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쁜 의사가 이 글을 봤으면 좋겠다. 2
딱히 바쁠 것 없는 일상, 딸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야채와 과일을 꺼내어 씻는다. 딸기와 아보카도, 토마토를 자르고, 삶아 놓은 병아리 콩과 단호박, 브로콜리도 꺼낸다. 올리브유와 발사믹소스 꿀 한 스푼을 넣고는 후추를 갈아 넣어 드레싱을 만들고, 오븐에 통밀빵을 넣는다. 커피를 내리며 혼자서 하는 식사, 아무도 없는 집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지난 2월, 분가를 했다. 어느 뜨겁던 여름, 8개월 된 딸아이를 안고 어쩔 수없이 시작된 친정살이, 그리고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분가를 결심한 건, 작년 암수술 이후다. 친정살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좋은 점이 더 많았다. 6년 전 동생이 이혼하면서 우리 집은 3세대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모님 입장에서 보면 이혼한 딸 둘과 손주들 까지, 주말 드라마의 소재로 나올법한 집이었다. 외로울 틈 없이 집안은 늘 시끌벅적했고, 웃을 일이 더 많았다. 적당한 거리 두기가 가능한 넓은 복층구조의 집에서 각자의 공간을 나눠 서로에게 적응을 했다. 월세나 공과금 같은 공용 비용을 나눠서 부담하고 있었으니 현실적으로 서로에게 기댈 수 있었다.
수술 후,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마음은 점점 불편해졌다. 7년 동안 3번의 암수술과 방사선에 노출된 몸의 회복이 쉽지 않았다. 처음 겪는 통증과 무한히 지속될 것 같은 시간, 무기력과 우울감이 찾아들었다. 오래전부터 명상을 해 왔다. 나름 생각과 감정을 잘 다룬다고 자부했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몸이 건강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나는 환자였다. 누군가 나를 돌봐주길 바랐다. 건강한 식재료로 균형 잡힌 단백질이 풍부한 식사를 제공해 주고, 무리하지 않은 선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으면 했다. 엄마가 마음을 쓰긴 했지만, 나는 엄마가 해주는 음식들이 싫었다. 엄마가 해 주는 반찬은 정해져 있었다. 나뿐 아니라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음식은 음식을 만든 엄마와 아버지에게만 평생 질리지도 않은 음식 같았다.
회사에 다닐 때는 밖에서 먹는 시간이 많으니, 손에 물 묻히지 않아도 되고 건강해서 오히려 좋았다. 대부분의 끼니를 집에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 식탁에 앉으면 반찬투정을 하는 어린아이가 됐다. 엄마의 요리는 수십 년째, 조금도 발전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 만만한 계란말이조차 부침개를 만드는 엄마의 계란 부침개와 접시에 아무렇게 던져 놓은 듯 담긴 반찬들에게 화딱지가 났다.
" 아니 엄마, 계란말이를 어림 잡아 한 50년은 했을 거 아냐? 근데 어떻게 하나도 안 늘고 그대로야? 엄마도 노력 좀 해보지? 애들은 계란에 팽이버섯 넣는 거 싫어한다고 ㅠㅠ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ㅠㅠㅠ"
나는 식사 때마다 비슷한 핀잔을 늘어놓았다. 그런 내게 엄마는 웃으면서 답했다.
"그러게 말이다. 난 솜씨가 없네"
"어차피 입으로 들어갈 건데 뭐 어때?"
나는 내가 싫었다. 엄마의 최선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엄마는 나의 식사를 챙겨줄 의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기꺼이 마음 아파하며 노력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고 나면, 나는 오히려 더 큰 고통에 빠졌다. 직접 음식을 할라치면 예고 없는 통증에 짜증이 솟구쳤다. 하필 아이들이 방학이었고, 아이들 식사까지 챙기고 나면 서러운 피로감이 몰려왔다.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지난번 처방받은 진통제는 아무 효과가 없어서 정형외과에서 다른 진통제를 처방받았다. 검색해 보니 마약성 진통제였다. 어디든 떠날 생각이었다. 식사를 제공해 주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상관없었다. 병원만 빼고.
멀지 않은 곳에 힐링센터가 있었다. 채식위주의 식사를 하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었다. 다음날로 입소 예약을 했다. 캐리어를 꺼내 필요한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챙기면서 딸아이에게 양해를 구했다.
