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추얼 마이셀프

SNS에서의 자아는 진짜 내가 아닐까? 정말 그럴까?

by 혜인

운전해서 요가원에 가는 길,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네. 도대체 언제적 노래야. 이 곡이 질리는 날이 오긴 올까. 몇 년동안 들은 적이 없는데도 입술만은 가사를 잊지도 않는지 곧잘 따라 부른다. 노랫말에 빠져있던 생각은 이내 멜로디와 처음 마주한 시절을 향한다.


교실에서는 공부 잘하는 애, 다른말로 재미 없는 모범생이었지만 싸이월드에서만큼은 달랐다. 적지 않은 방문자수와 스크랩 수는 이를 증명하는 나의 자랑이었다. 있어보이는 문구와 미니멀한 감각으로 꾸민 대문,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선정한 배경음악은 필수였다. 오늘 차에서 들었던 바로 그 노래와 같은 곡을 도토리로 구매했다. 유행곡은 절대 안 된다. 가사도 철학적이어야하고, 웬만한 사람들은 ‘이런 노래가 있어?’하고 신비감을 느끼며 빠져들어야 했다.


2000년대 초반, 당시엔 진짜 친구가 아니더라도 ‘일촌’을 맺는 분위기였다.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은 같은 반 아이에게도 일촌 신청하기 버튼을 누르는 데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친해지고 싶은 애가 있으면 센스 있는 ‘일촌명’과 함께 신청을 보냈다. 그렇게 일촌이 된 친구들이 첫 ‘방명록’을 남기면 나는 그 애들에게 나라는 사람을 은밀한 척 대놓고 공유했다.


당시 최고 스펙이었던 130만 화소의 휴대폰 카메라로 하늘 사진만 찍어 올리던 게시판이 있었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제법 느낌 좋아보이는 문장을 만들어낼 줄 알았다. 언더그라운드 힙합 음악을 재생했고, 엄마, 아빠가 쓰던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현상해 올리기도 했다. 절반은 내 것이었고, 절반은 어른 흉내였던 나의 미니홈피에서 나는 나만의 감성을 알아보는 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나는 그런 의외성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내겐 이런 깊고 깊은 세계가 있어. 난 교실에서 보는 것보다 더 나아.


그렇게 감성을 공유하는 은밀한 1:1 관계들이 생겨나곤 했다. 불법 다운로드한 mp3파일을 주고받는 사이의 친구들이. 쿨한 성격과 빼어난 외모로 인기가 많은 아이들과는 달리, 그렇게라도 관심을 받고, 관계 맺고 싶었던 것 같다.




싸이월드의 시대가 저물고 페이스북,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이르기까지 늘 소셜미디어를 꾸준히 했다. 주된 소셜 미디어가 바뀌는 동안 나도 교복을 벗고, 대학을 다니다 직장인이 됐다.


학교에서는 조용한 범생이로도 괜찮았지만 사회는 달랐다. 협업이 기본인 직장에서는 일을 잘 하면서도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가 되어야 했다. 같은 아이디어라도 유쾌하고, 외향적이고, 스마트하게 발표해야 설득이 됐다. 실은 회사 일이 어떻게 되든 큰 관심이 없었지만 ‘씩씩한 신입사원’ ‘능력 있는 직장인’이 되려 애쓰느라 매일이 버거웠다.


반면 SNS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거기서 나는 여전히 나름의 감성과 확고한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의 한 가운데에서도 남다른 모습을 잘 포착하고 그것을 읽기 좋은 글과 보기 좋은 사진으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계정을 비공개로 감추는 동료들과 달리, 나는 SNS 계정을 은근히 드러내곤 했다. 회사에서 보여지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내 모습을 알려주고 싶었다. 매일 요가를 수련하고, 좋은 책을 읽고, 글도 쓰는 나머지 자아가 내게도 있다고.


“네 인스타그램을 알고 나서 네가 더 좋아졌어”

우연히 동료와 ‘인친’을 맺은 후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기쁜 마음과 동시에 안도했다.



언젠가 소셜 네트워킹에는 젬병인 선배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인스타 안귀찮아?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해? 난 진짜 못하겠던데.”


비꼬려는 의도가 없는 순수한 질문이었지만, 문득 부끄러워졌다. 현실에서보다 가상 공간에서의 내 모습을 더 괜찮게 느끼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실제 친구는 나보다 열 배쯤 많다는 사실이 의식되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실재하는 삶보다 인스타그램 속의 나를 더 좋아한다면 이건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진짜 내 모습은 뭘까? 나는 누구인 걸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프라인의 나는 진짜라고 단언할 수 있나. 회사에서는 사회적 자아를 연기하고,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특정 역할을 수행한다. 친구 모임만 해도 그렇다. 몇 살에 만났는지, 어떤 계기로 만난 그룹인지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은 꽤 다르기도 하다. 사람이란 원래 다양한 페르소나와 자아로 살아가는 게 아닌지.


SNS 속 모습도 결국 그 다양한 나 중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사는 곳, 직업, 나이 같은 물질적 배경에 얽매이지 않고 ‘감성’ 하나만으로도 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SNS가 더 진실한 공간이 될 수도 있다. 특히나 그 감성이 오글거린다는 이유로 일상적인 공간에서 쉽게 지지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더 그렇다. 비록 조금 꾸민 모습일지라도, 현실의 나와는 다소 동떨어져있더라도, 그게 큰 문제일까.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이 얼마나 사람을 취약하고 의존하게 하는지, 그리고 또 그것이 교묘하게 우리를 조종하는 방식에 대해서 모르지 않는다. 소셜 미디어로 인한 비교 소비의 조장과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많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나는 SNS공간이, 거기에서 보여주고 싶은 ‘버추얼 마이셀프’ 가 여전히 좋다.


이십 년간 소셜 네트워킹을 꾸준히 하면서, 글과 사진만으로도 통하는 인연을 만난 경험을 더러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십여년 전, 단순히 얼굴과 이름만 알던 페이스북 친구가 나의 글을 보고 호감을 느꼈다. 그는 연락처를 물어물어 내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우리는 5년의 연애 끝에 결혼 8년차 부부로 살고 있다.


소셜 미디어가, 버추얼 마이셀프가 없었더라면 우린 만나질 수 있었을까?




와사비라이팅클럽 6기를 통해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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