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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ish Dec 10. 2018

트라우마, 전염될 수 있다

이차성 트라우마

끔찍한 사건들, 남겨진 트라우마의 잔해

최근 있었던 '강서구 PC방 살인 사건'은 끔찍한 사건이었다. 가해자는 약간의 실랑이 끝에 초면인 피해자를 칼로 난도질했고, 언론에서는 이 사건의 세세한 경과를 연일 보도했다. 그 후, 응급실에서 피해자를 처음 진료했던 응급의학과 의사가 SNS에 쓴 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해자 유족의 동의 없이 고인의 신체 피해를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고인의 몸에 남은 끔찍한 상처에 대한 상세한 묘사 때문이었다. 우리는 영상과 글을 통해 고인의 몸에 남겨진 흔적들에 대해 알게 되고, 그 당시의 참혹한 사건 현장을 떠올리게 된다. 몸서리쳐질 정도의 잔혹한 살인 사건의 현장.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서 당시 피해자가 겪었을 안타까운 두려움에 감정이입한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최근 진료실에서 만난 한 중년 여성은 자신의 아들 또래의 피해자와 그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며, 최근 며칠간 잠을 자지 못했다 한다. 피해자의 가족, 친구들도 물론 그랬을 테다. 


9와 11. 이 두 숫자는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린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2001년 9월 11일에 벌어진 쌍둥이 빌딩 테러 사건은 뉴욕 시민, 미국 전역의 국민들,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남겼다. 사망자의 수도 막대하지만, 사건 후 온 사회에 흘러넘치는 트라우마의 흔적을 수습하기 위한 시간과 비용도 어마어마한 수준에 이른다. 시간이 상당히 지난 지금도 사건 현장에는 추모 행렬과 더불어 음울함과 비통함이 흐른다.  


트라우마는 더 이상 사건 당사자만이 겪는 일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트라우마는 전염될 수 있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과, 이를 지켜보는 가까운 사람들 모두 트라우마의 폭풍이 지나간 후유증에 시달린다. 지인이 겪은 사건이 아니더라도 뉴스에 나오는 충격적 사건에 많은 이들이 가슴 아파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기도 한다. 이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적 인지(social cognition) 능력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울타리 안에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끈을 통해 감정과 생각이 서로의 마음을 오간다. 이 과정에서 슬픔, 아픔,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도 상대에게 닿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2013년에 개정한 정신의학의 진단 및 분류 체계인 DSM-5에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이하 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의 진단 기준 중 사건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해야 한다는 내용을 제외하기도 했다. 직접 트라우마를 경험하지 않더라도, 세부적인 상황을 듣는 것만으로 PTSD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일종의 함의(consensus)가 생긴 것이다. 


여러 연구의 결과에 따르면, 연구마다 수치는 다르지만 트라우마로 인한 후유증을 겪는 이와 가까운 사람의 10~20% 정도가 비슷한 증상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2013년에 이루어진 연구에서는 전장에서 심한 트라우마를 겪은 후 고통받는 퇴역군인을 치료한 치료자 200명 중 5분의 1 정도가 다양한 트라우마 증상을 겪었다고 밝혔다. 연구를 진행한 Roman 등은 이를 "이차성 트라우마(secondary trauma)"라 지칭했다.
             


트라우마가 전염되는 이유? : 공감하는 뇌

네덜란드의 흐로닝언 대학의 Judith Daniels 교수팀은, 이를 간접적인 감각기관의 정보 입력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연구에 따르면, 시각적 이미지를 처리하는 기능을 가진 뇌의 영역과 상상으로 만들어진 시각적 경험을 처리하는 영역이 일부 겹친다고 한다. 즉 실제 경험하지 않은 트라우마라도 간접적으로 접한 세세한 정보를 통해 시각적 정보가 생겨나고, 이로 인해 "이차성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공감 능력도 트라우마의 전염에 한몫한다. 눈앞에 있는 누군가가 연신 손톱을 깨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다리를 덜덜 떨며 앉아 있다면 우리 자신도 덩달아 마음이 불편해진다. 반대로 상대의 표정이 이 밝고 온화해 보인다면,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편해진다. 자신을 둘러싼 분위기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고, 이에 동조하는 인간의 능력은 양날의 검이 된다. 실제적인 외부 자극(트라우마)에 노출되지 않아도, 우리 뇌에 있는 변연계는 가상의 위기를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상의 위기는 인체를 '전투 모드'로 바꾸어 긴장과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분별한 매스미디어, 선별적 보도의 필요성

대중이 접하는 미디어 채널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나고, 유튜브 등을 통해 개인이 운영하는 일인 미디어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그만큼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을 분석하고, 재조명하여 보도하는 이들이 많다. 문제는 무분별하고 절제되지 않은 보도 행태다. 미디어 간의 경쟁으로 자극적이고 끔찍한,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사건들은 더욱더 오랫동안 보도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누군가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을 살해 동기, 과정, 범행 도구를 조각 맞추듯 치밀하게 이야기한다. 심지어 어떤 미디어에서는 3D로 그들의 동작을 재연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 인간이 트라우마에 '전염'될 수 있음을 간과하는 일이다. 피해자의 사망 후 남겨진 이들은 끔찍한 악몽에 시달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강렬함은 잦아들겠지만, 트라우마의 기억은 조각이 난 채로 뇌 안 어딘가를 돌아다니다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작은 단서(cue)에 강렬한 고통이 되살아나게 된다. 자극적 사건에 대한 무분별한 보도는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다시 불러오는 끔찍한 고문행위일 수 있다. 피해자의 가족뿐만 아니라, 끔찍한 사건에 대한 필요 이상의 상세한 묘사는 누군가에게 트라우마의 상황을 상상케 하고, 이는 "이차성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한국기자협회의 윤리강령의 서두에는 '국민들의 알 권리 충족'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태초에 언론이 생긴 이유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들의 알 권리로 인해 타인의 권리가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아픔을 들춰내는 행위가 그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극적인 것만 좇는 세상이지만, 그만큼 언론의 역할이 더 막중하다. 삭막해져 가는 사회에 구성원들 서로가 따뜻한 배려의 시선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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