던 두오는 이내 진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19년 동안이나 저주했다네. 사진 속 자네 아버지를 보며……. 하지만 그 사람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이름이 뭔지 조차 알 방법이 없었어.”
두오의 눈에서 서글픈 원망과 증오의 불길이 피어오르려는 순간, “2448, 면회 시간 끝났습니다.”라는 교도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선 후 다정을 바라봤다.
“다음 주쯤 한 번 더 와주겠니? 전해줄 게 생긴 것 같구나.”
“아빠…….”
“그럼 조심히 가렴.”
두오는 이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동안 진우에게 향했던 그의 시선은 이내 출구 쪽으로 향했다.
진우와 다정,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면회실에 남아 있었다.
스산한 냉기가 면회실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