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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Jun 06. 2021

억새꽃은 달빛에 흔들리고: 무사시노 츠키카게

도쿄 향아당


도쿄 향아당(香雅堂).


교토의 오래된 향 가게, 야마다마츠 향목점(山田松香木店) 에서 독립한 차남이 1983년 개점한 가게라고 합니다. 역사의 향기 가득교토에서 현대의 도쿄로 그 자리를 옮기며, 전통과 혁신이 함께하는 도시에서 일본의 향을 담아내겠다는 모토로 근 30여 년간 꾸려 나가고 있다고 하는데요,


'무사시노' 시리즈도 그런 가게의 방향을 잘 담아내고 있는 시리즈인 듯합니다.


무사시노(武藏野, むさしの)란 도쿄 일대 간토 평야의 넓은 들판을 가리키는 일종의 지명으로, 현대에는 도쿄 일대 자체를 예스럽게 일컫는 느낌입니다. 과거 그 평야 자리에 있었던 무사시 국(武藏国)에서 따온 이름이라 하니 그 자체로 과거의 시간을 불러와, 현재에 잇는 듯한 이름이네요.



무사시노 츠키카게(むさしの月かげ).

무사시노의 달빛, 무사시노의 달 그림자라는 이름인데요,


상자를 열어 보면 먼저 이 '무사시노' 시리즈에 대한 설명지가 있습니다.


도쿄국립신미술관과 콜라보하여 과거부터 현대의 도쿄를 이미지하는 시리즈로 특별히 기획되어서, 시간이 교차하는 컨셉에 맞게 전통 향료와 현대 향료를 배합해 총 네 가지의 '무사시노' 시리즈 향이 만들어졌습니다.


또, 각각의 향은 무사시노를 읊은 와카(和歌; 일본 전통 시가 형식 가운데 하나)에서 모티프를 따와 조향했는데, 무사시노 츠키카게(むさしの月かげ)는 헤이안-가마쿠라 시대 시인이자 대신인 쿠조 요시츠네(九条良経)가 읊은 구절로,



발 닫는 대로
걷다 보면 무사시노는
이토록 커다란
하늘 밑 들판에서
떠오르는 달 그림자
 
ゆくすゑはそらもひとつの
むさし野にくさのはらより
いつる月かけ



생각에 잠겨 무사시노의 들판을 걷다 보면, 문득 하늘은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처럼 이어진 듯 주변은 광막하고, 풀이 가득한 들판으로 떠오르는 둥근 달. 그 달빛을 올려다보는 시인의 그림자를 상상하게 하는 한 수입니다.



무사시노 츠키카게의 주향은 백단과 자스민인데요, 그야말로 고독하고 아름다운 느낌이라고 하겠습니다. 백단에는 달콤한 향도 청량한 향도 같이 있는데 달콤함보다는 자스민과 만나 어쩐지, 제게는 드넓은 들판에 가득한 흰 억새꽃이 달빛 아래 스치며 흔들리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향을 감상하는 일을 두고 '문향(聞香)' 이라고 합니다. 향을 맡으려고 하거나 하나하나 나서서 뜯어보기보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들려오는 소리처럼, 어쩔 수 없이 듣게(聞) 되는 소리처럼 문득 느끼게 되는 향기. 그래서 향을 '듣는다' 라고도 할 수가 있겠는데요,


가만히 듣다 보면, 이 달빛은 달콤하고 따스한 것도 같습니다.


둥근 달은 환하고, 쿠조 요시츠네가 그 구절을 읊었던 예전에도, 바로 지금도 그 들판 위에서 모든 풀들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일까요.


시간을 따라와 과거와 지금을 비추는 달빛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 매거진의 모든 리뷰는 주관적 감상이며, 가게 연혁 등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 이상 제가 즐기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옮깁니다. 따라서 현재 시점과 다르거나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가 있을 시 알려 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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