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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Jul 20. 2020

소중한 순간은 기억 속에 있을까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하는 지금


가끔 차를 다 마시고서도 그 자리가 예뻐서 치우고 싶지 않은 때가 있습니다. 차를 마실 때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에 집중하게 되니, '차를 다 마시고 난 후의 모습' 도 예쁘게 느껴지는  당연지사입니다.


물줄기를 따를 때 피어오르는 김. 잔이 물을 담아 수면이 햇볕에 반짝이는 모습. 찻잎이 파랗게 피어올라 점차 주전자 속에서 부피를 늘리는 모양을 사랑한다마신  바닥에 남아 있는 거품, 찻가루가 묻어 흔적을 남긴 수건, 물이 서서히 말라 가는 대나무 솔이 그릇에 걸쳐 모습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운 모습을, 놓아 두고 '조금만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잠깐 테이블을 이대로 두고 다른 일을 하면 안 될까요? 꽃병에 꽂아 둔 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미련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이어지는 결과도 알고 있습니다. 찻자리는 이런 기분이 들 때 바로 치우는 게 좋습니다. 몇 시간이나 정리하지 않고 방치된 찻자리처럼 보기 안 좋은 것도 드물기 때문이지요. 마치 그 순간에는 아름다운 꽃을 꺾는 것처럼, 바닥에 거품이 남은 은 들어다가 씻고 솔은 털어다 제자리로 되돌려야 합니다. 수건도 멋지게 접혀 있었지만 그대로 두면 자국이 남고 착색됩니다. 박박 문질러서 빨아 너는 수밖에 없지요.


'이 순간의 좋음' 때문에 더 즐기고 싶었지만 좋은 순간은 잡아 늘리려고 하면 어느새 사라져 버립니다. 몇 시간 동안 다른 집안일에 열중하다 본 찻자리는 쓰고 치우지 않은 설거지거리 더미에 지나지 않아, 분명 '좋은 것' 이라고 생각했던 그 때의 느낌마저 망쳐 버리는 것 같습니다.


<Dance Macabre> ,  Koper Regional Museum


중세에 대 유행했던 '당스 마카브르(Danse Macabre) 라는 모티프는 해골로 형상화된 죽음이 살아 있는 사람들 곁에서 춤을 추고, 사람들이 이 죽음의 춤에 경악하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이는 당시에 절대적이었던 신분의 높낮음, 또 살아 있는 때의 (외형적) 미추에 상관없이 죽은 다음에는 누구나 똑같이 뼈만 남은 해골이 된다는 퍽 강렬한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죽음의 절대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찻자리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순간의 살아 있음입니다. 주전자가 따뜻한 물을 담아 공기 방울을 피워 올릴 때, 말라 있던 찻잎을 통통 부풀게 하고 맛과 향을 깨워내는 때, 집게는 잔을 잡기 위해 사용되고 솔은 차를 젓기 위해 기다렸다가 역할을 하는 일련의 시간 속, 물을 덥히는 것부터 시작되어 설거지를 끝내는 때까지 지속되는 과정 속에 있을 때 바닥에 남은 거품은 '여운 있어' 지고 수건의 자국은 '정겹습니다'.

 

우리는 많은 때에 어떤 것의 물성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것의 한때를 사랑합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찻자리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도 실은 그에 깃든 시간을 사랑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우리가 생에서 얼마나 많은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사랑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영원이라는 개념은 커다랗게 들리지만 우리 주변에 어디든 흔하게 있습니다. 아니, 사실 우리는 거의 모든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영원을 가정해서 말하고 듣고 살아갑니다. 프라이팬 하나를 사도 프라이팬의 기능을 설명하는 온갖 문장들은 당연히 그것이 제대로 기능할 때를 가정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영원하다는 듯이.


