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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Jang Aug 31. 2024

Chapter One  친 구 들


오랜만에 리만 투어를 찾아온 사엘은 모래사장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옅은 푸른색의 바다 위에 파도가 잔잔하게, 쉼 없이 밀려왔다 밀려간다. 모래사장으로 밀려오는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만든, 하얗게 부숴지는 파도를 보고 있으니, 그녀는 이곳은 오늘도 여전히 그때처럼 변함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순간 그녀의 낭만적이고도 아름다운 생각을 지워 버리듯, 맑았던 하늘에 어둠이 밀려오며, 푸르던 정오의 하늘이 순식간에 밤하늘로 변하고, 어두운 밤바다 위로, 지난날들이 책장을 넘기 듯 지나간다.사람들의 함성소리와, 칼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그 광경과 소리가 괴로운 듯, 눈을 감고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다시 눈을 뜨고 밤바다를 바라보니, 이번에는 그녀가 사랑했던 이들의 모습들이 책장을 넘기 듯, 지나간다. 그 광경에 미소를 지으니, 그 광경들 또한 금세 사라진다. 미소 짓던 그녀의 입술이 쳐지고, 잠시 밝아졌던 눈은 다시 초점을 잃은 공허한 눈빛으로 변한다. 주변은 다시 맑은 정오의, 그녀가 왔던 그 시간으로 바뀐다. 사엘은 이런 일들이 처음이 아닌 듯, 고개를 살짝 좌우로 흔들고는, 불이 붙어 있는 말아진 잎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시고는 길게 내뱉는다. 호흡 사이로, 자신이 여전히 숨을 쉬며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시리다. 푸른 하늘 위를 날던 작은 새 무리들이, 바다 위를 낮게 비행하더니, 모래사장 위로 내려앉아, 파도를 따라 종종 거린다. 마치 파도와 밀고 당기는 놀이를 하는 듯 재미있어 보인다. 종종 거리던 새 한 마리가 파도 놀이에 싫증이 났는지, 날아올라 가자, 나머지 다른 새들도 따라서 날아올라간다.



"너네는 같이 놀아 재밌겠어.” 사엘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하며, 말아진 잎을 다시 들이마시고는 길게 내뱉는다.


“여기 있었어?”

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들고 있던 말아진 잎을 모래로 덮어 숨긴다.

“신전에 갔었는데, 없어서 한참 찾아다녔어. 카야도 없이 혼자 온 거야?”

여람이 두어 마디를 더 하는 동안 사엘은 아무 말 없이 바다만 바라본다.

“무슨 일 있어? 리만투어에 다 오고?”

여람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물음에 그제야 사엘이 입을 연다.  “무슨 일은. 여기가 무슨 일이 있어야 오던 곳은 아니잖아”

“같이 오자고 하지 그랬어? 심장은 괜찮아?”


사엘의 곁에서, 그녀를 늘 챙기는 그다.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은 전보다 더 많이, 그녀에 대한 걱정이 많아졌다.

얼마 전부터 사엘은 심장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고, 여러 번 이유 없이 쓰러졌다. 오늘도 보이지 않은 그녀를 여람은 찾아다니면서, 행여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한 것이다.


바다만 바라보던 사엘은 얼굴을 돌려 여람을 보며 말한다

“아무 일도 없어. 심장도 괜찮고. 그냥 왔어. 여긴 늘 아름답고, 파도 소리도 좋잖아.”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 소리가 좋다고 말하기엔 그녀의 눈가는 쑥 들어가, 퀭하고 목소리도 높낮이 없이 건조하다.


여람은 팔을 뻗어, 그녀가  모래 속에 숨겨 놓은, 말아져 있는 잎을 찾아내며 묻는다. “또 한 거야?”

그녀는 들켜서,좀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한다.

“뭐. 그냥 조금.”

“이게 어떤 건지 알면서 그래?”

사엘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응. 알면서 그래.”


사엘의 말에 여람은 그녀에 대한 걱정과, 또한 알면서도 그러는 그녀를 책망하고 싶지만,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알기에, 말을 잇는 대신 그녀를 바라보자, 사엘은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런데, 여람아 그거 알아?”


그녀가 오랜만에 부르는 그의 이름이다.

여람은 사엘과 함께 보낸 10대 그리고 20대와 30대를 지나 40대 중반까지 그녀 곁에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사이에서, 친구라는 모습으로 있다. 그러나, 늘 그녀 곁에 친구처럼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나란히 옆에 앉아, 그녀가 하는 일에 참견도 하고, 걱정도 하고, 관심도 가지려면, 친구로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기에, 어려움을 이겨내고, 절제하는 법을 배우며 그녀 옆에 있는 것이다. 심장이 아픈 건 그녀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도, 아프게 휘젓는다.


