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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가가 되는 법'을 공유합니다

작가의 마음과 걸음

by 송혜교


이제와 고백하지만, 나는 책이 출간되기 직전까지도 내 글에 자신이 없었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하는 것이었다던 나희덕 시인의 시 속 한 구절처럼, 구리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미친 듯 써재꼈던 그 무수한 문장도 실은 구리게 흘러갔다.


글에도 심폐소생술을 할 수 있을까? 이대로라면 희망이 없는 것 아닐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편집부로부터 글이 너무 딱딱하다는 피드백을 받았을 때는 좌절감까지 들었다. 난 에세이는커녕 평소 일기도 잘 쓰지 않았다. 기껏해야 두 장 짜리 세미나 발제문이나 쓰던 사람이었는데, 이런 내 실력을 적나라하게 들킨 거였다.


'나 글 좀 쓰는 사람이야'라는 정체성은 글이 업이 아닐 때나 지킬 수 있었다. 글 좀 쓰는 사람 말고 글만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돌잡이 수준이었다. 돌잡이 아기와 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나는 뭘 해도 귀여움 받을 수 있는 그런 시기를 진작에 지나버렸다는 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잘 쓸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독자의 마음으로 책을 고르다


의사를 만나려면 병원에 가고 가수를 만나려면 공연장에 가듯, 작가를 만나려면 도서관에 가면 된다. 작가는 글로 소통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잘 쓰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도서관에 갔다. 물론 서점에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겠지만, 잘 쓰는 법을 알게 될 때까지 책을 사다가는 파산할 것이 분명했다. 책을 둘 공간이 부족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모든 책장 사이사이를 누비며 일명 '책 쇼핑'을 했다. 아마 내 신발 밑창에 핑크색 페인트를 칠해두었다면 자료실 바닥 전체가 핑크색으로 물들었을지도 모른다. 제목을 찬찬히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모두 뽑아서 품에 안았다. 그렇게 한아름 안고 책상에 돌아와 남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가끔은 "와, 이렇게 빌리는데도 다 공짜라니!"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정말 '그지 같은' 책도 몇 권 마주쳤다. 내 책이 그 그지 같은 작품 리스트에 올라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도서관으로 책 쇼핑을 떠난 것이 단순히 글을 많이 읽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만약 작품성이 보장된 좋은 책만 읽고 싶었다면 서점의 스테디셀러 목록대로 책을 골랐을 것이다. 작가와 책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채로 책을 고르는 독자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었다. 책 계약을 하고 난 뒤부터는 순수한 독자의 마음으로 책을 고르는 일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다시 독자의 입장으로 돌아가 어떤 표지와 어떤 제목이 첫 눈길을 끄는지, 어떤 글이 그 책의 마지막 장까지 독자를 이끄는지를 모두 알고 싶었다. 작가의 유명세도 출판사의 명성도 따지지 않고 책을 골랐다. 유명하지 않은 내 책을 읽어줄 미래의 독자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빠르게 퉤, 하고 침착하게 퇴고합시다


힘겹게 초안을 써 내린 끝에 나에게도 첫 퇴고의 시간이 왔다. 처음부터 일필휘지는 꿈도 꾸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되는 대로 써서 보냈다. 내 글에 자신이 없다면 좋은 글이 될 때까지 고치면 되겠지. 나에게 믿을 구석은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일찍이 출판사에 이렇게 말해두었다. "피드백 가감 없이 주세요.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차 없이 주세요." 그리고 편집부에서는 정말로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냉정한 메모가 주렁주렁 매달린 한글 파일이 도착한 것이다.


나는 파일을 열어보자마자 "끄아악...!" 소리를 낸 뒤 서둘러 노트북을 덮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가차 없이 말해달라고 패기를 부리던 시점부터? 아니면 심호흡도 없이 파일을 연 것부터? 나는 다시 긴 한숨을 내뱉고 피드백을 읽기 시작했다. 되는 대로 원고를 써서 보낸 과거의 나에게 퉤, 하고 침을 뱉고 싶었다. 편집부의 메모에 따르면 내 글은 쓰레기가 분명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읽어보니, 메모에 담긴 정성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내 글의 어느 부분이 부족하고 어떤 개연성이 필요한지, 독자의 입장에서 어떤 내용이 궁금할지 상세히 적혀있었다. 처음의 충격이 가시자 좋은 출판사를 만났다는 안도감이 가득 밀려왔다. 누군가 이렇게까지 내 글을 아껴준다면, 분명히 좋은 책이 탄생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피드백을 따라 글을 수정해 나가니 글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첫 퇴고를 거치고 나니 추가원고를 쓰는 일도 훨씬 수월해졌다. 내 글의 문제점을 잘 알 수 있었다. 편집부의 피드백이 내겐 희망이 된 셈이었다.







마감이 없는 사람처럼 살자


집필 과정에서 한 가지 다짐한 것이 있다면, 마감일을 법처럼 알고 철저하게 지키자는 거였다. 세상에는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도 많고 나보다 유명한 사람도 많은데, 그 사이에서 나도 잘하는 게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언제나 약속한 마감일 일주일 전을 기한으로 잡았고 마감일을 신경 쓰지 않고 꾸준히 쓰는 연습을 했다. 만약 내 초안이 구리더라도, 계획보다 일찍 보내면 수정할 여유 기한이 있을 테니 보험을 들어두자는 마음이었다.


보통의 작가들은 마감을 잘 지키지 않기 때문에 편집자가 임의로 마감일을 당겨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사실 우리 출판사의 편집장님도 실제 마감일보다 일주일 당긴 가상의 마감일을 나에게 전달했는데, 내가 전해 들은 마감일보다 열흘이나 빠르게 원고를 보내는 바람에 작업일이 총 보름이나 당겨졌다고 한다. 그때 그렇게 꾸준하고 치열하게 쓰는 연습을 한 덕분에 글 쓰는 속도가 많이 빨라졌다. 방향도 속력도 전보다 눈에 띄게 나아진 것이다. 출간작가가 되고서 얻은 가장 값진 것은 명성도 인세도 아닌 이 필력의 상승이었다.






도망도 원망도 아닌 희망이었어


여담이지만, 내게 첫 피드백 파일을 보낸 뒤 출판사에서도 마음을 졸였다고 한다. 평소 메일 답장이 빠른 편인 내게서 답장이 오지 않자 대표님과 편집장님은 "작가님 도망간 거 아니에요...?"라며 합리적 의심을 했다고. 실제로 첫 피드백을 받고 도망가는 작가도 있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고쳐 쓰느라 바빠서 바로 답장하는 걸 잊은 거였다.


고통 끝에 써낸 초안이 얼마나 구린지를 받아들여야 하는 작가의 마음만큼이나, 피드백을 보내는 편집자의 마음도 복잡할 것이다. 작가의 기분을 고려하며 수정사항을 전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이 출간된 후에 더더욱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글을 빌어 멋진 출판사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때 그 무시무시한 1차 피드백본을 보고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도망도 원망도 아닌 희망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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