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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Dec 02. 2020

퇴근 후 말차 한 잔 쭉

형식이 주는 평화로움


'아아, 피곤하다.'


집에 돌아오고 보니 오후 9시 20분. 내일도 출근하려면 열한 시 전에 자야 하니까, 그야말로 차 한 잔 딱 마실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차의 좋은 점은 이럴 때 의외로 부담없이 빨리 마실 수 있다는 점이고, 그럼에도 한 번 차를 마시자면 차릴 것이 한가득입니다.


이왕 차를 마시기로 했으니 어쩔 수 없지요. 항상 쓰는 차도구라도 디테일은 매번 다르기 때문에, 배치를 생각하고 자리를 펼칩니다. 물을 올려 놓고 완을 고르고, 차선과 차시와 차통들을 가져옵니다. 다행히 말차는 며칠 전에 체를 쳐 놓아서 오늘 체질을 하는 수고는 덜었습니다. 차선을 전용 받침대에 놓을까 소박하게 완 안에 걸쳐 놓을까 잠시 고민하고, 차통과 마른 차도구는 오른손 쪽에, 퇴수기와 물이 닿는 차도구는 왼쪽에 두기로 합니다.


이렇게 자리를 준비하고 마지막으로 제가 사용하는 조금 까끌한 질감의 차 수건과 부드러운 질감의 차 수건 중 오늘 무엇을 쓸지 골라서 놓고 있으면, 마침 물이 다 끓었습니다.


솥이 있다면 좋겠지만 현대인의 다도답게 전기 포트로 물을 끓이기 때문에, 물 온도를 가늠하는 저만의 기준이 있습니다. 표준 말차는 물이 다 끓자마자 포트를 가져와서, 다완을 덥히는 물을 붓는 동시에 차를 탈 만큼의 물 일정량을 숙우에 부어 두고, 느긋하게 차완을 덥히고 차선을 적시고 물을 버린 다음 정해진 동작으로 안을 잘 닦아서, 따끈따끈 보송한 완을 만든 다음 마실 만큼 차를 덜어 넣으면, 그때 딱 알맞게 식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이 '탁' 하고 다 끓자마자 모든 동작들을 느긋하게, 그러나 쉬지 않고 제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차에 따라 온도를 좀 더 낮춰야 할 때도 있고(차를 더는 동작을 더 느긋하게 하거나 완에 물을 따르기 전에 숙우를 든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거나 해서 조정합니다.) 반대로 즉석에서 체질을 하는 경우에는 모든 동작이 빈틈없이 스피디해지지만 이 기준이 있어야 온도를 가늠할 수 있기에 지켜야 하는 과정 중 하나입니다. 그게, 온도가 맞지 않으면 차가 맛이 없거든요.


이렇게 할 것이 많기에 저는 늦게 퇴근해서 힘이 빠진 채로, 차를 만들기 위한 모든 과정을 수행했습니다. 약간 힘 없는 손으로 얼른 꼼꼼히 (일단 알맞게 식은 물을 붓기 시작하면 온도가 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얼른 해야 합니다) 차를 개고 물을 더 부어서 빠르고 부드럽게 저었지요.


삭삭삭삭…. 얼마 전에 들은 이웃 분의 말로는 차선이 다완 안에 닿지 않고 찻물만 골고루 젓는 느낌으로 조심스럽지만 가뜬하게 젓는 것이 좋다고 했어서, 더더욱 손에 힘은 빼고 저었습니다. 이렇게 젓고 있으면 찻물의 질감을 손끝으로 세밀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부딪히는 곳이 없으니 찻물이 차선의 살들에 감기는 느낌, 제가 좋아하는, 종종 차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탄력 있는 반죽처럼 물을 젓는 동작에 딸려 올라오는 느낌 같은 것이 솔을 쥔 손에서 전해집니다.


이런 느낌이 들 때는 '아, 맛있게 되겠다.' 싶어서 설레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런 기분도 없습니다. 그냥 솔솔 차를 저으면 먹을 만한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차솔을 천천히 빼고 한숨 돌린 뒤 자리에 앉아서 한 모금 마십니다.


'아, 맛있다!'


그 순간 놀라게 된 차맛. 어쩐 일이람, 이런 맛이 날 차가 아닌데, 하고 눈이 동그래져서 일단 저는 한 잔을 다 마셨습니다. 이럴 수가. 오늘은 박차*를 두 종류 마시기로 했기 때문에 완을 헹구어 다시 닦고, 두 번째 잔을 탔습니다.


한 자리에서 두 번째 잔을 바로 만들 때는 또 조금 다릅니다. 완은 방금 더운물을 담아서 덥혀진 상태고 물은 포트 안에서 조금 식었기 때문에 숙우로 옮겨담을 필요가 없지요. 안을 닦기만 하고 차를 덜어, 이번에는 포트에서 바로 물을 붓고 차를 갭니다. 매화문이 그려진 이 완은 기벽이 꺾이는 부분을 슬쩍 넘도록 물을 부어 주면 양이 알맞습니다. 삭삭삭 두 번째 잔을 마셔 보면, 이것도 처음 탄 잔만큼이나 맛이 좋아서 저는 골똘해졌습니다. 왜 이렇게 맛있지.