사엘이 ‘매향초’을 또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알 수 없다. 그녀가 그것을 꽤 자주 피우는 것을 여람은 알고 있고, 중간에서 사엘이 그것을 구하지 못하게 막지만, 그녀는 매번, ‘매향초’ 잎을 구해, 피우며, 그냥 이렇게 앉아 바라보고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여람은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바다 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바다 너머, 혹은 바다 깊이,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과 이곳에서 떠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매향초’는 그런 그녀를 환각 속에 빠지게 하고, 그녀를 그때로, 데려간다.


“뭘?”

사엘의 물음에 여람은 그제 서야 대답한다.

“그때도 그랬다. 신전 안에서, 매향초에 취해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보이는 거야. 깨어나고 싶지 않았어.”  

여람은 일어나 말아진 ‘매향초’를 바다에 던져 버린 후 사엘 옆에 돌아와 앉는다. 그녀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둘 수는 없어, 그녀를 쳐다보며 말한다.

“이게 얼마나 해로운 줄 알면서, 이러는 거야? 이것을 구하는 자들, 파는 자들을 모두 엄벌에 쳐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또 구하는 건지. “

바다만 바라보던 사엘은 고개를 돌려, 여람의 눈을 응시하며, 여전히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나도 이것을 구한 자인데, 나는 왜 벌 안 줘? 나도 잘못했잖아. 원래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야.” 라고 말한다,

그녀의 말,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한 여람은 할 말을 잃는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한 번 내 쉬고는 어렵게 말한다. 그건.. 그건, 너 잘못이 아니야.”


여람은 ‘매향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부터이다.

그녀는 그녀의 모든 것이 말라 버린 듯, 얼굴은 회색빛으로 변했고, 눈동자는 늘 공허해 보이며, 목소리는 건조하고 몸은 앙상하게 뼈만 남아 보인다. 그녀는 마치 숨을 쉬는 죽은 시체처럼 보인다.


“여람아?”

그녀가 또 그의 이름을 부른다. 여람은 그녀의 건조한 입에서 나오는 그의 이름을 들으며, 마음이 아리게 아프다.

그녀가 불러 보고 싶지만, 부르지 못하고,  마음속에 얼마나 많이 담겨, 그녀를 아프게 짓누르고 있을까.


“응?”

“그때 정말 좋았는데. 물론 모든 시간이 다 좋았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다 같이 있었던 그때 말이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거야. 그래서 다시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싶어서 그랬어.”

“매향초는 기억나게 하는 게 아니라, 환각을 일으키는 거야. 그 환각은 가짜고 허상이야. 매향초의 독이 너의 몸과 영혼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고.”

“나에겐 모든 것이 고통스러워. 오히려 이 환각이 나의 현실과 기억들 대신, 내가 원하는 대로 보여주니 덜 고통스러울 뿐이고.”


잔잔하던 파도가, 거세게 몰아 치며, 멀리서 두세 겹으로 밀려오더니, 하나로 합쳐져 더 큰 파도를 만들어 모래사장 위를 내리친다.


파도 소리 넘어 웅성 웅성웅성 말소리가 들린다.


“이 반만 한 여자애는 뭐야? 그리고 뭐? 이 여자애가 저 바다에서 저 나무 판으로 뭘 한다고? 파도를 타? 왜? 바다 위를 걷는다고 해보지?”

수아는 어이없고, 또한 놀라는 표정으로 사엘을 쳐다보며, 밧세와 여람에게 말한다.


수아의 말에 사엘은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자 그녀의 머리가 수아의 가슴정도밖에 안 닿을 정도로 그녀는 작다.

사엘은 수아를 올려다보며 눈을 치켜뜨고 말한다.

“도대체 뭐에 놀라고 어이가 없는 건데? 파도를 타는 것? 아니면 내가 너보다 조금 작은 여자애라는 거?”


사엘의 당돌한 말과 행동에 수아가 한걸음 물러서며 당황 해 한다. 잘난 척이 많이 심한 수아가 당황해하는 모습에 밧세와 여람이 소리를 참으며 웃는다.


사엘은 물러난 수아 앞으로 다시 한 발자국 다가가 말한다.

“그러니까 뭐에 놀라고 어이가 없는 건데?”

이번에는 수아가 사엘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그래 놀랐지. 어이도 없고. 어이가 없어서 놀란 거지. 왜?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까. 리만투어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해. 물론 아무것도 못하고. 왜? 위험하니까. 저 바다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바다가 아니야. 잔잔해 보여도, 파도가 너무 높고 깊은 데다, 때로는 너무 거칠어, 파도에 한번 휩쓸리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 죽는다고. 바다에 들어가는 것도 위험한데. 너는 저기 파도 위에서 저 나무 판으로 뭘 한다고? 파도를 타? 어떻게? 차라리 바다 위를 걷는다고 해. 아. 맞다. 그건 아까 말했고. 그러면 바다도 아주 반으로 갈라서 그 사이로 걷는다고 해보지. 말이 되는 말을 해야 믿지.”

