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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Aug 02. 2020

어중간한 취미가 최고의 취미

차를 즐겁게 마시려면 차를 사지 마세요


저는 취미가 많은 편입니다. 코바늘 뜨기부터 서양 면 자수, 자수를 중심으로 한 전통 규방 공예, 사시코(일본 전통 문양 자수), 츠마미 세공(꽃 등의 장식품을 만드는 일본 전통 공예) 등이 수예 취미이고요, 넓은 공예에서는 귀고리나 목걸이 등을 만들거나 화학 약품을 다루는 조형도 몇 해간 해 봤습니다.


최근에는 서예를 연습하고 있고, 수예에 친숙하다 보니 차 받침을 뜨기 좋은 태팅 레이스나 터키 전통 자수도 관심이 갑니다. 홈 가드닝은 두어 달 전에 시작한 즐거운 취미인데 화분 스무 개 정도와 화단 세 개를 가꾸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퍽 오래 해 오고 있는 취미가 차 마시기이지요. 차 마시기도, 서양 차와 중국 차, 그리고 일본 말차는 서로 필요한 도구가 달라서 다구를 갖추려면 커다란 찻장에 한 짐입니다.


이 많은 취미들을 하나라도 하려고 하면 준비할 것이 참 많습니다. 지금 옆에 있는 자수 입문 책만 펼쳐서 봐도, 자수를 시작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품은 이렇게나 많습니다.


커다란 나무 수틀을 보고 든 생각. '우와, 본격적인걸……'


이뿐일까요? 자수 실은 종류와 색상과 굵기에 따라 수백 가지 종류가 있고, 여러 색 도안을 놓으려면 최소한 스무 가지 정도 실은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실을 타래에서 조금씩 뽑아 쓰기 때문에 그냥 한 바구니에 담아 두면 구분도 어렵고 서로 엉키기 마련이기에 본격 자수가 취미인, 혹은 업으로 하시는 분들을 보면 실을 구분해서 담아 두기 위한 전용 상자가 있습니다. 핀을 넣는 통, 핀 쿠션, 바탕 천도 얼마나 색상과 종류가 많으며, 전용 공구를 갖추자면 작업실이 따로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자수만 그럴까요. 색연필로 그림 그리기가 취미라고 해도, 몸만 있으면 될 것 같은 운동이 취미여도, 어떤 취미이든 '제대로 모든 것을 갖추자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입니다. 항간에는 어떤 취미를 시작하겠다고, 큰 마음 먹고 추천 입문 용품을 모두 구매하지만 그만 그대로 집에 보관한 채 몇 년이고 시간이 흐르고 마는 분들도 있지요.


저 또한, 취미가 많기 때문에 동시에 어떤 취미도 아주 부지런하게는 하지 않아서(저는 자수 바구니를 한 달에 한 번 정도 꺼냅니다.), 모든 취미의 모든 물품을 다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약간 가지고 있는 편이지요. 저는 멋진 자수 실 전용 박스는 없고 최대한 엉키지 않기를 바라며 집어넣어 둔 자수 실 비닐이 있고, 좀 더 하드코어한 공예에 필요해서 샀던 송곳을 츠마미 세공에 돌려 쓰고, 안 쓰는 찻사발에 수생 식물을 키웁니다. 얼렁뚱땅 굴러가는 취미 생활이지요.


이렇게 말하자니 취미 종목이 많기만 하고 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보이네요. 취미 물건은 다 갖추자면 부담이 되고 관리도 간단치 않으며 때로 정말로 정성을 들이는 취미인들을 보면 내 어중간한 좋아함은 참 별 것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내 어중간함에 신물이 나


그런데 오늘은 어중간한 취미가 좋은 이유에 관한 일화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 일요일, 차도구 전시회에 가기 전에 모 디저트 가게에 들렀습니다. 디저트와 함께 마실 음료를 고르다가 마리아쥬 프레르 사에서 나온 새로운 차가 메뉴에 있길래 주문했는데, 주전자에 나온 차를 받아 보고 한 잔 따라 향기를 맡고 저는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서양 가향 차는 정말 오랜만이다!


