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롭게 살아가는 삶
나는 중학생 때부터 성당에 가면 지혜를 주십사 하는 기도를 절대 빼놓지 않았다.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땐 지혜를 청하라는 엄마의 조언이 오래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조언은 간단했다. 하느님이 솔로몬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솔로몬은 부도 명예도 아닌 '지혜'를 청했다고, 그만큼 지혜는 삶에서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며 지혜가 있다면 원하는 것들은 아마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지혜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능력이자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마음의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능력, 중학생인 나에게는 내 인생을 멋진 곳으로 가져다 줄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황금 티켓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기도가 어느새 나에게 꽤 중요한 삶의 가치관이 되어 있었다. 언제나 지혜로운 사람이기를 바랐다.
판타지 같은 생각에서 시작했으면서도 오랜 시간 지혜를 주시길 청했던 이유는 살아갈수록 인생이 불확실함과 불투명함의 연속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선택에 실망하기도 하고 불확실하다고 생각했던 일에 의외의 선명한 답을 얻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지혜는 없을지라도 당장 내린 최선의 선택이 최악의 결과는 아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혜를 청하곤 했다.
이렇게 긴 시간 지혜를 청하고 집중했으니 나의 삶은 대단히 지혜로웠는가 생각해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참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너무 많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으며 뒤늦은 후회도 많이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당장은 최악 같은 선택도 알고 보면 올바른 선택이었길 바랐고 그동안 내가 내린 선택들이 그저 맞는 답으로 가는 과정이기를 긴 시간 바랄 뿐이었다.
지혜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말하라고 하면 10대에는 절대 틀린 선택을 하지 않아 (어떤 사람이 대단한 사람인진 모르겠지만) 대단한 사람이 되는 길로 인도하는 엄청난 능력이라고 대답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지혜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길의 O, X 답안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긴 시간 틀린 답을 하지 않기를 바라왔지만 지금의 내가 바라는 지혜는 "틀린 선택을 두려워하는 마음보다는 내가 한 선택들을 좋은 선택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에 가깝다. 지혜를 갖고 싶은 마음 보다 지혜로운 사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은 결국 내 삶을 내가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마음과 맞닿아 있다. 그 안에는 내 삶 전반에 걸친 모든 선택이 포함되어 있으며, 지혜롭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선택의 순간에 온 힘을 다해 고민하게 하고 나의 선택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큰 선택의 기로 앞에 서게 되었다. 어떤 선택을 할지, 그 선택이 최선이 될지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나의 선택을 믿고 다음 한걸음을 내딛을 을 수밖에 없다.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마음에 조금은 의지해가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