수아의 말에 사엘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입고 있던 연한 연겨자 색 치마를 벗는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수아가 놀라 뒤로 두어 걸음 물러 서며 말한다.

“야. 에잇. 이 여자애가. 진짜. 너 뭐 하는 거야?”  

그의 말에 아랑곳없이, 그녀는 하얀색의 웃옷까지 벗는다.

수아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자, 사엘은 그의 손목을 잡고 내리며 말한다.

“눈 가리지 말고, 크게 뜨고, 잘 봐.”


사엘이 바다 쪽으로 걸어가자, 여람은 그녀를 따라가며, 들고 있던 얇고, 납작하고, 평평하게 잘 깎여진 나무 판을 그녀에게 건넨다. 나무 판을 받아 든 사엘은 바닷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어느새 물이 허리까지 차오른 지점까지 간다. 몸을 나무판 위에  엎드린 그녀가 팔을 휘저으며 바다를 향해 더 멀리 나아간다.


수아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한다.

“그런데. 쟤 다 벗고 저러는 거야?”

수아의 말에  여람과 밧세는 수아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며 동시에 말한다.

“뭐?”  

여람이 말한다.

“안에 뭐 입었잖아. 너 같으면 다 벗고 저러겠니?”

여람의 말에 밧세바 이어서 말한다.

“수아 쟤는 다 벗고 할지도 몰라. 생각도 없고, 창피한 것도 몰라서.”

밧세의 말에 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맞네. 수아는 그럴 수 있지. 충분히.”

둘은 수아를 보며 소리 내어 웃는다.  

수아는 둘에게 달려들며 말한다. “너네 나한테 이럴래? 저 여자애가 뭐라고? 도대체 잰 누군데 그래?”

수아의 말에 아랑곳없이 여람이 손으로 바다를 가리키며 말한다. “봐봐. 파도다.”

여람의 말에 수아가 바다 쪽을 바라보고는 놀라 말한다.

“뭐야? 쟤 저기까지 언제 간 거야?”  

밧세가, “파도가 좀 낮았네.”라고 말하자, 수아는 그들을 보며 묻는다.

“너네? 너네는 저 여자애가 파도타기 인지 뭔지 한 걸 이미 본 거야? 언제? 언제부터 저 여자애를  알고 있었어? 왜 나만 몰랐어? 응?”  

여람은 수아의 묻는 말에 대답 대신, “파도가 꽤 높은데. 슬슬 일어서겠어.”라고 말하자, 수아는 그들을 향해 소리친다. “너네 내 말은 듣고 있어?”

밧세는 양손으로 수아의 얼굴을 바다 쪽으로 돌리며 말한다. “아오. 시끄러워. 좀 있다 말하고, 저기 좀 잘 봐봐.”


바다 멀리 그녀가 보인다. 큰 파도가 밀려오자, 나무 판을 파도 반대 방향으로 돌려 팔을 휘젓는 것이 멀리서도 보인다.  하얀 파도가 동그랗게 말리며 일자, 나무판 위에 일어선 그녀가, 밀려오는 파도 위에서 나무 판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녀의 모습이 마치 파도 위에 서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수아가 놀란 얼굴로 밧세와 여람을 보며 말한다. “쟤 뭐야? 도대체 누구인데 저런 걸 해?”  

여람이 대답한다. “두 달 전에 밧세랑 여기 왔다가 우리도 보고 놀라서, 바다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잖아. 우리도 누군지 궁금해서”  

밧세가 말을 잇는다. “얼마나 바다에서 오래 있다가 나오던지. 그래도 나올 때까지 끝까지 기다렸지. 그런데 쟤 누군지 알아?”

수아가 재촉하며 묻는다. “누군데?”

여람과 밧세바 동시에 말한다. “사엘.”

“사엘?”

수아가 되묻자 밧세가 대답한다. “요 제사장님 댁 딸이야. 기억 안 나? 우리 여섯 살 때인가? 동네 애들이 어느 집에 모여서 같이 놀고, 글도 배우고 책도 읽고 했잖아. 선생님이라는 분들도 계셨고. 그때 우리도 거기서 처음 만났고.”

수아는  밧세의 말에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뭔가 생각이 난 듯,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한다.

“어. 기억나는 것 같아.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선생님이 제사장님 댁 아이 라면서 소개해 주셨던 애는 기억이 나. 우리 그때 누구 지파, 수장님 하면서 이름 말하고 그랬잖아. 아 맞다. 혹시, 오기만 하면 오전 내내 울다가 집에 갔던 애? 그 애 아니야? 맞지? 그 쪼금 한 울보? 그런데 재는 얼마쯤 오다가 안 나 오지 않았어?”

