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안 쪽팔린 글' 쓰는 법

작가의 마음과 걸음

by 송혜교


책을 쓴다는 건 대체로 쪽팔림을 무릅쓰는 일이다. 초보 작가라면 더더욱 그렇다. 즉, 첫 집필이란 나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흰 바탕 위의 검은 글씨로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이다. 첫 에세이의 출간 계약을 할 당시 나는 만 21세였다. 연륜이나 지혜가 턱없이 부족한 만큼 불안감도 컸다.


그럼에도 나는 책을 써보겠다고 선뜻 달려들었다. 겁이 나는 건 사실이지만, 작가를 꿈꾸던 어린 날의 나를 생각해 보면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어쩌면 열심히 살았던 과거의 나에게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일지도 몰랐다.





누가 소재 좀 던져주세요


그렇게 쓰고 싶었던 책인데, 술술 써져야 하는 거 아닌가? 예상과는 다르게 에세이 집필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재 전쟁이었다. 일명 '필이 왔을 때' 신나게 한두 페이지를 써 내려가는 것과 12만 자를 써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 방대한 분량을 매끄럽게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부드럽지만 재미없지는 않게 내 삶을 드러낼 아이템'이 족히 백 개는 필요했다. 평소에는 잡생각이 그리 많이 드는데, 왜 책상에 앉기만 하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걸까? 영감은 왜 판을 깔아줄 때는 잠잠하다가 뜬금없이 샤워나 설거지를 할 때 찾아와서 젖은 손으로 급하게 핸드폰에 휘갈겨쓰게 하는 걸까?


나는 오죽하면 친구들에게 "생각나는 단어 하나만 아무 거나 던져줘 봐..."라며 글감을 구걸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야속하게도 떡볶이나 버거킹 등 자신이 먹고 싶은 야식메뉴만 불러주었다. 내가 뛰어난 작가였다면 떡볶이 소리만 듣고도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대작을 떠올렸을 텐데, 내 머릿속에는 '떡은 쌀떡이 낫고 아무래도 순대와 튀김을 추가해서 먹는 게 좋겠다' 정도만이 떠올랐다.


쓸 말이 없다는 사실은 종종 나를 울적하게 했지만, 집필 기간이 길어지면서 나에게도 노하우가 조금씩 생겼다. 이를 테면, 영감이 없을 때는 억지로 쥐어짜기보다는 아예 노트북을 덮고 책을 읽는 편이 좋다는 것. 멋진 책들을 읽다 보면 쓰고 싶은 주제가 떠올랐다. 물론 가끔은 앉은자리에서 책 두 권을 읽어내고도 '흐흐... 재밌다.'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독서는 적어도 내게 '포기하지 않고 써내겠다'는 동기를 부여해주곤 했다. 이 멋진 작가들도 분명 책을 쓰는 과정에서는 나처럼 괴로웠을 터였다!





각자의 생, 각자의 이야기


그러나 슬프게도, 소재가 떠오르지 않는 건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다. 정말 지독한 것은 내 글에 대한 자신감 부족이었다. 내 글을 내가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사랑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분명 나도 학창 시절에는 글 깨나 쓰는 학생이었지만, 그건 학교 안에서의 이야기였을 뿐 어른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혼자 쓰고 혼자 읽는 건 그 누구보다 혹독한 비평가에게 말로 얻어맞는 것과 같았다. 남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날 선 말도 자신에게는 기꺼이 꽂게 되는 법이니까. 내 경험이, 경력이 부족해서 글감이 없는 걸까? 나도 남들처럼 마흔을 훌쩍 넘어 젊은이들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위치가 되었을 때쯤 글을 써야 했던 건 아닐까?


수많은 자아성찰을 거친 끝에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자기 객관화는 삶에 도움이 되지만, 지나친 자아비판은 집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내게 출간을 제안한 멋진 출판사를 믿어 보자. 각자의 생에는 타인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나의 짧은 인생에도 분명 가치 있는 이야기는 있을 것이다.






안 쪽팔린 글을 쓰고 싶어요



그렇게 폭풍 같은 집필 초기를 거치고 어느 정도 원고가 쌓였을 무렵, 내 가장 큰 관심사는 '쪽팔리지 않은 글을 쓰는 방법'이 되었다. 첫 책만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진다는 작가들을 여럿 보았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내 책을 읽을 독자들은 대부분 나보다 연륜 있는 사람들일 텐데, 내 얘기는 그렇게 재미있고 흥미진진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주위의 작가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시간이 흐른 뒤 돌아봐도 안 부끄러운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돌아오는 대답은 각양각색이었다. 퇴고를 열심히 해라, 잘쓸 수 있을 테니 걱정 말아라, 그냥 그 나이의 기록이라고 생각해라... 그중에서도 가장 명쾌한 해답을 준 사람이 있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을 낸 뒤 인정받은, 나이 지긋하신 작가님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게 답했다. "난 아직도 내 책이 쪽팔려!" 그 뒤로 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질문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최선을 다한 뒤 적당히 쪽팔려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첫 책은 첫사랑


책을 출간한 뒤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첫 책은 첫사랑 같은 존재라는 걸. 그 어느 때보다 애틋하게 온 마음을 다 쏟은 대상이었는데, 그때는 그렇게 멋져 보였는데. 몇 년이 지나 다시 마주치면 결국 실망하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더 많은 것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그 쪽팔림은 이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책이 나온 직후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제 앞으로 한 10년은 쓸 얘기 없어. 다 썼어 진짜로."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또다시 나의 일상을 적어 내려가고 있다.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능숙하게.


그러니, 첫 책은 첫사랑. 모든 걸 불사른 뒤 "또다시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어느새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는 것처럼. 그때는 왜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었을까 후회하면서도, 결국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그런 사랑처럼. 내 부족함 많은 첫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고 그 자리에 머물 것이다.




소소한 일상과 각종 소식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어요!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