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짐을 짊어지고 다닌 장돌뱅이

누구에게나 영혼은 필요하다

by 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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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차 마시기에 그야말로 빠진 때는 한창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기숙사는 2인 1실이고 학기마다 방을 옮겨야 해서 일 년에 짐을 싸고 풀고 하는 일이 최소 네 번이었는데, 그때마다 늘어나는 짐에 이사를 도와 주시던 어머니가 말씀하셨죠. 도대체 기숙사에 뭘 이렇게 많이 짊어지고 다니는 거냐!

보통은 커다란 끌차로 한두 번 옮기면 끝날 짐이, 저는 꼭대기까지 차곡차곡 박스를 쌓아서 세 번, 네 번……. 짐이 많다는 데는 저도 동의했기 때문에 옷을 줄이고, 책을 줄이고,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가져가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찻짐은 점점 늘어나서, 앤틱 서양 찻잔은 8조, 동양 찻잔도 6점, 주전자가 3점, 개완 2점, 그 외에도 물그릇이며 잔 받침 등이 늘어나 미니 차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물건이 이렇게 많은데 차는 또 얼마나 많았겠어요? 약 2년만에 저는 이동 찻집을 가진 대학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짐을 짊어지고 다니던 시절 제 기숙사 창문


그렇게 기숙사를 전전하다(?), 몇 년만에 처음으로 큰 집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 바리바리 싸들고 온 저의 차 짐을 풀어 보니 커다란 아파트 거실과 부엌 진열장들에 가득 차더군요. 기숙사 방에서는 박스 위에 박스를 쌓고, 최대한 압축해서 구겨넣고 하던 것들을 제대로 분류해서 늘어놓자 거실 하나는 차와 차에 관련된 물건들로 채울 수 있을 만큼이 되었던 겁니다.


집에 처음 이사를 해서 들어오면 마음이 들쩍지근합니다. 적응도 되지 않고 왠지 휑한 느낌입니다. 청소할 것도 남았고 주변도 낯섭니다. 부엌 정리를 혼자 하면서 이틀이 걸렸는데, 이렇게 박스에 구겨넣었던 짐을 집 가득 펼쳐 놓고 나니 묘하게 안정감이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느꼈습니다. 아, 차는 나의 취미뿐만 아니라 영혼의 일부이기도 했구나. 차는 나의 즐거움이기도 했지만 마음을 지키려는 노력이기도 했구나. 하고요.



익숙한 곳을 떠나 좁은 방 한 칸에서 지내면서는 마음이 외롭기 쉽습니다. 공허하달까, 정을 붙이지 못한달까, 필요한 것만 그럭저럭 갖추고 지내는 생활은 못 할 건 없지만 오래 하면 힘들어지지요.


방문을 열고 일곱 걸음을 걸으면 창문에 부딪히는 기숙사에서 지낼 때도, 잠깐 다른 지역에서 일하며 지내기 위해 고시원을 빌려서 잘 때도, 최소한 두 종류 이상의 찻잔을 가지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 어떤 작은 공간에서도 기분에 따라 잔을 고를 수 있고, 차를 골라서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저에게 영혼이 쉬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빛, 찻물 색깔, 유리잔이 탁자에 비치는 무늬…. 차를 마시면서는 온갖 작은 것들에 시선을 주게 됩니다.


찻상 위 작은 세상은 참 멋집니다. 주전자가 있을 자리에는 주전자가 놓여 있고, 주전자 아래에는 보온을 위해 깔아 놓는 티팟 코스터가 있습니다. 이 작은 천을 몇 장 가지면 그 날 마실 차에 따라 다른 무늬의 주전자 전용 방석을 놓아 줄 수가 있지요. 찻잔이 필요한 곳에 있고, 티 스푼을 걸쳐 놓는 받침대가 있고, 귀여운 깔개를 사서 이 모든 것들이 놓일 바탕을 마련할 수도 있어요. 따뜻한 물을 부으면 향기가 살아나고, 주전자에 손을 대고 있으면서 언제쯤 따라내야 가장 맛있을지를 가늠합니다. 하나, 둘…….


이 차는 90도 정도에 우리는 게 좋고 이 차는 85도까지 온도를 떨어뜨리라고 하던데 차 마시는 사람들은 집에 온도계를 가지고 있나요? 놀랍게도 익숙해진 찻잔과 차 도구는 이런 것들을 몸으로 가늠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유리 주전자는 옆면을 만질 수 있는 정도면 이런 온도여서 이 차에 어울렸지, 물을 얼마나 부으면 옮길 때 용량이 딱 맞았지, 같은 것들을 기억하고, 도를 오래 품고 있는 잔과 빨리 식는 잔을 기억합니다. 작은 물건 같지만 알수록 애착이 깃듭니다. 조그마한 테이블 위에 몇십 분이고 들여다봐도 재미있는 일들이 가득 생겨납니다. 이럴 때 차는 마실 것 이상으로 친구가 되고 티 테이블은 놀이터가 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나 영혼은 필요합니다. 작은 방 안에서도 모르는 사이 마음의 조각을 모으는 것처럼 작은 찻잔을 하나씩 모아 늘어놓았던 스물 세 살의 자신을 떠올리면서, 이 작은 취미의 기쁨을 또 다른 누군가가 발견하고 누린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차 한 잔의 여유' 가 소중한 이유는 고상한 문화를 즐긴다거나 하는 막연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이, 나의 인생에 차 한 잔을 들여 놓을 수 있는 영혼의 자리를 마련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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