수아의 말에 여람이 대답한다. “맞아. 그 애야. 그런데 그 쪼끔 한 애라는 건 좀 빼라. 키만 자란 너보다 생각은 훨씬 더 자란 거 같던데.”

여람의 말에 수아가 주먹으로 여람의 어깨를 두어 차례 때리며 말한다.

“아니 키가 크는데 어떻게 마음과 생각이 안 크겠어? 저 바다로 뛰어들겠다고 생각한 쟤, 저 사엘이라는 애가 더 생각이 없는 거지.”

밧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여람과 수아 사이에 서서 말한다.

“둘 다 그만 좀 다퉈. 하여간, 6살 때부터 지금까지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티격태격이야? 수아 네가 기억하는 게 맞아. 몇 달 오다가, 그 뒤로 안 나왔던 것도 맞고. 그리고 나는 왜 안 나올까 궁금했었는데, 물어볼 데가 있어야지. 그런데 며칠 전 여기서 만난 애가 그때 그 애라서 놀랐어.”


한참 동안 파도 위에서 나무 판을 타며 놀던, 사엘은  해안가로 걸어 나온다. 그녀 뒤로 석양의 햇볕이 길게 비추어, 그녀는 바다가 아닌 마치 빛 속에서 걸어 나 오는 것처럼 보인다.


세 사람 앞에 선 사엘이 수아를 바라보며 말한다. “봤지?”

여람은 모래 위에 놓여 있는 천을 털어 사엘에게 건네자, 그녀는 몸의 물기를 닦는다.

수아가 사엘의 시선을 피하며 말한다. “옷이나 먼저 입어.”

여람은 다시, 모래 위에 놓인 사엘의 웃옷과 치마를  털어 그녀에게 건넨 자, 그녀는 입고 있었던 옷 위에 옷을 다시 입는다.

수아가 사엘을 보며 말한다. “그런데  넌 여자애가?”

옷을 다 입은 사엘은 수아 앞으로 다가가, 말한다.

“넌 말끝마다 여자애, 여자애 하는데. 여자애가 뭐? 또 뭐가 문제인데?”

수아가 한걸음 뒤로 물러 서며 말한다

“그러니까, 넌 여자애가 뭘 그렇게 옷을 막 아무렇지 않게 벗고 그래. 야, 이런 건 남자들끼리만 있어도 안 해.”

사엘이 말한다.

“그런데 너 나를 너나, 여자애라고 부르는데, 내 이름은 사엘이야. 사엘.”

사엘의 말에 수아가 기어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알아. 네가 사엘인 거.”

“나도 너 알아. 수아지?. 그때 그 집에서 봤어. 쪼그맣고 말썽만 피던 애. 선생님이 맨날 너 붙잡으러 다니셨잖아.”

“그거 나 아니거든. 그리고 네가 어떻게 알아? 오전 내내, 울다가 집에 갔으면서, 그러다 안 나 왔잖아”

“맞아 울다가, 일찍 집에 갔고, 얼마 안 다녔지만, 네가 개구쟁이, 말썽꾸러기였던 건 기억해.”

무엇이든, 똑 부러지게 말하는 사엘에게 수아는 할 말을 잃는다.

밧세는 사엘과 수아의 어깨를 토닥 거리며 말한다. “인사도 했고, 누군지도 알았으니까, 이제부터 서로 친하게 잘 지내세요.”

“왜?”

사엘이 말하자, 수아도 말한다. “우리 계속 만나야 돼?”

바닷가에 오자 마자 주변에서 모은 나뭇가지들로, 그새 모닥불을 피운 여람이 그들을 보며 말한다.

“다들 그만하고 여기 와서 앉아. 사엘아. 너 그러고 있으면 곧 추워진다. 빨리 이리로 와”  


넷은 모닥불 주변으로 동그랗게 앉는다.

수아가 사엘을 보며 말한다.

“그런데 너 대단은 하더라. 여르살 역사관에게 말해서 역사 문서에 기록하라고 해야겠어.”

수아의 말에 사엘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한다.  

“내가 대단한 건 맞는 거 같은데, 누구? 여르살? 문서에 뭘 기록해?”

밧세가 수아 대신 대답한다.

“수아네 집이 여기서 가장 오래된 지파라, 지금까지 내려오는 모든 이야기와 역사들을 기록하고, 보관하고 있잖아. 역사관 여르살 가문이 그 일을 대대로 해 오고 있고, 그걸 말하는 거야.”

사엘이 말한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바다에 들어간 거랑 파도 위에서 좀 놀았다고 해서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차라리 책을 하나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도 배우게 하는 게 어때?”

