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나의 고유성이란

by 혜인



나의 고유성에 대해 정리하라는 숙제를 내주시면서,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이 과제를 굉장히 어려워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게도 어려운 주제다. 하라는 공부를 하고, 남들이 다 회사에 가니깐 직장인이 되고, 그렇게 떠밀려 살아왔다. 이상은 있었지만, 늘 어렴풋했기에 항상 현실과 타협했다. 그런 삶의 형태가 만족스러운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 원인이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아직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고, 어쩌면 진짜 나를 찾는 일은 평생에 걸친 여정이겠지만 그간 발견한 나의 고유성에 대해 적어본다. 언젠가 이 글을 다시 읽었을 때, 더 많은 나를 발견했기를 바라며.




먼저, 나는 정의롭지 않은 세상의 많은 것들에 화가 많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젠더 문제에 민감했던 것을 시작으로, 정치, 환경, 동물권을 비롯한 사회 문제에 예민하다. 귀를 닫으려 해도 심장이 잘 뛴다. 비뚤어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크다. 그래서 옳은 것,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가치,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대상에 이끌린다.


나는 스스로에게 잘 만족하지 못한다. 열심히, 혹은 노력이라는 단어를 내게는 잘 쓰지 못한다. 유독 내게는 더 최선을 다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게 된다. 고치려 노력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여왔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절망하되, 좌절하지 않고 나아가면 오히려 발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적 허영심이 있다. 자각하고, 배우고, 인식하고 그런 과정이 좋다. 작은 도전이지만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부딪혀보는 것이 재밌고, 살아가는 힘을 준다.


활자로 이루어진 메시지들을 좋아한다. 대면의 만남보다는 문자로 대화하는 것이 편안하고, 비언어적 메시지가 가려져 있을 때 조금 더 내밀한 스스로를 비추게 되는 것 같다. 떠오르는 생각을 텍스트로 붙잡아 기록하는 일이 좋다. 누군가의 멋진 생각이 담긴 글을 읽는 일 역시 좋다.


해가 떠 있는, 낮의 시간이 좋다. 들어오는 볕에 빛나는 식물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눈이 부셔도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동네를 걷고,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사람들과 만날 때도 점심 약속이 더 좋다. 낮은 내가 에너지를 많이 느끼는 시간이다. 낮이 긴 여름이 좋다.


정적이며 고요한 것이 편안하다. 사람들이 많고, 소리가 큰 것은 나를 힘들게 한다. 서로의 거리가 충분히 유지될 수 있는 낮은 밀도가 좋다. 내향적인 성격은 조직생활에서 단점이고, 어쩌면 내 삶을 따분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일보다는, 정말 나의 가치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과 깊게 내밀한 대화를 하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얕고 느슨한 관계도 좋다.


영향력을 끼치는 일이 좋다. SNS가 바보 같은 일인 줄 알지만, 기록하고 노출되는 것을 꾸준히 해 온 것은 그 때문이다. 누군가 나의 글과 사진을 보고 힐링이 되고, 위로가 되고, 또 깊은 공감을 느낀다고 이야기해주었을 때 보람이 느껴졌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세상의 기준에 영향을 받지 않되, 나만의 기준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공간의 힘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공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숨이 막히지 않는 공간, 적절한 조도가 뒷받침되는 공간, 적당한 소음이 있는 공간. 집을 가꾸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집이라는 공간에 많은 고민을 쏟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돈을 좋아하지만 한편 돈이 천박하다는 모순적인 생각이 있다.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은 <월든> 같은 삶이지만 현실에서는 반짝거리는 많은 것들에 눈길이 간다. 일단은 이 모순을 끌어안아보기로 했다. 돈 앞에서는 너무 천박해지지도, 너무 고매하지도 않게 균형을 잘 잡으며 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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