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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May 23. 2020

삶으로 증명하기

그 사람 되게 멋있지 않아?


제 주변 사람들은 차에 호의적인 편입니다.


마셔 본  티백밖에 없더라잎차를 주전자에 우리기를 낯설게 여기지 않지요. 또, 차를 마시면 좋다고도 생각하고 기회가 되면 찻집에도 가 보고 싶어합니다.


왜일까요? 제가 옆에서 5년째 줄곧 마셔 댔기 때문입니다. 찻집 간 이야기를 하고, 차 우리는 사진을 SNS에 올리고, 약속 찻집에서 잡기도 하고, 집에 오면 차를 대접하니, 본인이 마시지 않아도 옆에서 그걸 무척 신나게 누리는 사람을 본 것이지요.


최소한 낯설게 하지 않는 첫 번째.


무언가의 좋음을 설파하려면 근처에 그걸 하는 사람이 있는 게 최고입니다. 제 친구 몇 년째 스트라빈스키며 무소르그스키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을 좋아하는데, 유명한 클래식 음악과 좀 다른 걸 들어 보고 싶어진 시점 저는 그 친구가 떠올라 그걸 틀었습니다.


취미나 취향은 주변에 뭔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따라갈 확률이 꽤 높습니다. 기능 따져서 구매하는 가전 제품과도 다르고, 가전도 '내가 쓰고 있는데 좋다' 라고 친구가 추천하면 그 모델을  가능성이 높은데, 즐거움이 기준인 취미는 어떻겠어요?


옆에 차를 마시는 사람이 있을 때 차가 좋게 보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노출 효과라거나 하는 심리학 이론까지 끌고 올 필요도 없이, 그 사람이 차를 마시면서 참 잘 지내는 것을 보니까 차에 좋은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우울할 때 차를 마시고, 조금 힘들 때 차를 마십니다. 기분이 진정이 되지 않을 때 차를 마시고, 밤에 혼자 책을 보면서 차를 마시거나, 날씨가 좋을 때 찻집에 나들이를 가면 좋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창 밖으로 비에 젖은 풍경을 보면서 그늘이 진 집안 분위기와 같이, 그 날에 어울리는 차를 우려 마시면서 떨어지는 빗줄기, 빗소리를 듣습니다.


가만히, 찻물에 떨어지는 볕, 잔에 진 그림자가 일렁이는 모습, 차의 향기, 온기, 지금 이 공간 안의 느낌… 같은 것들을 봅니다.


그런 식으로 구체적인 놀거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상이 꽤 좋아 보인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런 친구가 있는 것만으로 즐거울지도 몰라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저의 글을 읽는 여러분도 즐거우시겠지요.


차는 어떨 때 마실까요?


인생의 굴곡이나 감정의 굴곡에서 차를 마시던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중요한 면접 전날 밤이었습니다.


예상 질문을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컨디션 관리를 위해 일찍 잠들어도 모자랄 판에 날 밤에 느긋하게 차를 마신다?


차를 우릴 때는 잠시 차 만드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몇 달이나 열심히 준비한 질문 리스트는 잠시 잊고 개완을 잡고 물을 따르고 차가 향이 나고 그걸 마시고…. 


문득 마음이 차분해지고, 가슴이 무척 뛰지만 그 리듬이 느껴지고, '무시무시한 면접' 을 생각하고 있던 마음은 '면접을 앞둔 건 앞둔 거고 이렇게 찻잔을 손에 들고 있는 나' 로 돌아옵니다. 쿵쿵거리는 심장과 함께, 아마 면접 후에도 여전히 시간은 이어지고 나는 계속 살아가리라는 데 생각이 미칩니다.


열심히 준비했고, 내일은 일정대로 그걸 하겠지요. 마치 지금은 이렇게 충실하게 차를 우리듯이. 그렇게 삶의 중심이 내 마음 한가운데 위치한 기분이 되어, 정리하고 누우면 푹 잠듭니다.



또 이번에는 어떤 겨울, 혼자서 지내고 있는데 문득 친구며 주변 사람들이 너무 보고 싶고 외로워집니다. 2월, 눈구름이 드리운 오후였어요. 날은 어둑어둑하고 집안은 썰렁해서 무척 울고 싶지만 일단 차라도 좀 마실까 하고 차가운 부엌에서 물을 끓입니다. 차판을 식탁으로 옮겨오고 익숙한 도구들을 손에 쥐고 물을 따르고 옮기고 천천히 마시고 그냥 그렇게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한 시간쯤 먹습니다.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집에는 여전히 나밖에 없고 차만 마셨는데 왠지 기분이 나아집니다. 단지 차를 마셨는데 좀 괜찮아졌다고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도 말할 수 있지요.


제 친구들은 그 의미를 이해했을 겁니다. 사람은 다들 이렇게 외로운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도, 한 번씩은 문득 슬퍼졌던 기억을 가지고 있으실 테고요. 이런 마음의 위기에, 내가 곧장 해서 기분이 나아지는 일이 있다는 점이, 그것은 그냥 차 마시는 일일 뿐이고, 그런데 그것으로 정말 참 괜찮아진다는 점이, 무척 좋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 분명 당신도 '차는 좋은 것' 이라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기회가 있다면 차를 마셔 보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아니라면 그냥 이렇게 차를 마시면서 잘 지내는 이야기를 읽으시며 만족을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개 사건에 대해 판단하기도 하지만 오래 본 사람들이나, 한 사람 전체에 대해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이 언제 했던 일 하나보다 삶 전체를 보고 판단합니다. 저는 차를 마시면서 잘 지내는 것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차의 좋음을 보여주었지요. 그리고, 차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성취도, 꿈도, 인생의 중대한 기로도 결국 삶 안에 있습니다. 한 사건은 이 긴 시간 당신의 삶에 비하면 별 것 아니겠지요.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간다면 결국 삶이 증명할 것입니다. 그러니 실패나 실수라고 여겨지는 순간이 있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루하루 살아가면 생은 나를 증명합니다. 나는 사는 모든 날들로서 내가 된 것입니다.


면접 전날의 저는 차를 마시며 속으로 이 점을 느껴서 마음이 편해졌던 것이 아닐까요. 무척 중요하고 몇 달을 이것만을 위해 준비했지만, 그래서 어떻게 되든 노력한 그 시간은 어디로 가지 않고 물러서 보면 나의 인생에는 더 큰 궤적이 있어 나는 여전히 자신으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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