사엘의 말에 수아가 말한다. “리만투어 에서 했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지금까지 저 바다엔 그 누구도 들어간 적이 없어. 바다는 살아 있지만, 인간에게 저 바다는 죽음의 바다거든. 사람이 들어가면 일부러 바다가 그 산 자를 죽음으로 내 몬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읽었어. 그래서 놀랍다는 거야? 도대체 넌 언제부터 어떻게 저 바다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야?”

“여섯 살 때부터.”

사엘의 말에 수아가 두 손으로 무릎을 치며 웃으며 말한다. “얘 봐라. 역사문서에 기록한다고 하니 내용이 갑자기 장대해지네. 여섯 살 때부터 바다에 들어가서, 저 나무 판을 탔다고? 그 집에선 오전 내내 울다가 집에 갔던 그 꼬마가?”

“그때 운 건.”

사엘이 하던 말을 잠시 멈추었다, 말을 잇는다. “그때 울었던 건 아파서 그랬어.”

여람이 놀란 얼굴로 묻는다. “아팠어? 어디가?”

사엘이 오른손을 가슴에 대며 말한다. “병이 있었던 건 아닌데, 여기 심장이 아팠어. 여기가 불에 타는 것처럼 너무 뜨겁고 숨을 못 쉬게 답답했어.”

“지금은? 지금도 아파?”

수아가 묻자, 사엘은 한번 숨을 크게 쉬고는 말한다.

“여기 리만투어에 오면 괜찮아지더라고. 그래서 오전에 그 집에 가서 있다가, 오후엔 여기 와서 있었어. 그날도, 심장이 찌르듯이 아파서, 그냥,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정신을 잃었던 거 같아. 눈을 떠보니 집 이더라. 그때 카야가.”

“카야?”

여람이 묻자, 사엘이 말을 잇는다.

“내 호위 무사. 카야가 바다에 뛰어들어, 빠지지 말고, 바다 위에 서 보라고, 나무 판을 잘라 저걸 만들어 준거야. 그래서 저걸 붙잡고, 헤엄도 쳐보고, 올라앉아도 있어보고, 서 보기도 하다가, 파도 위에서 타는 걸 알게 된 거지.”

카야는 사엘이 바다에 뛰어든 날, 그녀가 정신을 잃었지만, 바다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사엘의 엄마가 그녀에 대해 말해준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사엘에게 조차도 말하지 않고, 곰곰이 며칠 생각하다, 나무 판을 잘라 평평하게 만든 후 줬고, 처음 사엘은, 며칠, 나무판과 파도와 고군 분투 하더니, 나무판 위에 서서, 파도를 타는 것을 익힌 것이다.

밧세가 묻는다. “그런데 그 집에는 왜 다시 안 왔어?”

사엘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한다. “안 가는 날도 더 많고, 오전만 있다가 오기도 그렇고 해서. 또 언제 아플지도 모르고, 그리고 내가 바다에 들어갔다 나오면 가끔 쓰러지고, 그러다 며칠 있다가 깨어나고 그랬거든. 그냥 그런 것들이 내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거 같고, 이상하게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안 가게 된 거야. 그리고 공부보다는 파도 놀이가 재밌지.”

사엘이 마지막 말에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하지만 셋은 사엘의 말에 조용하고 진지해진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들어. 나는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거야. 뭐 너네도 지파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지 않아? 지파랑 제사장네은 좀 다른가?”


여기 모인 이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이나, 꿈이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정해진, 삶이 있다. 이 땅 위에 처음 사람들이 모이고, 살아가기 시작한 후, 세워진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1지파의 수장, 라함과 그의 부인 레첼 그리고 그들의 아들 수아이다.

그 후에 1지파에서 두 지파가 갈라져 나왔는데, 하나는 2지파이며, 지금 2지파의 수장은 하갈이고, 그녀의 아들은 밧세다.

또 다른 지파는 3지파이고, 수장은 마하살, 그의 부인은 레이이며, 그들의 아들은 여람이다.

수장의 자녀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살아야 할 운명으로, 각 지파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역사와 율법, 전통을, 그들의 부모가 그렇게 했고, 그들의 선조들이 대대로 전승하고 지켰듯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물려받은 유산을 그들이 하는 것처럼 다음 세대에도 물려주고, 지파 사람들의 희망과 기대,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이끌어 나가야 한다.

이제 열여섯 살 밖에 안된 이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그들에게는 무거울 수도 있고,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그것이 그들이 마땅히 짊어지고 살아야 할 그들의 몸에 흐르는 피에 담긴 소명이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서로에 대한 삶의 무게와 운명을 알기에, 이들은 유독 가깝게 지냈고, 수장들도 이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며, 다음 세대 에도 지파들끼리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기에, 그들이 함께 어울리며 지내는 것을 좋게 여겨, 내버려 두었다.


