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혜교 Mar 14. 2023

의지박약형 인간을 위한 실천 매뉴얼

아주 최소한의 갓생을 향하여



지금까지 무려 7화에 걸쳐 게으름의 본질과 종류 등을 이야기했다. 내가 얼마나 게으른 사람인지도 충분히 자랑한 듯하다. 이제는 드디어, '게으른 사람이 성취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다. 게으르지만 끝내 성취해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게으르니스트를 위한 필승의 실천 매뉴얼은 없을까?




의지박약형 인간에게도 희망은 있다


타고나기를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난 6시쯤 되면 알아서 눈 떠지던데?", "운동 안 하면 찌뿌둥하니까 그냥 하는 거지." '그냥' 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재능의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게으르다는 것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의지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으르니스트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의지는 충분히 기를 수 있다. 힘들어 죽겠다 싶은 그 순간 한 발 더 내딛는 힘, '그릿'이 유행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기를 수 있는 힘이라는 희망 덕분에. 다만 의지박약형 게으르니스트에게는 훨씬 더 구체적인 매뉴얼이 필요하다.


"살면서 가장 열심히 살던 시절이 언젠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수험 생활을 해본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고등학생 때요." 실제로 '고등학교 3년 내내 6시에 일어나서 학교 갔는데 1교시쯤은 껌이지!'라고 생각하며 1교시 강의를 잔뜩 신청했다가 제대로 출석하지 못하는 대학생이 많다.


하지만 고등학생 시절에는 게으른 사람이나 부지런한 사람이나 모두 비슷한 사이클로 살아간다. 그때는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했을까? 바로 '루틴'이다. 어제 했고 오늘 하고 있으며 내일도 할 일들. '그냥' 할 수 있으려면 몸이 먼저 움직일 정도의 루틴이 필요한 것이다.





아주 최소한의 습관


하지만 우리는 성인이 되었다. 김치찌개에 김치보다 고기를 더 많이 넣고 끓일 수도, 텐텐 한 박스를 사 먹을 수도 있는 그런 자유로운 존재다. 누군가 나를 규제하지도, 강제로 무언가를 시키지도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 새로운 루틴을 만든다는 건 쉽지 않다. 가뜩이나 출근도 해야 하는데, 안락한 침대가 나를 기다리는데 여기서 뭘 더 한단 말인가.


지난 5편, <나는 내 눈치를 보기로 했다>에서 이런 내용을 언급했다. '게으르니스트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의 눈치를 봐야 한다. 삶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이 아닌 내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즉, 나를 발전시킬 루틴을 만들고 싶다면 내 눈치를 본 뒤 최대한 덜 거슬릴 구석에 끼워 넣어야 한다.


나의 경우, 어학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가뜩이나 머리 아픈 이 삶에 복잡한 공부까지 추가하는 것을 나의 게으름이 용납할 리 없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몇 가지 규칙을 정해보았다.


- 아무 데서나 할 수 있을 것

- 언제나 할 수 있을 것

- 돈이 많이 들지 않을 것

- 약간의 강제성이 있을 것


이 정도의 조건을 갖춘다면, 게으름을 무릅쓰고 도전해 볼만했다. 문제는 이러한 조건에 맞는 어학 공부 방법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전화영어도, 학습지도 제외되었다.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는 당연히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어플로 공부하는 것을 택했다.





세상에서 가장 관성이 강한 것은?


나다. 게으르니스트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간다. 원대한 계획을 세워봤자 언제나 물거품이 된다. 인어공주보다 내가 한 수 위다. 그래서 나는 어학공부를 결심하면서 이 기준을 최우선으로 두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할 수 있는가?'


스마트폰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한다. 힘겹게 강남역 어학원까지 갈 필요도, 매일 같은 시간마다 원어민 선생님의 전화를 기다리며 공포에 질릴 필요도 없었다. 인스타그램을 누르려던 손을 잠시 멈칫하고 손가락의 방향을 돌리는 딱 그 정도의 용기.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무료 어플부터 찾아 나선 건 어쩌면 당연했다. 돈으로 의지를 사는 것도 성인의 특권이라지만, 내 게으름의 무시무시함을 잘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 게으름의 반대편에 배팅하는 건 리스크가 컸다. 그렇게 '듀오링고'라는 어플로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듀오링고는 아주 초급 단계에 최적화되어 있어서 영어보다는 제2외국어 공부에 적합하다. 처음 접속하면 Boy와 Girl부터 알려준다.)


듀오링고로 프랑스어 한 세트를 끝내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 물론 여러 세트를 한다면 실력이 훨씬 빨리 늘겠지만, 나에게 필요한 건 꾸준함이지 엄청난 실력이 아니었다.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멍하니 유튜브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 슬금슬금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3분 정도를 투자하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을 누릴 수 있다. 내가 며칠이나 쉬지 않고 공부했는지 알려주는 기능도 있었다. 그래서 이 도전은 나의 게으름을 이겼을까?






많이 게으르지만 조금 부지런하게


쉬지 않고 프랑스어를 공부한 지 1,000일이 넘었다. Boy와 Girl부터 시작했지만 이제는 짧은 문장 정도는 읽고 쓸 수 있다. 무려 1,097일 동안 공부했는데도 실력이 이모양인 이유는, 아주 칼같이 매일 5분 이하로만 공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극히 소박한 움직임 덕분에 나는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얻었다.


여기에서 용기를 얻어서, 영어 공부를 위한 유료 어플도 두 개나 결제했다. 무료에서 유료로 넘어갔다는 건, 게으름을 이길 자신이 조금 생겼다는 뜻이다. 여전히 학원이나 인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그래도 앞서 언급한 '아주 최소한의 습관'을 길러내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결론적으로, 의지 박약형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약간의 방향 전환이다. 간식을 끊겠다는 다짐보다는 사무실 서랍에 과자를 사다 넣지 않는 것이 쉽다. 책상에 앉아 학습지를 푸는 것보다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잠시 들여다보는 것이 쉽다. 내가 발전하고 싶은 방향과 나의 게으름을 연관 지어 나만의 루틴을 만드는 것. 이렇게 생긴 '아주 최소한의 습관'이 모이면, '아주 최소한의 갓생'이 시작된다.




게으르니스트's 한 마디

"삶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이 아닌 내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소소한 일상과 각종 소식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어요!

➡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이전 07화 계획하라, 한 번도 게으른 적 없던 것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