'티타늄 코팅으로 바닥이 들러붙지 않고 열을 고르게 전달하는 프라이팬!' 언제까지, 영원히? '티타늄 코팅으로 한 3년 정도 ... 바닥이 들러붙지 않고 열을 고르게 전달하는 프라이팬.'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용 설명서 한구석의 작은 글씨나 소비자 센터에서는 알려줄지 모르겠네요. '프라이팬은 원래 수명이 있는 제품이에요, 고객님.'


혹자는 프라이팬에 수명이 있다는 걸 누가 모르겠느냐고, 설마 프라이팬이 진짜 영원할 줄 알았겠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방 가전 코너에서 프라이팬을 면서 '이 프라이팬도 언젠가 수명이 다하겠지....' 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눈앞에 있는 프라이팬의 두께, 크기, 기능에 집중할 뿐입니다. 그 프라이팬으로 요리할 경우를 떠올리면서요. 

 

꽃이 시들기를 가정해서 꽃을 사지는 않고, 사랑이 끝나기를 가정해서 연애를 시작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모든 것에 끝이 있음을, 깊은 마음 어딘가에서는 알고 있지만 굳이 떠올리라고 요구하지 않으면 그 사실은 생각의 수면까지 솟아오르지 않고 저 깊은 이성 아래 어딘가에 잠겨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의 끝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에서 가정되지 않고, 대체로 우리는 영원을 가정하면서 살아갑니다. 찻잔이 깨진 모습을 상상하고 잔을 사지는 않았습니다. 



중세의 당스 마카브르는 아름답게 보이던 사람들도 죽음이 찾아오면 모두 부패하고 뼈가 되므로, 현 생의 미와 부를 쌓기보다는 신앙에 힘쓰라는 권유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끝나는 자리는 쓸쓸하며 안타까울 뿐입니다. 시든 꽃, 끝난 사랑, 깨진 잔, 설거지거리만 쌓인 테이블에 둘러싸여 살기에 인생은 길고 죽음은 어쩌면 찰나입니다.


물론 중세는 기독교 신앙이 문화를 지배하던 시기였으니 세속의 즐거움을 평가절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무엇일까요. 영원은 죽음 이후에 가게 되는 세계일까요?


과학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을 넓힌 이 시대에 찬찬히 살펴보면 하늘도 달도 해와 별도 영원하지 않고(행성과 항성은 존재하다가 소멸하니까요), 낮과 밤도, 단단한 돌도, 이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우주도 어쩌면 영원하지 않으리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많은 영원할 것 같은 순간을 즐겨 왔습니다. 찻물이 주전자 안으로 흘러들어가 햇볕에 반짝이고 향기를 피워낼 때, '이것도 곧 식어 초라해지겠지' 라고 생각하고 보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이 태어나는 순간에 끝의 가정은 사라지고, 끝이 없다는 것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영원함을 가정하는 인간의 능력만이 영원함 없는 세계에서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합니다.



일 주일이 지나면 시들겠지만 이 순간 꽃은 아름답고, '영원히' 의 빛이 한순간 반짝 빛납니다. 프라이팬은 삼 년쯤 지나면 닳아서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저녁 요리에 새 프라이팬을 쓸 생각으로 기분 좋게 돌아오는 길에 기쁨이 빛납니다. 영원할지는 모르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손을 잡은 바로 이 때가 영원하고, 소중한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 속에 남습니다.


차를 치울 때 우리는 한 순간의 영원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잔은 치우고 수건은 널어 좋은 시간을 떠나보내며, 굳이 백골이 된 뼈를 마당 앞에 늘어놓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시간의 축복으로 인해 어떤 아픔도, 상실도, 죽음도 영원하지 않으리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순간은 아마도 지나간 때들 중에 무수히 있고 앞으로 또 찾아오겠지요. 차를 치운 자리는 빈 테이블이어서 다시 어떤 것이든 차릴 수 있고, 지나간 시간 다음의 지금은 백지 같은 새 순간이라 어떤 기쁨도 아픔도 깃들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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