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 8800번 버스잖아!
횡단보도를 막 건너 버스 정류장을 바라보고 걷던 저는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 번호판을 보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광역 버스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정류장에 가까워지면서 신경을 집중해 두리번거리면서 타야 하는 버스 번호를 찾는 건 본능입니다. 이번 차를 놓치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까요.
사실은 10분 정도 기다려서 다음 차가 올지도 모르지만 눈앞에서 버스를 보내고 '10분이나 더' 기다리고 있으면 속은 초조 발은 동동. 붐비는 출근 시간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퇴근 시간이면 황금 같은 퇴근 후 휴식이 줄어들었다는 마음에 괜히 분하겠지요. 그리고 지금은 출근 시간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전력질주! 기사님, 저 탑니다! 괜히 마음이 급해 마지막에는 올림픽 레이스 선수처럼 손을 들고 뛰었어요. 끝내주는 폼이었겠지만 별로 드문 광경도 아닐 겁니다.
주말에 뭐 하세요?
직장에서 좀 서먹한 사이에 무난하게 묻는 질문.
주말에 뭐 해?
직장에서 친한 사이에서도 가볍게 묻게 되는 질문.
아… 이 질문을 들으면 저는 대개 얼굴이 풀어져서 헤실헤실합니다. 여느 직장인들과 다르지 않은 통근을 하지만 주말에만은 다른 점이 있지요. 주말. 내가 하루를 온전히 쓸 수 있는 시간들.
그 시간에 저는 풍류를 즐기러 갑니다.
새로운 찻집에 혼자 가기로 했어요!
친구들하고, 이번에는 '등나무꽃' 테마로 야외 차 소풍을 갑니다.
1박 2일 차 여행을 떠나서, 보물로 지정된 고택에 묵으며 산수와 차와 향을 즐길 예정이에요.
남들이 들으면 그런 것도 해? 하고 묻는 소위 본격적인 취미. 차, 향, 골동품 소장, 계절 따라 여행 가서 다회 하기. 청년층도 보통 직장인도 좀처럼 하지 않을 것 같은 조선시대 한량 취미.
하지만 그것이 매번 제 주말 계획을 물을 때 절로 웃음이 떠오르게 하고, 집에 갖춰 놓은 물건들이 때로 퇴근 후 깊은 위안을 주고, 주변 사람들마저도 기쁘게 하는 것을 보면 이 취미를 가지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장 어젯밤에도 끝내주는 차를 마셔서 마음이 충족되어 있기 때문에 버스를 뛰어 타도 그렇게 급하지 않아요.
우리가 일상에서 쪼들리고 힘든 기분을 겪는 건 몸이 반, 마음이 반입니다. 물론 몸이 힘들어서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도 있고, 마음은 기본적으로 몸을 따라간다지요. 그럼에도 집에서 할 수 있는 취미, 내 마음을 힐링해줄 수 있는 취미 같은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힘든 일상에서도 한 조각 마음을 위로해줄 주말과 퇴근 후 잠깐을 다들 찾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저 또한 그런 출퇴근과 때로 야근과, 보고서 작성에 스트레스를 겪지만 언제나 이 풍류, 바쁜 일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한량의 마음은 저를 위로할 뿐 아니라 새롭게 충전된 마음으로 한 주의 시작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스트레스 관리 어떻게 하시나요?
하고, 면접 때 들었습니다. 저는 멀끔하게 '저는 차를 마셔요.' 라고 대답했고, 그 이유를 설명하느라 위에서 말한 내용과 앞으로 이야기할 내용들을 설파했고, 그러다 보니 그만 면접관 분들께서 차를 추천해 달라고 하셨고 저는 진짜로 차를 추천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무리된 적이 있었어요.
차를 마시면 몸에 좋아진다는 이야기는 안 하겠지만 차를 마시면 마음은 분명 넉넉해집니다. 면접장을 훈훈하게 만들고, 버스를 향해 달리면서도 어쩐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일상과 주말의 특별한 마법.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