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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인 Aug 25. 2021

부유하듯 방황하는 청춘을 되돌아보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비슷한 관심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하루키의 글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슬프고 음울해 보여서 그랬는지, 정작 나는 하루키의 어떤 책도 읽은 일이 없다. 그러다 이번에 남편의 본가 책장에 있는 이 책을 발견하고 꺼내와 드디어 이 유명한 소설을 읽었다. 마치 오랜 숙제를 한 것처럼 시작한 책 읽기였지만 굉장한 몰입감에 이것이 하루키 책의 매력인가 싶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이 그리 좋지 않았다. 책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가 맞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의 내게는 별로라는 것. 지나간 10대와 20대 초반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까?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내 감정조차 어떻게 하지 못했던 그때, 온통 뿌옇게만 느껴지는 세상에 붕 떠있는 것 같았던 그 시절이라면 와타나베와 주변 인물들에 조금은 더 공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20대의 언젠가부터 더 이상 슬픈 이별 노래나 주인공이 비참한 생을 살아가는 문학 작품이 견디기 어려워졌다. 울적한 영화도 마찬가지로 싫다. 근원적 우울감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던 어린 날에는 그런 콘텐츠를 통해 감정을 더 증폭시키고, 이내 잔잔해지는 것을 즐기기도 했는데, 이젠 싫어진 지 오래다. 지금의 내 관심사는 오늘 해야 할 일, 그리고 가까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현실에 두 발을 딛고 내가 책임져야 할 관계와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지금의 내게 더 중요하다.


별로라고 써두긴 했지만, 적다 보니 <노르웨이의 숲>이 썩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멍하니 부유하던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여 생각할 계기를 주었으니 말이다. 잊고 살지만 내게도 감정을 헤엄치던 시기가 있었고, 재미없고 심심한 30대가 되었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좋다는 사실도 다시금 떠올려본다. 그럼에도 아주 여러 번, 와타나베가 시도 때도 없이 섹스를 하는 장면들은 소설을 풀어가는데 꼭 필요했을까 싶은 부정적 생각은 여전하다.


수미상관으로 구성되지 않은 소설이라, 마지막 장이 끝나고 나서 다시 책의 가장 처음 부분을 펼쳐보았다. 비행기 안에서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음악이 흘러나오자 나오코 생각에 슬퍼하는, 어른이  와타나베. 그도 지금쯤은 현실 속에 발을 디디며 살고 있지 않을까. 결코 잊을  없는 과거를 안고, 다만 죽어버린 사람들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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