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를 위한 3분

모래시계는 인류 기술의 최첨단입니다

by 혜하




삶의 질을 올려 주는, 잘 샀다 싶은 물건들이 있습니다. 최근 제가 가장 만족을 느끼는 세 가지를 말하자면 블루투스 키보드, 음악 감상 전용 스피커, 그리고 모래시계입니다.


블루투스 키보드는 언제 어디서나 글을 쓸 수 있게 해 줍니다. 핸드폰 자판으로도 줄글을 못 쓰지 않는 저였지만, 찻상이든 거실이든 마음에 드는 곳에서 차분한 긴 글을, 열 손가락의 자유로운 타자로 써 내려가자니 기분이 좋기는 당연하고 문장도 훨씬 풍부해지는 듯하더라고요.


스피커는 음악 듣기를 좋아하는 제게 사실상 필수 가전이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대개 이어폰과 핸드폰 내장 스피커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으니, 저도 그럴 줄로만 알고 몇 년이나 미루다가 구매를 했지요.


저는 음역대나 음질, 소리의 풍부함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어서, 스피커를 산 첫 날부터 너무나 기뻐서 방의 여기에 놓아 보았다가 저기에 놓아 보았다가, 테스트하고 싶은 음악들을 죄다 틀며 이 사랑스러운 스피커가 제공해 주는 부드럽고 탄탄한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면서 가장 잘 울리는 위치를 찾으며 한 시간을 훌쩍 넘게 보냈습니다.



좋은 스피커는 현대 기술의 멋진 결정체입니다. 원래 소리는 소리가 나는 곳에서밖에 들을 수 없었는데 현대 음향 기술은 소리를 녹음하고 또 재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본래 끊김 없이 모든 주파수 음역대를 차지하고 있는 소리를 디지털 파일로 저장하기 위해 조각내고, 들었을 때 눈치채기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 생략해서 기록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한 소리는 또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스피커로 재생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스피커는 놀랍습니다. 무슨 용을 써도 피아노로 바이올린 소리를 낼 수는 없고 큰북으로 심벌즈 소리도 낼 수 없는데 스피커는 그 작은 기계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세상 모든 악기와 모든 목소리를, 녹음된 파일만 있다면 소리로 만들어 내니까요.


핸드폰 액정에 글자가 나타나게 하는 기술이며 무선 통신은 또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생각을 하면 지금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블루투스 키보드도 그야말로 기술의 첨단입니다. 이렇듯 유용한 현대 기술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입니다.


그리고 모래시계도요.






모래시계는 블루투스 키보드와 음악 전용 스피커보다도 제가 가장 최근에 구매한 것으로, 스테인리스 스틸 프레임에 유리 몸체가 고정되어 있고 책상에 엎어 놓을 수 있는 양쪽 끝판에는 미끄럼 방지 고무 스폰지가 붙어 있습니다. 유리 몸 안에는 하얀 모래가 들어 있어서, 시계를 들어서 엎기만 하면 3분을 잴 수 있지요.


이 모래시계는 정말 간편해서 차를 우릴 때 3분을 재려면 그저 놓여 있던 곳에서 들어서 거꾸로 엎어 두기만 하면 됩니다. 모래가 다 떨어지면 차가 다 된 것이니까 차를 마실 수 있습니다. 충전을 할 필요도 없고 고장도 나지 않으며 깨뜨리지만 않는다면 거의 영구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알람 해제 버튼도 시간 설정도 필요없이, 사용에 불필요한 동작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오직 사용자의 편의만을 극단적으로 고려한 인류의 첨단 기술이지요. 저는 그 전까지 차 우리는 시간을 재기 위해 핸드폰 타이머를 쓰고 있었는데, 이 모래시계를 티 타임에 들이고는 그야말로 블루투스 키보드와 음악 전용 스피커 구매에 맞먹는 쾌적함과 편리함, 사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모래시계. 블루투스와 디지털 음향 기술에 비하면 수천 년 전에 이미 개발되었던, 시계 중에서도 가장 아날로그 방식. 이 모래시계는 왜 제게 현대 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만큼의 기쁨을 주었을까요?


그 비밀은 제가 차 우리는 데 모래시계를 사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동양 차, 서양 차를 막론하고 차를 우리는 데는 각기 다른 절차가 있습니다. 중국식으로 차를 우리자면 먼저 차호(찻주전자)나 개완(차를 우리는 데 사용되는 뚜껑 있는 잔 모양 도구)을 준비해야 하고, 물을 식히고 또 우린 차를 담을 숙우, 덥힌 찻물을 버릴 퇴수기나 차판, 찻잔, 물을 닦을 차 수건 등이 필요합니다.


이 도구들을 손에 잘 닿고 사용하며 움직이기에 적당한 위치에 놓고, 먼저 더운물을 부어 모든 다구를 예열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첫 차에 닿는 물은 가볍게 씻어 버리고 다구들에 향을 지나가게 한 다음 온도가 맞는 물로 차를 우려야겠지요.