"하늘아, 미안해. 엄마가 건강해져서 돌아올게. 통증이 심하니까 하나하나 다 짜증이 나고, 할머니한테도 미안하고, 이런 모습 너한테도 보이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
겨울의 끝자락 추웠지만 자연에 있고 싶었다. 깨끗한 공기가 콧구멍에 머물며 콧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을 떠올렸다. 한 시간 반정도를 달려 도착한 곳은 보령이었다. 알고 보니 원장 선생님은 구독자 68만을 보유한 유튜버였다. 영상을 자주 보진 않았지만, 특정 영상을 일부러 찾아본 적 있었다. 힐링센터 표지판을 따라 차로 몇 분을 올라 도착한 곳은 산 아래, 언덕에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원장님과의 면담이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호남형 얼굴, 영상으로만 본 분을 직접 뵈는 기분이 어쩐지 설렜다. 나도 모르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친근함을 표현했다.
"영상이랑 좀 다르신 것 같은데요.^^"
"네. 그런가요."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짧게 답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유튜브 보셨으면, 혈액 관찰에 대해서도 보셨나요?"
"아뇨."
나도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혈침을 딸각거리며 내 손가락에서 혈액을 채취하여 엄지손톱 만한 글라스에 펴서 바른 다음, 현미경으로 가져갔다. 모니터에 채혈한 혈액의 상태가 나타났다. 상태가 매우 나쁘다고 했다. 깨끗하고 활성도가 좋은 혈액을 창에 띄워 보여주며 내 혈액과 비교해 주었다.
"이런 피로 살면, 암이 재발할 확률이 엄청 높아요."
그는 디톡스 프로그램을 권유했다. 아마 피검사가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원했던 것은
매 끼니 건강한 식사를 제공받으며 푹 쉬는 것이다. 하지만, 내 눈으로 혈액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프로그램이 적힌 종이를 들고 원장실을 나왔다. 직원이 시설을 안내하면서 방을 배정해 주었다.
6일 금식 -> 3일 보호식 -> 일반채식 -> 퇴실
식사 시간에 꿀물이 제공되고, 시간대 별로 족욕이나 찜질 같은 자연치료 프로그램이 있었다. 때에 맞춰 섭취할 미네랄 소금물과 프로폴리스, 식용활성숯 등이 지급되었다.
결국 나는 집을 떠나와서 쫄쫄 굶게 되었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대게 2-3일째가 힘들다고 하던데, 나는 첫날부터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체온을 측정하진 않았지만, 열이 나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신경통만으로도 벅찼는데 몸살이 난 것처럼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꿀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오직 꿀물을 먹기 위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롱패딩을 입고 목도리까지 두르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 이후, 나는 꿀물을 한잔을 먹기 위해서 온 하루를 살아냈다.
도망치듯 떠나왔지만, 이것은 선택이었다. 문만 열면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피톤치드를 즐길 수 있었고, 완수해야 할 것이 있어 방황할 필요가 없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눈빛의 사람들도 있었다.
이틀이 지나면서 나는 제법 가벼워졌다. 배는 여전히 고팠지만, 끼니때마다 마시는 꿀물은 정맥주사보다 더 효과적인 수액이었다. 원장님의 건강 강의가 있는 날엔 아침 일찍 일어나 강의실로 향했다. 자기장치료도 하고 찜질도 했다. 꽁꽁 싸매고 나가 숲길을 거닐며 피톤치드를 마셨다.
"혜진 님, 암에 걸리면 그다음부턴 나머지 삶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내려놓고 살아야 해요."
'내려놓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무겁기만 했던 내 삶의 숙제, 혹은 간절한 소망처럼 존재해 왔던 말이었다. 교회를 다닐 때도, 명상에 심취했을 때도, 원하는 일이 있을 때도 그랬다. 그러다가 삶의 무게가 너무도 크게 느껴져 더는 올려 둘 곳이 없을 때면, 번번이 내려놓음이 아닌 무너져 버렸고, 오히려 안도하곤 했다.
힐링방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건식 반신욕기에 앉아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 식당에서 뵐 때마다 환한 얼굴로 반가이 인사를 건네던 여자였다. 하얀 얼굴에 단발머리를 한 중년쯤 보이는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저는 일부 신경에 마비가 와서 아랫배 쪽부터 자궁까지는 통증을 못 느껴요. 사고가 크게 났고, 의료 사고도 있었어요."
