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인생 망한 김에 좀 쉬어가겠습니다

by 혜현

내 인생이 망한 이유를 자꾸 곱씹어 보며 방에 처박혀 있는 생활이 오래되자 자꾸 나를 우울 속으로 집어넣고 안 좋은 생각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교수의 꼬장이 543827384번쯤 되던 어느 날, 자리에 잠시도 앉아있지 못하고 연구실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 길로 상담센터로 갔다. 교수에 대한 욕을 쏟아냈다. 그런데 아뿔싸. 심리상담선생님도 박사과정 중이시고 교수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상담 시간은 서로 자신의 교수가 얼마나 나쁜지에 대한 이야기로 변질됐고, 결국 마무리는 약자인 학생은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한다로 끝맺어졌다. 욕을 실컷 해서 속은 잠시 시원했지만,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았다.


이번 교수의 658382938째 갑질 사건 이후, 교수에게 난 더 이상 연구자의 길을 가지 않겠다는 메일을 보내고는 집에 잠적했다. 역시 답 메일은 없었다. 그리고 벌써 5개월이 흘렀다. 논문을 안 쓰고 교수를 안 보면 그래도 편안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더 복잡했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자괴감과 무력감. 내 인생이 망했다는 확신. 난 뒤쳐졌다는 불안감. 가슴이 항상 두근거렸고, 하루 종일 그 생각에 빠져 일상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날도 계속되었다. 다시 마음을 잡고 컴퓨터에 앉아 논문을 수정해보려 했지만, 논문을 보자마자 구역질이 나왔다. 몸은 쉬고 있었지만 마음은 매일 지옥 속을 살고 있었다.


이제 정말 할 수 없구나.


이불속에 지내길 몇 달, 일상을 다시 살아내야 했다. 대학원생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인생을 리셋하고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평소 즐겨 읽던 자기 계발서적을 몇 권 읽었다. 분명 예전에는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가슴이 뛰고 내 안에 불끈 솟아나는 힘이 느껴졌던 것 같은데,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책의 결론들이 거북스러웠다.


당신이나 포기하지 마세요. 난 그냥 인생 망한 김에 좀 쉬어야겠습니다.


매일 불안이 밀려오고 후회만 가득한 지난날이었지만, 그냥 다 놓고 쉬기로 했다. 다만 우울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첫 번째로 더 이상 주위사람들에게 하소연하지 않았다. 내 대학원 생활을 지켜봤던 가족들, 친구들은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여기까지 온 지 자세하게 알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아무리 하소연해 봤자 "그래도 조금만 참으면 졸업할 수 있지 않아? 너무 아깝잖아. 그렇게 고생했는데." 늘 이런 결론만 나게 마련이었다. 그런 과정들 속에서 내가 배운 건 내 감정 조절은 결국 셀프라는 것이다. 백날 주위사람들에게 교수 욕 해봤자 하루만 상쾌하고 다음날은 여전히 찝찝했다. 하소연하면서 쓰는 에너지가 날 더 지치고 힘들게 했다.


두 번째로 운동을 시작했다. 지난 10년의 대학원 생활로 남은 건 비만과 어린아이 보다 못한 기초체력뿐이었다. 굽은 허리와 거북이가 된 목은 덤이었다. 더 이상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거북이로 살 수 없었다. 돈을 끌어모아 PT를 등록했다. 그리고 시키는 대로 운동을 하고 식단을 했다. 살은 빠졌고 근육이 생겼다. 그래봤자 조금 더 매가리 있는 거북이가 됐을 뿐이지만 그래도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고 운동을 하면 잠도 잘 오고 시간도 잘 간다.


세 번째로 심리상담센터에 갔다. 무심코 지난 일기들을 보니 내 대학원생활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거지 같았고 최악이었다. "아니 이런 일도 있었다고? 근데 내가 계속 다녔다고?"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지금 내 머릿속엔 교수의 갑질만이 가득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할 슬픈 이야기들이 나를 괴롭혔다. 치유받아야 했다. 정신과에 갈까 생각도 했지만 우선 시원하게 털어내고 싶었다.


네 번째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한 가지 해보기로 했다. 워낙 일기를 쓰며 스트레스를 풀었던지라 그냥 계속 일기든 뭐든 생각정리 겸 적어보기로 했다.


다섯 번째로 갓생 따위는 없다. 인생 대차게 말아먹고 꼬인 나였기에 해야 할 일의 계획을 세우고 시간을 정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계획대로 됐다면 벌써 졸업했겠지. 자의에 의해 타의에 의해 늘 계획은 바뀌게 마련이고 시간은 미뤄지기 마련이다. 내 복잡한 인생에 계획대로 안 됐을 때 오는 상실감까지 더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슬렁슬렁하고 싶을 때 몸이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일 딱 한 가지만 하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늦어진 인생, 망한 인생 더 망할 건 뭐고 더 늦어질 건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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