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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Jun 03. 2021

냇물은 복사꽃 향 담고 흘러오네: 혜원갱 철라한

일운차당

일운차당의 두 번째 리뷰입니다.


1. 무수하게 핀 하얀 달맞이꽃: 전통대우령 극품

2. 냇물은 복사꽃 향 담고 흘러오네: 혜원갱 철라한




정암 혜원갱 내귀동 노총 철라한 2016년.


이번에도  이름이 깁니다. 웬만한 와인 네이밍에 필적하는데요!


풀어 보자면 정암 혜원갱 내귀동은 지명, 노총은 차나무가 오래되었다는 뜻, 그리고 철라한은 차의 품종입니다. 지명이 왜 이렇게 긴가 하면, 이 차는 중국 복건성 무이산(武夷山)에서 나는 암차인데요. 산 전체가 바위산으로 된 무이산에서 나는 차들은 산골짜기의 안개와 그늘 속에서 바위에 뿌리를 내리며 자라나기에 그곳만의 독특한 풍미를 띠게 되어, '이 차는 무이산 차다!' 하는 것만으로 무척 인기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진 : 玉山登山社 黃經理


엄청난 바위산이고 엄청난 안개지요! 산 안에서도 지역마다 환경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면 차도 다르게 자라나기 때문에 무이암차라고 불리는 무이산 차는 이렇게 지역명을 가지고 (정암 혜원갱 내귀동) 차를 구분하게 됩니다.


혜원갱, 혜원암이라 불리는 지역은 무이산에서 예로부터 차를 재배했던 기암절벽인 정암(正巖) 지대라고 해요. 이 지역에서 자란, 2016년산 철라한 되겠습니다.



찻잎을 잘 말리고 가공하는 과정에서는 열과 불을 사용합니다. 이 과정을 홍배라고 하고, 당연히 잎에 열기를 쐬면 그 열기가 흔적을 남기게 되겠지요. 일반적으로 숙성시켜서 먹을 수 있는 차는 해가 갈수록 불순물이 빠지고, 이런 홍배로 인한 화기(火氣)도 빠지고, 맛이 순수해진다고 합니다. 이 철라한은 2016년에 만들어졌으니 만 4년이 지나, 이처럼 다소 숙성된 차 느낌을 띠고 있겠네요.


무이암차의 4대 명총이라고 불리는 네 품종들 중 하나인 철라한은 묵직하고 확연합니다. 4년을 묵어 첫인상은 마치 잠들어 있는 듯 고소한 홍배 향인데, 한숨 더 쉬고 깊이 들이마시면, 달아오른 무쇠 솥의 뚜껑을 열듯, 그리고 그 안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듯, 이 차의 진면모가 나타납니다.



아득한 꽃향이 멀리서 깨어나 한달음에 천리를 달려 여기 도착했습니다. 마치 복사꽃 향을 담은 도원경의 냇물이라 할까요. 그 냇물에 부드럽게 흰 구름이 가라앉아 비치는 듯하고, 질감은 마치 깃털로 혀를 쓸어내리는 것처럼 부드럽습니다.


드높은 꽃 향기는 암골화향(岩骨花香)이라고 하는 무이암차 특유의 꽃 향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이토록 부드러운데, 이토록 단단하게 버티고 선 암운(岩韻; 이 또한 무이암차 특유의 풍미를 가리킵니다.)이 믿어지지 않네요. 두툼하고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차를 넘기고 나서의 후운은 과일 껍질을 씹은 것 같이 쫀득하고 쌉쌀합니다. 잔 바닥에 남은 향기를 맡아 보니 처음과 똑같습니다. 보통은 잔 바닥에 남은 향이 찻물에서 나는 것보다 조금 더 달콤하게 여겨지곤 하는데 이번 철라한은 그렇지가 않네요. 처음에 이 풍경을 깨워낸 무쇠 솥뚜껑을 도로 덮어, 냇물 흐르는 도원향과 깔끔히도 이별한 것만 같습니다.




* 매거진의 모든 리뷰는 주관적 감상이며, 가게 연혁 등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 이상 제가 즐기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옮깁니다. 따라서 현재 시점과 다르거나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가 있을 시 알려 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 직접 찍은 사진 외 인용되는 사진은 브랜드 공식 페이지에 게재되어 있거나,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C) 라이선스에 해당하는 저작물입니다.


* 오늘의 사진 : 백이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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