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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Mar 20. 2023

취업을 포기하고 깡시골에 삽니다

Z세대의 시골살이


젊은 사람들은 답답하고 낯설어서 시골생활에 적응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거나 아무 때나 옷을 살 수 있는 그런 도시의 삶이 청춘의 보편적인 이미지에 훨씬 가까우니까. 그러나 시골 마을에 정착해 힐링라이프를 보내고 싶은 젊은이도 분명히 존재한다. 퇴근길 서울 9호선 급행에 매일같이 몸을 싣다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리틀 포레스트>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같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시골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더더욱 그런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집순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한적한 마을에 지어진 예쁜 주택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상상을 한다. 텃밭에서 과일을 따먹고 마당에 앉아 산들바람을 느끼는 그런 상상을.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내가 시골 마을에 산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되묻는다. "일자리는 어떻게 하고요?" 한창 커리어를 쌓아나갈 20대를 시골에서 보낸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다. 대기업들이 터를 잡고 있는 일부 지역은 괜찮겠지만, 그 외 지역에서는 제대로 된 이력을 쌓고 돈을 벌만한 일자리를 찾는 게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서 이 동네의 젊은이들도 도시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언제까지고 시골에만 머물 수 없으니까.




도시의 삶은 찬란할 줄 알았다


나 역시 같은 이유로 서울에 나가 살던 때가 있었다. 보증금 500에 월세 55. 공과금이나 관리비를 포함하면 매달 60만 원 훌쩍 넘는 돈이 나갔다. 이렇게 거금을 주고 세든 방은 4평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원룸이었다. 바닥에 누워 몸을 데굴데굴 세 번 굴리면 끝나는 공간. 이 좁은 공간에서 먹고 자는 모든 일상을 다 보내야 했다. 하나뿐인 창문은 언제나 암막커튼으로 가려두고 생활했다. 어차피 햇빛이 제대로 들지도 않을뿐더러, 창문을 열어도 보이는 건 앞 건물뿐이니까.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면 현관에서 집안의 모든 공간을 둘러볼 수 있었다. 침대 옆의 콘센트부터 싱크대 위의 국자까지. 그 모습이 너무 싫어서 나는 하릴없이 동네를 돌았다. 산책 아닌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손을 씻으려면, 너무 좁아서 문이 다 열리지도 않는 화장실에 몸을 욱여넣어야 했다. 변기에 앉으면 양쪽 벽을 손으로 짚을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끔씩 만취한 남자가 건물에 들어와 도어록을 눌러대곤 했다.


나에게 우울만을 주던 그 집에 살기 위해서 나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월급을 받아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통신비와 보험료, 주택청약까지 빠져나가고 나면 모을 수 있는 돈이 별로 없었다. 커피 한 잔을 사 먹기는커녕, 한 끼에 만 원씩 하는 밥값마저 부담스러웠다. 회사에는 도시락을 싸다녔고 주말에는 한 끼만 먹었다. 집 앞에 스타벅스가 있고 걸어서 백화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분명히 행복하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돈이 없어서 그래. 돈을 더 벌어서 더 좋은 집에 가고 더 좋은 걸 먹으면 나아질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안다. 전세 2억 8천짜리 투룸 신축 빌라에 살면서 점심마다 스타벅스를 한 잔씩 사 먹고 퇴근길마다 올리브영이나 와인바에 들러 몇 만 원씩 카드를 긁어댔더라도, 나는 서울에서 행복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시골에서 먹고사는 법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결심했다. 어떻게든 양평에서 살아보겠다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에서 일거리를 찾겠다고. 젊은이가 시골에 살며 돈을 버는 게 불가능한 은 아니다. 당장 우리 가족만 보더라도, 아빠와 언니는 차를 끌고 매일 도시까지 출퇴근을 한다. 서울에서도 1시간 정도 거리를 매일 오가는 사람은 많으니 생각하는 것처럼 진입장벽이 높은 일은 아니다. 오히려 서울보다 차가 막히지 않으니 수월할 수도 있다. 물론 회사 코앞에 사는 것만큼 편리한 건 없겠지만, 이 동네에서 마주친 '출퇴근러'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재택근무가 가능한 회사에 취업하는 것도 방법이다. 코로나19 이후로 꽤 많은 회사가 재택근무제를 선택했으니까.


동네에 카페나 식당을 창업하는 젊은이들도 있다. 서울에나 있을 법한 메뉴를 들고 시골에 오면, 동네 사람들도 신기해하며 반응을 보인다. 워낙 유동인구가 적어 금방 망하는 가게들도 있지만, 이런 개척자들 덕분에 이 시골 마을에서 쌀국수도 먹고 육회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우리 집과 이런 식당들은 서울로 따지면 잠실역에서 역삼역 정도, 부산으로 따지자면 서면역에서 광안대교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지만, 앞서 밝혔듯 이 동네에서 이 정도 거리는 근처에 속하니까. 아직 발전되지 않은 곳에 일찍이 자리 잡아 장사를 하며, 일자리를 직접 만들어내는 사례다.


나는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프리랜서다. 주로 골방에 틀어박혀 글을 쓴다. 제법 열심히 쓴 덕분에 20대 중반에 총 세 권의 저서를 가진 작가가 되었다.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는 외부 기관에 회의를 나가서 정책 자문을 하고, 종종 타 지역으로 강연을 나가기도 한다. 타인의 글을 첨삭해 주거나 외부에 글을 기고하는 것도 쏠쏠한 돈벌이다. 만일에 대비하여 디자인이나 영상 편집 스킬도 키워두었다.






불안하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요즘 같이 편리한 세상에 굳이 시골에 산다고?'라며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많겠지만, 오히려 인터넷과 SNS가 발달된 요즘은 어디에 살아도 일을 구하기가 수월한 시기다. 나 역시 온라인을 통해 내가 한 활동을 정리하고 홍보할 수 있었고 지금은 꽤나 자리를 잡아 굶어 죽을 걱정은 하지 않고 산다.



한창 돈을 벌고 모을 나이에 시골에서 사는 건 분명히 모험이다. 나 역시 서울에서 취업을 한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돈을 모으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내가 서울에서 열심히 돈을 모은다면, 그 목표는 분명 '양평에 집 짓고 살기'일 것이다. 나는 나의 행복을 중년까지 유예하고 싶지 않았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은 없지만, 매일 창가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이 있다. 123층짜리 전망대는 없지만, 양평 하늘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매일 별이 뜬다. 내가 시골살이를 고집하는 건 엄청난 신념이나 대단한 욕심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저 붐비는 2호선 대신 한적한 마당에서 내 젊음을 만끽하기로 했다. 조금 불안정하고 많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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