사엘의 집안은 수장의 가문과는 다르다. 그녀의 집안은 지파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 땅에 존재하고, 이 땅을 창조한 하라셀 선조의 자손 들로 지파들의 중심에서 그들의 중재와 평화와 축복을 담당하고 있는, 지파로 분류되지 않고, 지파로 계수되지도 않는 제사장 가문으로 불린다. 제사장 집안은, 그동안 하라셀 선조가 했던 대로, 제단의 불을 밝히고 지키며, 각 지파의 축복과 번영을 위해 기도하고, 신을 위한 제사를 주관하며, 사람들의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하라셀 선조 가문에서, 1지파가 갈라져 나와,  제사장의 역할과, 지파를 다스 리는 역할을 분리하기 시작했고, 그 뒤로 1지파에서 2지파와 3지파가 갈라져 나와, 지금처럼 세 개의 지파와 제사장 가문이 형성되어 5000년의 세월이 흘렀다. 결국 이들 모두 한 자손, 한 뿌리인 셈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땅도 더 넓어지면서, 인간이 사는 곳에, 죄악과 범죄도 넘쳐 나기 시작했고, 한 뿌리였던 자손들은, 다른 족속 들과 섞이기 시작했으며, 처음 이 땅 위에 있었던 신이 아닌, 다른 신도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사장 들도 명맥만 유지하는 제사장으로 있을 뿐, 그들의 역할인, 신전을 지키거나, 사람들을 위한 기도도, 축복도, 그리고 신을 위한 제사도 드리지 않기 시작했으며, 신의 이름도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자, 400년 전 꺼지지 않던, 제단의 신의 불 마저 사라졌다. 그동안 이 땅 위에 400년 동안, 원인 모를 질병과, 홍수와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땅도 점점 황폐 해져 갔지만, 이 땅을 대대 손손 지켜 오는, 지파의 수장들과 믿음을 지키는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다시 제단의 신의 불이 밝혀 지기를 기다리고, 사람들과 땅이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


밧세는 무엇인가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치며 말한다.

“우리 처음에 만났던 게 그 집이 아니야. 수아네 집이었어.  그때 내가 세명인지 네 명인지 기억이 잘 안 났는데, 네 명이었어. 그 집에 가기 전에, 수장님들과 다 같이 모여서 인사하고, 식사하고 그랬던가? 아마도 그랬어.”

밧세의 말에 수아도 다시 생각난 듯 말한다.

“맞아. 나도 기억나. 그래, 그게 우리 집이었지. 그것도 내 방. 너네들이 몰려와 내방의 물건을 막 만지고 소란을 피우고, 그래서 내가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너네들이 계속하고. 내가 그때 짜증이 엄청났었는데, 그걸 잊고 있었네. 그런데 나는 모두 남자 애들로 기억했거든, 다들 너무 소란스러워서. 여자애가 하나 있는 줄은 몰랐어. 그리고 그 집에서 본 애랑 우리 집에서 본 애가 다른 애인 줄 알았고.”

수아의 말에 사엘이 발끈하며 말한다.

“그런데, 넌 아까부터 자꾸 여자애, 여자애 그러는데, 너네 집에서 본 여자애든, 그 집에서 본 여자애든, 아무튼 여자애라서 뭐?”

사엘의 말에 이번에는 수아가 침착한 어조로 말한다.

“그런데, 너도, 여자애라는 말만 나 오면 왜 그렇게 화를 내? 그냥 성별을 말한 거야. 네가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난 성. 그걸 네가 지금은 어떤 정체성으로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너에게 불편하게 들렸다면, 여자애 남자애 그렇게 말 안 할게. 그냥 우린 다 인간 아니겠어.”

수아의 진지한 말과 태도에 사엘이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모래를 몇 번 좌우로 휘젓더니, 고개를 들어 수아를 보며 말한다.

“화를 내려고 한건 아니야. 나도 미안해. 내가 여자애라는 단어에 좀 예민해서 그런가 봐.”

여람은 사엘이 그 단어에 왜 예민한지 궁금해서,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그냥, 너무 개인적이고, 깊은 이야기인 거 같아 묻지 않는다.

그리고 다들 묻지 않아도, 제사장 집안의 소문에 대해서 대충은 알고 있기도 했지만, 그 런 것들이 사엘에게 크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들 중 키와 덩치가 제일 큰 밧세는 긴 두 팔을 벌려 옆에 앉은 사엘과 수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아무튼, 이렇게 새 친구도 만났으니, 우리 셋이 늘 잘 지냈던 것처럼, 사엘하고도 같이 잘 지내는 거야.”

밧세의 말에 사엘은 얼굴을 찡 그리며 말한다.

“으. 느끼해. 그런 말을 왜 해?”

수아는 밧세의 팔을 치우며 말한다.

“우리가 잘 지내고 있는 건 맞고?”

여람이 수아를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본다.

“엥?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밧세가 웃으며 말한다.