그녀가 배꼽 주변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신경이 마비가 된 곳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통증이 사라진 적이 없다고 했다.
"통증이 있다는 것, 좋은 거예요. 몸한테 감사해야 해요. 제가 이쪽은 통증을 못 느끼니까 괜찮은 줄 알고 생활했다가는 한번 아프면 진짜 죽을 만큼 아파요."
그녀는 그녀의 병력에 대해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따뜻하고 정돈된 말투로 말했다.
통증이 있는 걸 감사하다고? 통증은 몸이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보내는 신호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통증이 있는 상태에서 감사한다는 게 쉬운 일일까? 하지만, 점점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통증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병원치료 대신 자연치료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과 장기 투숙 주택으로 이주를 했다고 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초기 유방암이 폐로 전이된 '말기 암환자'였다. 그녀가 암밍아웃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암환우라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할 만큼 그녀는 맑고 건강해 보였다. 자연치료를 선택한 용기 역시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이곳에 아픈 사람들이 많이 오잖아요. 가끔 사람들이 제 얼굴을 보고 어떻게 그렇게 평온할 수 있는지 물어봐요. 근데, 내가 얘기를 해도 사람들은 안 믿더라고요."
그녀의 앞에는 성경이 놓여 있었다. 내가 성경을 응시하자 그녀가 말했다.
"네, 신앙의 힘이에요. 저는 걱정 안 해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이깟 암이 뭐가 두렵겠어요. 저는 모든 시련이 믿음을 위한 성장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만약에 주님이 저를 데려가신다면 너무 아프지 않게,
외롭지 않게만 해달라고 기도해요."
나는 저절로 숙연해졌고, 원래도 아름다웠지만, 그녀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저 오후엔 여기 없어요. 알바 가요."
"우와, 여기에서 새로운 삶이 펼쳐진 거네요? 부럽네요. 먹고 살 거만 있음 여기서 살고 싶네요. 저도."
"혜진 씨도 오면 되죠. 먹고 살 거 없겠어요? 쉬운 건 아니죠."
저절로 내려놓음이 무엇인지 알아졌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어깨에 올려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집을 떠나와 보니, 내가 없어도 우리 집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던 회사도 이미 다른 사람들로 잘 굴러간 지 오래이지 않은가.
분가를 결심할 때, 죄책감이 들었다. 엄마가 서운해할 생각, 부모님의 시시콜콜한 말다툼의 중재자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멀쩡한 엄마가 있는 괜한 조카들 걱정까지,
그 많은 짐들은 모두 나의 오만과 거대한 자아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달아 간다.
이사하기 며칠 전, 엄마 품에 안겨 폭풍 같은 눈물을 흘렸다.
"흑흑흑 엄마, 미안해. 그동안 너무 미안했어. 고마워 엄마. 나 힘들 때 받아줘서 너무 고마워."
엄마가 등을 토닥였다.
"아니야. 괜찮아. 나가서 너만 잘 살면 돼. 엄마는 하루만 살잖아. 엄마는 네가 뭘 잘못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온 나라 벚꽃 송이들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봄의 축제가 화려해질수록 아쉬움은 커졌고 금방 꽃비가 내렸다. 그 시간은 내게도 다양한 모습으로 다녀갔다. 작년 봄의 나는 너무도 바빠서 봄이 오고 가는 소리에 둔감했다. 이제는 예민하게 봄을 느끼고 싶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자주 그녀를 생각했다. 만약에 뼈전이가 사실이라면, 그녀를 보러 가고 싶었다. 나도 자연치료를 선택할 수도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은 건 딸아이 때문이었다.
막상 결과를 받는 날이 되니 가슴이 떨렸다. 그 나쁜 의사는 내게 어떤 말을 할까? 이번에도 '얼굴에 난 점'
이야기를 하듯 그런 투로 말하면,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의사에게 할 말들을 떠올렸다.
주차장에서부터 평소보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어깨를 펴고 씩씩하게 걸었다.
간호사가 호명했다.
"장혜진 님"
진료실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의사가 소리친다.
"장혜진 님, 결과 정상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요!"
등 뒤에서 엄마의 환호성이 들렸다.
"근데, 저 앉지 말라는 건가요?"
아무튼 이상한 의사! 착석도 하지 않고 끝난 진료는 처음이었다. 진료실을 나와, 아니 들어가다 말고 나오니
엄마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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