서양 차는 동양식에 비하면 비교적 간단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여기서도 찻주전자와 찻잔이 필요하고, 저는 서양식으로 할 때 차 양을 정확히 잴 정밀 전자 저울과 찻잎 거름망, 시간을 잴 타이머(전자식이든 모래시계든), 찻잎을 뜰 티 캐디 스푼, 차를 우리는 동안 찻주전자 뚜껑을 놓아 둘 작은 그릇과 찻주전자를 감싸는 티 코지를 준비합니다. 새로 차 봉투를 뜯어야 한다면 거기 쓸 전용 차 가위도 있지요. 서양 차는 찻주전자에 더운물을 부어서 뚜껑을 잠시 닫아 안에 열기가 고루 퍼지게 했다가 물을 잔으로 따라 옮겨 잔도 예열하고, 그 다음 거름망에 담은 차를 주전자 안으로 넣어서 물을 붓습니다. 우리는 시간은 대개 3분 전후인데, 2분 30초라면 모래시계를 엎은 다음에 거름망을 주전자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찻잎을 조금 일찍 꺼낼 준비를 하고, 3분 30초 우려야 하는 차라면 물까지 다 붓고 시계를 엎은 다음 모래가 다 떨어지면 느긋이 찻잎을 꺼냅니다. 이러면 거의 오차가 없이 맞습니다.


의식에 가깝게 절차가 많은 차 만들기는 일상의 것이 아니기에 조금 거추장스럽고, 조금 소꿉놀이 같고, 조금 특별하고 꽤나 즐겁습니다. 차 우리는 시간 3분간은 그냥 기다릴 수도 있지만 보통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차 수건에 티 캐디 스푼을 닦고, 제자리로 되돌리고, 저울도 덮개를 닫고, 차 봉투를 도로 넣어 두고, 물을 흘렸다면 찻상도 한 번 닦고, 하다가 시계를 슬쩍 보면 어느새 차가 다 될 때가 가까워 있거든요. 동작들은 부드럽게 하나로 이어지고 모든 것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따뜻하고 향기 나는 차가 꼭 그림처럼 눈앞에 한 주전자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차를 잔에 처음 따를 때 색이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이런 특별한 차라서, 찻주전자와 차 도구들은 다룰 때도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찻잔들은 다른 설거지와 함께 씻지 않고, 설거지통에 넣지도 않으며 가급적 세제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른 그릇들은 설거지통에 쌓여 있더라도 찻잔은 바로바로 씻고, 물로 잘 헹구어서 차 설거지 전용 수건으로 뽀득뽀득 닦아 도로 다구장에 넣습니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몇몇 다구들은 세제를 흡수한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반짝반짝 광택이 실은 다른 식기와 다를 것이 없는 찻잔들은, 사실 특별하게 다루는 데서 특별함이 생겨납니다. 저는 차의 특별함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차에 관한 물건들을 더 아끼고 있습니다.



여유로운 주말이라면 몰라도 몸이 지친 평일 저녁이라거나 하는 때에는 차의 특별함을 챙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구를 늘어놓고 하나씩 닦고 하는 일이 다 뭐고, 그냥 얼른 좋아하는 향기로운 차를 한 모금 목으로 넘기고 싶을 때도 많지요. 찻잔 설거지도 귀찮을 때가 있고 대충 놔뒀다가 나중에 씻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요. 따로 닦아야 하고 설거지통에도 못 넣으니까 부담이 되는 앤틱 주전자(차 전용) 대신 그냥 물 주전자에, 따로 주전자 받침도 꺼내지 않고 그럭저럭 저울 없이 감으로 차를 담는 날에는, 타이머를 맞추어도 찻잎을 꺼내기를 잊어버리는 사고를 친다거나 차 맛을 느끼려고 해도 마음이 심란해 즐겁지 않은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채 차를 소홀히 대하니까 차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사라진 것입니다.


무언가를 특별하게 대하려고 하면 특별히, 다른 데서는 들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이고 신경을 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애착과 마음이 담깁니다. 애착이 있는 것이 나에게 좋은 결과를 돌려줄 때 우리는 기뻐지고, 관심 없는 대상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뛰어나고 아름다워도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올림픽 경기를 본다고 해도 응원하는 선수가 있어야만 흥미진진한 것을 떠올려 보세요.


차의 모래시계는 차를 위한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 전용 모래시계는 차를 마시고 싶은 사람에게, 그 어떤 만능 컴퓨터보다도 순수하고 중요한 기쁨을 전달합니다.



차 모래시계는 3분만 잴 수 있고 3분 이외에는 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차를 우리는 3분 동안, 나에게는 차가 우러나는 3분 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차가 우러나는 3분간 3분짜리 운동을 한다거나, 업무 메시지에 답장하거나, 전화를 받으러 나간다면 차의 시간은 그렇게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한 가지에 집중하고 그것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순수한 시간이 이제는 우리에게 얼마나 적어졌던가요. 이 시대 핸드폰은 생활의 편리를 위한 필수품이 되었고 이 작은 컴퓨터는 검색도 업무도 연락도, 그리고 물론 시간 재기도 척척 해내지만, 차 우리는 3분만을 위한 모래시계는 핸드폰 타이머가 주지 못하는 고요한 3분의 기쁨을 줍니다.


삶의 어느 한 순간에는, 오직 그것만을 위한 시간.


핸드폰과는 다른, 손 안에 들어오는 이 작은 물건이 있어서 저는 조금 더 특별한 티 타임을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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