“그럼 우리가 매일 만나 같이 있는 건 뭐냐? 그게 잘 지내고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사엘이 너도 이제부터 우리랑 이렇게 매일 보자고.”

여람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말한다. "그런 말이었군. 역시 우리 밧세는 늘 생각이 깊어. 누구와는 다르게.”

여람은 손가락으로 조그마한 동그라미를 만들어 밧세 에게 보여주며 말을 잇는다. “이 동그라미 어때?”

“너무 크지 않아?”

여람의 질문과 밧세의 대답에 의아 해진 사엘은 둘을 번갈아 보며 묻는다. “그게 뭔데?”

밧세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한다. “수아 머리와 마음의 크기.”

여람은 다른 한 손으로도 작은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여 주며 말한다.  

“수아 머리는 요 만해. 그래서 생각도, 마음도 요 만한 거야.”

사엘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이며, "아" 하고 말하자, 수아가 발끈하며 말한다.

“아니거든. 고 만큼만 뺀 나머지가 내 마음과 생각이거든.”

사엘은 셋을  번갈아 보며 말한다.

“너네들이 얼마나 친하지 알겠어. 서로들을 너무 잘 아네.”  

사엘의 말에 셋이 서로 손을 내 저이며 동시에 말한다. “아니야. 우리 안 친해.”

그러고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깔깔대고 웃는다.

그런 그들을 보고 사엘도 웃음이 터진다.

어느 말에서, 어느 시점에서 웃음이 터 졌는지는 다들 모른다. 그저, 지파, 수장의 자녀, 제사장의 자녀라는 그런 무게나 책임감 보다, 바람만 스쳐도, 나뭇잎만 굴러 가도, 얼굴만 쳐다봐도 웃긴, 이들은 그저 열여섯 살 아이들처럼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든다.

석양이 지고, 이들의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 그리고 모닥불이 타며 내는 타닥타닥 나는 소리까지 어우러져,

리만투어에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그 이후로, 여람, 밧세, 수아는 오전에 공부가 끝나면 사엘이 있는 리만투 어를 찾아온다. 이들이 그전에 리만투어를 자주 찾았던 것은 아니나, 사엘과 알고 지낸 이후로, 사엘을 만나러, 리만투어에 오고, 이곳은 이들 셋의 새로운 놀이 공간이 되었다. 그들은 모래 위에 담요를 깔고, 그 위에 앉거나 누워, 책도 읽고, 모래성도 쌓고,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낮잠을 자기도 한다.

며칠 전부터 여람은 나무를 잘라다, 열심히 다듬어서 사엘것과 비슷하게 나무 판을 만들었다. 사엘에게 파도 위에서 타는 걸  배워 본다고 그녀를 따라 바다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는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조차 어렵고 두려워 보인다.


사엘은 가뜩 긴장한 여람의 팔을 잡고 말한다. “바다를 무서워하면 안 돼. 그냥 느끼는 거야. 파도가 칠 때, 너의 몸이 같이 움직이는 걸 느끼면 돼. 그리고 내가 널 이렇게 잡고 있잖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파도가 밀려오는 걸 보니 속이 울렁거리는 거 같아. 발은 모래에 푹푹 빠지는 거 같고. 나 지금 서있는 거니? 떠 있는 거니?”

“서 있기도 하고, 떠 있기도 하지. 이래서 나무판 위에는 올라타겠어? 물에 빠질지도 모르니까 네가 물에 뜨는 연습을 먼저 해야 하는데. 그렇게 몸을 곧게 세우고 바닥에 서 있으려고 하면 어떡해. 마루 바닥에 누워 있다 생각하고 다리를 펴고 몸을 바다 위로 눕혀봐. 내가 잡아줄게”

“파도가 이렇게 치는데 어떻게 누워?”

“내가 너의 허리와 목을 잡아 줄게. 그냥 몸에 힘을 쭉 빼고, 허리를 뒤로 눕히면서 다리를 들어봐.”  

사엘의 말에 여람이 천천히 머리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바닥에서 떼어 펴고는, 사엘의 말대로 바다 위에 누워 있는 것처럼 해 본다.

“잘하고 있어.  내가 너 허리랑 목 잡고 있어.”

사엘은 그의 허리에 대고 있는 손으로 허리를 긁고,  잡고 있는 다른 손으로  목을 꾹꾹 누르며 말을 잇는다. “내가 잡고 있는 게 느껴지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너의 몸을 느껴봐.”

여람은 햇볕에 눈이 부셔 반쯤 뜬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말한다.

“바다 위에서 보이는 하늘은 저렇네.”

“어떤데?”

“흔들려.”

여람의 말에 사엘이 웃음을 터트리고, 여람도 웃자, 그의 몸이 흔들리면서 물에 빠진다. 물에 빠진 그가 허욱적 거리며 일어서자 발이 바닥에 닿고, 물의 깊이도 허벅지 정도까지 밖에 오지 않는다.