서양 가향 차 특유의, 향수를 조향하듯 화려하고 섬세하게 쌓아 올린 가향은 서양 홍차를 마시는 즐거움 가운데 특징적인 한 종류입니다. 잎 자체의 깊고 오묘한 풍미를 즐기는 스트레이트(가향이 없는) 티와는 또 다른, 맛의 디자인을 보는 즐거움이지요. 가향 차는 인상이 확고하고, 브랜드 스타일을 보는 재미도 있고, 이름과 맛을 엮어서 감상하는 재미나 원할 때면 언제고 똑같은 그 차를 다시 마실 수 있다는 점에서 홍차 계의 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아, 서양 가향 차구나!' 하는 기분이 그 디저트 가게에서 찻잔을 코 끝에 댄 순간 느껴져서 저는 무척 반갑고 즐거웠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제게 서양 가향 차가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주 마음에 드는 가향 차는 구매를 하고 있고, 집에 있는 찻장에 원할 때 마실 수 있는 서양 가향 차가 이미 일곱 종은 넘게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그 순간 저는 무척 새롭게, '서양 가향 차가 오랜만이네!' 라고 느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둘은 무엇이 다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니 이렇습니다.



Q. 집에 있는 가향 차는 그럼 뭔가요?
A. 그건 그냥 향기 나는 차요…….



제게 있어서 '서양 가향 차' 는, 화려하고 인상 깊은 향기의 디자인을, 그에 어울리는 멋진 찻잔과 찻주전자와 함께 즐기는 새로운 경험을 뜻했습니다. 반면 집에서 마시는 차는 이미 익숙한 향기인데다 가지고 있는 컬렉션 중 하나라서 새로운 분위기의 환기는 되지 않았지요. 갑자기 빠져든 사색 속에서 저는 지금 마시고 있는 이 차를 사서 집에 가져온다면 지금처럼 새롭고 즐겁게 느껴질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쩐지 내가 가진 차라면 특별함이 사라지는 기분일 것 같았습니다.



한국에서 카페가 그렇게나 발달한 이유는 집이 아늑하지가 않아서, 아늑하고 예쁘게 꾸민 공간을 누리러 다들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라던가요.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내가 갖지 않은 것을 구매해야 가치가 있습니다. 집을 어떤 카페보다도 아름답게 꾸며 놓은 사람은 굳이 인테리어가 좋은 카페를 찾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지요. 있는 걸 돈 주고 누릴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티 룸을 최고로 특별하게 만들려면 차를 집에다 사 놓지 않아야 합니다. 집에서 차를 마실 수 있을 때와 집에서 차를 마실 길이 없을 때 티 룸의 특별함과 새로운 경험이 주는 기쁨의 크기는 분명 다를 테니까요. 마음에 드는 차라면 꼭 사고 싶어하는 차 동호인들에게는 역설적인 말이지만요. 차를 좋아하니까 차가 사고 싶은데, 차를 사면 차 마시는 기쁨이 줄어든다니요.


아무래도 차를 아예 안 살 수는 없습니다. 티 룸에서 마시는 차의 즐거움과는 다른, 집에서 마시는 차의 즐거움도 있고 말이지요.


그리고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어중간한 동호인으로서 차를 아무리 사고 도구를 갖추어도, 집을 티 룸으로 만들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에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적인 차 취미의 집과는 항상 조금은 거리가 있는 채, 적당히 갖추고 마시게 됩니다.


그런데 그래서 티 룸은 여전히 좋습니다. 집에 부족함이 있으니 티 룸이 좋습니다. 집을 어떤 방식으로 완벽하게 꾸민다고 해도 차 종류가 바뀌면 완벽한 환경의 조건도 달라지겠지요. 다른 차를 위해서는 다른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결국 완전히 모든 차에 좋은 공간은 세상에 없을 겁니다.



차 종류만 그럴까요. 누군가는 편안하게 앉아서 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다소 친숙한 느낌의 공간이, 누군가는 미적으로 간결하고 흠 없는 조화를 이룬 풍경 속에서 혼자 조용히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누군가는 모던하고 깔끔한 외관과 최신 카페에 가까운 시스템을 갖춘 가게가 좋은 가게라고 여기기 마련입니다. 각각의 기준에 따라서 보면 다른 가게들은 전부 못 미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다양한 기준들이, 다양한 기준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각각의 공간은 특별합니다.


부족함이, 때로는 내게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을 누릴 수 있는 기쁨으로 나에게 찾아온다고 생각하면, 애매하고 어중간한 것 투성이인 내 삶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쯤에서 문득 어느 찻집 사장님께 들었던 말이 떠오르네요.


찻잔은 가득 차 있으면 차를 담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생은 완벽하다면 기쁨을 담을 수가 없나 봅니다. 


애매한 고민과 어중간한 취미가 있기에 즐거운 삶을 오늘도 살아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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