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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Oct 11. 2020

내 우아한 소꿉놀이

판데믹 시대의 홀로 다회 

요즘 같은 날에는 밖에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말에도 가급적 집에 머물러 달라니까, 그에 맞게 집에서 잘 지낼 물건들도 이리저리 장만하고, 그렇게 안락해진 만큼 또 나갈 일은 줄어드네요.


주말 약속은 한 달 전부터 신나게 잡아 두었던 일정이 무색하게 전부 취소되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여유로운 주말에 향합을 엽니다.



붉은 주칠에 모란 무늬가 양각된 향합은 선향을 태우고 남은 조각들이 들어 있는데, 알록달록해서 마치 색동 저고리 같습니다. 색깔도 다양하고 종류는 더 다양해서 뭐가 무슨 향인지 기억나지 않지요. 결과를 알 수 없는 선물을 여는 것처럼 조금 두근거리며, 하나를 집어서 불을 붙여 봅니다. 


버드나무며 호젓한 집이 그려진, 산수화가 들어간 향로는 구름처럼 곡선 모양에 짤퉁한 발이 네 개 달려 있는데 발 위에도 섬세하게 무늬가 그려져 있는 부분이 귀엽습니다. 유명한 청화 백자 작가들 작품을 보면 흰 바탕에 푸른색으로 그린 그림들은 화려하고 우아한 모란부터 강직한 필치로 그린 솔잎이 하도 선명해서 사이로 바람 부는 소리가 스스스 들릴 것만 같은,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도 있는데, 이 타카하시 도하치 로는 유들유들하면서도 세심하고, 그런데 또 무심한 듯 칠한 농담이 꼭 신선경 같습니다.


불을 붙인 선향은 그냥 도자기 바닥에서는 타지 못하고 꺼지지만 일종의 불연재인 향재 위에서는 끝까지 타기 때문에, 남은 향 꼭지들에 불을 붙여 향로에 넣고 감상할 수가 있습니다. 바람이 눈에 보이는 듯 구불구불 피어오르는 향 연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것에서는 소나무 숲, 어떤 것에서는 눈 덮인 매화 향이 솔솔 풍겨 와 오늘 지금 이 시간의 공기와 조화를 이룹니다.


'도자기 하나를 뭘 이렇게까지 감상' 하는 이 일이, 차를 마시는 동안 내내 계속됩니다.







찻자리를 하나 차린다고 하면, 먼저 오늘 쓰고 싶은 도구가 있는지, 오늘 마시고 싶은 차는 뭔지, 어떤 기분으로 마시고 싶은지를 생각해 봅니다. 한번에 다 떠오를 때는 별로 없고 그러나 대개 셋 중에 하나는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무엇을 써 볼까요?


먹에 가까운 청색으로 매화문이 그려진 하사미 완을 쓰겠다고 생각하고, 이제 이 완이 들어가는 자리를 어떤 느낌으로 만들지 상상해 봅니다. 대비를 살릴까? 부드럽게 녹아들듯이 할까? 식물은 언제나 좋으니 초록을 곁들여 그림 같은 찻자리로 만들까?


마침 밤이었습니다. 밤, 하니, 어두운 곳에 켜진 불빛처럼 강조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바탕에 검은 대나무 발을 깔면서, 검은 강물 위에 뚝 하고 떨어진 달빛처럼 가운데 완만 하얗고 다른 것들은 검은 전경 속에 잠긴 것처럼 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차 통도 색깔이 없도록 무늬 없이 새까만 옻칠 나츠메만 두고, 원래는 흰 도자기 받침대가 있는 차선과 차샤쿠에서 받침대를 빼고, 원래 배경에 있었던 것처럼 완에 걸치고 나츠메 위에 놓는 방법으로 하고, 물 버리는 그릇도 먹색, 향도 등 뒤에 피우고 다른 장식은 모두 치웠습니다.

 

검은 강물 위에 뚝 떨어진 흰 달빛. 배경을 떠올리며 뜨거운 물을 부으면, 차에서 향이 살아나며 이 공간은 잠시 생생한 밤 뱃놀이의 감각에 사로잡히는 듯합니다. 분명 차를 만들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하사미 완은 제가 가진 백자 바탕 다완 중에 가장 하얘서, 이렇게 먹백의 대비를 살리는 세팅에 적합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그 매력만 있는 것도 아니라, 선명한 꽃양귀비를 다화로 가져오고 전구색 불빛으로 휩싸인 화려한 자리에서도 선명한 존재감을 뽐내는데, 그 때는 바탕의 백색보다 광택 있는 흰색 위에 그려진 매화 무늬 선들이 주는 우뚝한 느낌이 좋습니다. 아끼고 쓰는 다구들은 이렇게 배경에 따라,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매력을 드러내기에 여러 번 보아도 질리지 않고 자꾸 새로운 즐거움을 주지요.


그뿐인가요. 자연광 아래서도 맑고 깨끗해 오히려 돋보이는 맛이 있습니다.


이렇게 차를 마시면 준비부터 정리까지 40여 분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 전에 찻자리를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시간도 있고, 중간에 좀 느긋하게 앉아서 딴생각도 하고 차려 놓은 자리의 멋짐도 즐기고 하면 금방 두 배로 늘어나지요. 저는 평일 밤에 종종 이런 말차 자리를 차려서 마시는데,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도 끝낸 다음 길게 차를 한 번 마시면 딱 잘 시간이 됩니다. 그날 여가 시간을 전부 차 한 잔 마시는 데 쓰게 되지요. 그럼에도 이렇게 차를 마시고 자는 날은 만족스럽습니다. 보통 퇴근 후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이유는 충분히 내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기분 때문인데, 이런 날 저는 차를 마시면서 '혼자 무척 잘 놀았' 다고 느끼거든요.


말차 타는 과정을 보자면 차를 만드는 딱 그 부분 자체는 5분이 걸리지 않습니다. 다완에, 물을 덥히고, 차를 넣고, 휘저으면 되니까요. 도구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앞뒤로 이렇게 길게 붙는 과정들은 다 일종의 엄숙한 소꿉놀이입니다. 그날의 컨셉을 정하고, 느낌을 정하고, 이렇게 놓았다 저렇게 놓았다 해 보고, 마음 내키면 배경 음악도 깔고, 연출에 연출을 얹는 퍼포먼스이지요.


그 소꿉놀이 무대 안에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있고, 작가가 만든 모습에서부터 내가 쓰면서 새롭게 아름다운 면을 발견하고, 주전자는 윤기를 내고 찻잔은 깊이를 더하면서 꾸려 가는 날들이 차 마시기의 즐거운 기쁨입니다. 누구에게는 고작 소꿉놀이 같지만 누구에게는 새삼 요즘 같은 날에, 약속 없는 주말을 부드럽고 충만하게 보낼 수 있는 취미. 고요하고 재미있는 이번 주 차 마시는 이야기는 여러분께 어떠셨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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