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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인 Jan 21. 2022

태종 이방원 낙마 촬영을 나는 비난할 수 있을까

“말이 불쌍해” 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종 이방원’ 의 낙마신 촬영을 위해 말이 희생되었다. 워낙에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 목소리가 모여 앞으로 촬영장에서의 동물권에 많은 진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낙마촬영을 비난하는 피드 바로 뒤에, 치킨이나 스테이크를 먹은 사진이 나오는 것을 여러번 보며 기분이 이상했다. 넘어뜨려져 목이 꺾여 죽은 말과, 움직일 틈 없는 철장에서 살다 도살되는 닭과 소는 어떤 점에서 그 죽음의 무게가 다른 것일까 생각해본다.


이 문제에 있어서 나 역시 지독한 모순 덩어리다. 육류를 먹지 않은지는 좀 되었지만 아직 완전한 비건식을 하지는 않는다. 동물로부터 얻는 소재로 만드는 제품들의 소비를 완전히 끊지도 못했다. 그 모순이 너무 괴로워서, 누군가 나를 비건이라 지칭하면 너무 놀라 난 비건은 아니라며 (되지 못했다며) 꼭 정정을 한다.


이런 내가 낙마 사건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걸까?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비판하려면 완전무결해야한다는 논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너는 얼마나 흠 없이 잘났니” 라는 태도는 본래 의도를 훼손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모순을 떠안고 살 수 밖에 없으니까. “단 한명의 완벽한 비건보다 불완전한 10명의 비건이 낫다” 는 말도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이 “말이 불쌍하다” 에서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촬영장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동물권이 논의되었으면 좋겠다. 매일의 밥상에 오르는 동물들과, 우리의 입을거리 치장거리가 되는 동물들, 그리고 가족과 다름 없는 반려동물에 대해서도. 그리고 왜 동물권을 생각해야 하는지, 그것이 우리 인간과 어떻게 맞닿아있는지, 그 연결성이 더 이야기되었으면 좋겠다.


혹여나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대단히 의식있는 사람으로 오해받고 싶지 않아 망설였지만, 그 어떤 의도에 앞서 나의 모순을 줄이고 싶어서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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