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우아한 소꿉놀이

판데믹 시대의 홀로 다회

by 혜하

요즘 같은 날에는 밖에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말에도 가급적 집에 머물러 달라니까, 그에 맞게 집에서 잘 지낼 물건들도 이리저리 장만하고, 그렇게 안락해진 만큼 또 나갈 일은 줄어드네요.


주말 약속은 한 달 전부터 신나게 잡아 두었던 일정이 무색하게 전부 취소되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여유로운 주말에 향합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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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주칠에 모란 무늬가 양각된 향합은 선향을 태우고 남은 조각들이 들어 있는데, 알록달록해서 마치 색동 저고리 같습니다. 색깔도 다양하고 종류는 더 다양해서 뭐가 무슨 향인지 기억나지 않지요. 결과를 알 수 없는 선물을 여는 것처럼 조금 두근거리며, 하나를 집어서 불을 붙여 봅니다.


버드나무며 호젓한 집이 그려진, 산수화가 들어간 향로는 구름처럼 곡선 모양에 짤퉁한 발이 네 개 달려 있는데 발 위에도 섬세하게 무늬가 그려져 있는 부분이 귀엽습니다. 유명한 청화 백자 작가들 작품을 보면 흰 바탕에 푸른색으로 그린 그림들은 화려하고 우아한 모란부터 강직한 필치로 그린 솔잎이 하도 선명해서 사이로 바람 부는 소리가 스스스 들릴 것만 같은,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도 있는데, 이 타카하시 도하치 로는 유들유들하면서도 세심하고, 그런데 또 무심한 듯 칠한 농담이 꼭 신선경 같습니다.


불을 붙인 선향은 그냥 도자기 바닥에서는 타지 못하고 꺼지지만 일종의 불연재인 향재 위에서는 끝까지 타기 때문에, 남은 향 꼭지들에 불을 붙여 향로에 넣고 감상할 수가 있습니다. 바람이 눈에 보이는 듯 구불구불 피어오르는 향 연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것에서는 소나무 숲, 어떤 것에서는 눈 덮인 매화 향이 솔솔 풍겨 와 오늘 지금 이 시간의 공기와 조화를 이룹니다.


'도자기 하나를 뭘 이렇게까지 감상' 하는 이 일이, 차를 마시는 동안 내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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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자리를 하나 차린다고 하면, 먼저 오늘 쓰고 싶은 도구가 있는지, 오늘 마시고 싶은 차는 뭔지, 어떤 기분으로 마시고 싶은지를 생각해 봅니다. 한번에 다 떠오를 때는 별로 없고 그러나 대개 셋 중에 하나는 있기 마련입니다.


본문3 _ 커버사진.JPG 오늘은 무엇을 써 볼까요?


먹에 가까운 청색으로 매화문이 그려진 하사미 완을 쓰겠다고 생각하고, 이제 이 완이 들어가는 자리를 어떤 느낌으로 만들지 상상해 봅니다. 대비를 살릴까? 부드럽게 녹아들듯이 할까? 식물은 언제나 좋으니 초록을 곁들여 그림 같은 찻자리로 만들까?


마침 밤이었습니다. 밤, 하니, 어두운 곳에 켜진 불빛처럼 강조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바탕에 검은 대나무 발을 깔면서, 검은 강물 위에 뚝 하고 떨어진 달빛처럼 가운데 완만 하얗고 다른 것들은 검은 전경 속에 잠긴 것처럼 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차 통도 색깔이 없도록 무늬 없이 새까만 옻칠 나츠메만 두고, 원래는 흰 도자기 받침대가 있는 차선과 차샤쿠에서 받침대를 빼고, 원래 배경에 있었던 것처럼 완에 걸치고 나츠메 위에 놓는 방법으로 하고, 물 버리는 그릇도 먹색, 향도 등 뒤에 피우고 다른 장식은 모두 치웠습니다.

검은 강물 위에 뚝 떨어진 흰 달빛. 배경을 떠올리며 뜨거운 물을 부으면, 차에서 향이 살아나며 이 공간은 잠시 생생한 밤 뱃놀이의 감각에 사로잡히는 듯합니다. 분명 차를 만들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하사미 완은 제가 가진 백자 바탕 다완 중에 가장 하얘서, 이렇게 먹백의 대비를 살리는 세팅에 적합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그 매력만 있는 것도 아니라, 선명한 꽃양귀비를 다화로 가져오고 전구색 불빛으로 휩싸인 화려한 자리에서도 선명한 존재감을 뽐내는데, 그 때는 바탕의 백색보다 광택 있는 흰색 위에 그려진 매화 무늬 선들이 주는 우뚝한 느낌이 좋습니다. 아끼고 쓰는 다구들은 이렇게 배경에 따라,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매력을 드러내기에 여러 번 보아도 질리지 않고 자꾸 새로운 즐거움을 주지요.


본문 4.JPG 그뿐인가요. 자연광 아래서도 맑고 깨끗해 오히려 돋보이는 맛이 있습니다.


이렇게 차를 마시면 준비부터 정리까지 40여 분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 전에 찻자리를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시간도 있고, 중간에 좀 느긋하게 앉아서 딴생각도 하고 차려 놓은 자리의 멋짐도 즐기고 하면 금방 두 배로 늘어나지요. 저는 평일 밤에 종종 이런 말차 자리를 차려서 마시는데,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도 끝낸 다음 길게 차를 한 번 마시면 딱 잘 시간이 됩니다. 그날 여가 시간을 전부 차 한 잔 마시는 데 쓰게 되지요. 그럼에도 이렇게 차를 마시고 자는 날은 만족스럽습니다. 보통 퇴근 후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이유는 충분히 내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기분 때문인데, 이런 날 저는 차를 마시면서 '혼자 무척 잘 놀았' 다고 느끼거든요.


말차 타는 과정을 보자면 차를 만드는 딱 그 부분 자체는 5분이 걸리지 않습니다. 다완에, 물을 덥히고, 차를 넣고, 휘저으면 되니까요. 도구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앞뒤로 이렇게 길게 붙는 과정들은 다 일종의 엄숙한 소꿉놀이입니다. 그날의 컨셉을 정하고, 느낌을 정하고, 이렇게 놓았다 저렇게 놓았다 해 보고, 마음 내키면 배경 음악도 깔고, 연출에 연출을 얹는 퍼포먼스이지요.


그 소꿉놀이 무대 안에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있고, 작가가 만든 모습에서부터 내가 쓰면서 새롭게 아름다운 면을 발견하고, 주전자는 윤기를 내고 찻잔은 깊이를 더하면서 꾸려 가는 날들이 차 마시기의 즐거운 기쁨입니다. 누구에게는 고작 소꿉놀이 같지만 누구에게는 새삼 요즘 같은 날에, 약속 없는 주말을 부드럽고 충만하게 보낼 수 있는 취미. 고요하고 재미있는 이번 주 차 마시는 이야기는 여러분께 어떠셨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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