차선을 저을 때의 부드러운 감각. 그 부드러운 감각이 고스란히 담긴 것처럼 쓴맛은 사라지고 질감은 온화하게 부서지듯 혀에 감겨, 얼른 다음 모금을 마시고 싶은 차였습니다. 하도 맛있어서 그만 같이 먹으려고 꺼내 놓은 과자도 반밖에 먹지 못해서, 마신 다음 친구들에게 '나 오늘 차 정말 맛있어.' 하고 호들갑을 떨 때 달달한 입을 견디며 집어먹게 되었지요.


정말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돌아보면 참 별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차를 마실 생각밖에 못 하고 차를 탔지요. 바로 그게 차가 잘 된 비결이라는 것은 당장은 깨닫지 못하고, 하루가 지나 오늘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실감합니다. 



어제 차를 만드는 제 머릿속에는 차를 만들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겁니다. 차를 '잘' 만든다는 생각도 아니고, 차를 만든다는 생각. 


다른 것은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오직 차를 만들어야 하니까, 한 잔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노력들, 자리를 펼치고, 물을 가져오고, 붓고, 식히고, 닦고 타고 그 모든 동작을 서두르는 것도 잊어버리고 불안해하는 것도 없이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차를 만들기 위해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아하게 하거나 잘 해내겠다는 각오도 없이 오직 차 자체에만 집중해서 손을 살살 저으려고 마음을 쓰는 순간 차는 얼마나 맛있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그런 집중의 순간을, 차는 '맛있다' 는 확실한 감각으로 이렇게나 되돌려주는 것일까요. 


맛있게 된 차를 머금는 순간 저는 표정이 풀리고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고, 아, 맛있다. 라거나, 차가 너무 맛있어, 행복해. 라고 소리내서 중얼거리게 됩니다. 차를 만든 것은 나인데도 차가 맛있어서 어딘가에 잘 먹었다고, 차를 맛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은 기분입니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주말에 사서 꽂아 놓은 새빨간 라넌큘러스도 아름답고, 후 하고 숨을 한 번 내쉬고 차실 겸 거실을 둘러보면 이 공간의 편안함과 따스함이 여실히 느껴집니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포트에 물을 올리고 채 30분이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마법처럼 하루의 피로를 달래고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한 잔이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 요즘, '퇴근 후 말차 한 잔 쭉' 들이키는 이런 일 이상으로 빠르고 확고한 만족감을 주는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그 날 찻자리를 정리하고 잘 준비도 마쳐, 따뜻한 물 한 주전자를 쟁반에 받쳐 들고 침대 앞으로 와 보니 잘 시간보다도 아직 조금 더 전이어서 느긋하게 쉬는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직장인들이 늦게 자고 피곤해하는 이유가 퇴근 후 자기 시간이 없는 듯한 기분에 억울해서라고 하는데, 한 시간이 좀 못 되는 말차 한 잔으로 그 날의 보람을 누릴 수 있었다면 세상에 이런 좋은 취미가 또 없네요.


'퇴근 후 말차 한 잔' 이 이런 마법 같은 변화를 일으켜 준 데에는 정해진 형식의 힘이 큽니다. 차를 마셔야겠다, 마셔야겠으니 이런 일들을 해야지, 하고 정해져 있는 것들을, 차를 마셔야겠으니까 다르게 할 수 있는 바 없이 공을 들여 착착 수행하는 절차. '차를 만들려면 해야 한다' 고 이미 정해져 있는 그것들을 따를 때 마음은 빠르게 생각 없어지고 빠르게 고요해져, 차를 만들겠다는 생각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몰입으로 선뜻 이끌어 줍니다.


만일 정해진 형식이 없었다면, 그냥 있는 대로 만든다면, 다른 야식을 만드는 데 30분을 쓴다면 이렇게나 빠르게 고요한 마음이 되고 맛있는 차를 만들고, 한 순간 비웠다가 한 순간 모든 것이 충족되는 기분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틀을 따라 나가는 자유로운 마음. 착실한 정도(正道)가 주는 누구보다 확실한 기쁨. 


문득 리큐칠칙**을 떠올리자면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는 차를 마실 마음으로 타고, 손님은 손님을 대접할 마음으로 맞으면 됩니다. 아마도 일곱 가지나 꼽은 항목들은 충분히 쉽게 풀어서 한 설명이었을 거예요.


 



*박차(薄茶) 

: 뽀얗게 거품을 내어 연하게 타는 말차.


**리큐칠칙(利休七則)

: 센 리큐가 다도의 정신에 대해 물은 제자에게 한 답변으로, 일본 다도의 기본 정신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차는 마시기 좋게,
숯은 물이 잘 끓도록,
꽃은 들에 있는 것처럼,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시간은 조금 일찍 서두르며,
맑은 날에도 우산을 준비하고,
손님에게 마음을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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