여람은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한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네가 둥둥 떠서 파도에 밀려 여기까지 왔지.”

“그럼 너 나 놓고 있었던 거야?”

“응. 그런데 옆에는 있었잖아.”

“빠지면 어떡하라고.”

“바다는 파도 때문에 모래사장으로 밀려가게 되어있어. 네가 지금 누워서 둥둥 떠있기만 해도 이렇게 어느 정도 밀려오고, 혹시 물에 빠져도 일어서면 그 정도 깊이고, 또 바다 깊이 빠져도 아까처럼 몸에 힘을 빼고 있으면 몸이 둥둥 떠지니까 바다에 빠지지 않아. 그러니까  두려움을 없애고 그냥 파도를 느끼면 돼. 그래도 오늘 잘했어.”

사엘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여람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잘했다는 듯 툭툭 쳐주며 말한다. 그런 사엘의 모습이 여람의 눈에 그녀의 뒤로 빛이 비쳐주는 것처럼 환하게 보이며, 세상이 갑자기 정지되고, 밀려오던 파도가 멈추고는, 웃는 사엘의 얼굴만 느린 화면처럼 돌아가는데, 심장은 북으로 둥둥 쳐 대는 것 같고, 튀어나올 것도 같아, 한 손을 그의 가슴에 갖다 댄다.

“왜 그래?”

사엘은 가슴에 손을 대고 멍하게 서 있는 여람의 얼굴에 손을 휘저으며 다시 말을 잇는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사엘의 목소리에 그는 정신이 들면서, 느린 화면으로 돌아가던 그녀가 생생하고 선명하게 보인다.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그냥, 숨 좀 쉰 거야.”

여람은,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처럼 들릴까 봐,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려고, 숨을 내 쉬며, 천천히 말하지만, 여전히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진다.

“에이 놀랐잖아.” 사엘이 주먹으로 여람의 가슴을 가볍게 치자, 여람은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움찔한다.

사엘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한다. “나 그렇게 세게 안 쳤거든. 뭐냐 너?”

모래사장 중간쯤에 자리를 잡은 수아가 그들을 큰소리로 부른다. “밥 먹자.”

수아의 소리를 듣고 사엘이 말한다. “밥? 밥 이래. 안 그래도 배 고팠는데 잘 됐다. 빨리 가자.”

사엘이 앞서서 먼저 뛰어간다. 먼저 뛰어가던 그녀가, 여람을 뒤돌아 보며 웃으면서 오라는 손짓을 한다. 그녀의 모든 동작이 다시 느린 화면으로 돌아가며, 그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린다.

여람은  손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좌우로 한번 흔들고는 사엘을 따라 뛴다. 그가 뒤 따라 달려오자, 사엘은 더  빨리 뛴다.  더 빨리 뛰어가는 사엘의 뒷모습이 그의  눈에  다시 느린 동작으로 보인다.

여람은, ‘바다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봐, 모든 게 자꾸 느리게 돌아가네,  심장은 또 왜 이리 빨리 뛰고, 하기야 바다도 출렁이고 하늘도 출렁이고 그랬으니, 몸이 좀 힘든 거지. 그래, 내가  좀 힘든 거야.’ 라고 생각한다.


달려오는 사엘에게 수아가 소리친다. “천천히 와. 모래 다 날 리잖아. 음식에 모래 다 들어가겠네. 하여간 너는 여.”

수아가 여자애가 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해서 하던 말을 멈춘다.

뛰어오던 사엘이 모래 위에 넘어지며 말한다. “하여간 너는 뭐?”

“너는 왜 오다가 넘어지고 그러냐고. 하여간 이상한 인간이라고. 그걸 걸어오면 되지. 뭘 그렇게  뛰 고 넘어지고 모래까지 날리고.”

수아가 사엘에게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자, 사엘이 숨을 가쁘게 쉬며 말한다. “배고파서. 빨리 먹으려고 뛰어왔어. 그런데 무슨 밥이야? “

모닥불 위에는 꼬챙이에 꽂힌 음식들이 노릇하게 익어 가고 있다.

그것을 본 사엘이 말한다. “와. 이게 다 뭐야? 맛있어 보여. 이거 너네 둘이 다 한 거야?”

“야채랑 고기는 내가 썰어서  준비하고, 수아가 꼬챙이에 꽂았고.”

“뭐라고? 수아가 앉아서 이걸 꽂았다고”

수아는 사엘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그럼. 내가 해야지 누가 해. 이게 얼마나  정교한 작업인데. 순서도 맞아야지, 모양도 맞아야지, 게다가 망가지지  않게 가지런히 잘 꽂아야 모양도 흐트러지지 않게 이쁘게 만들어지지 않겠어? 이런 걸 내가 아니면 누가 하지?”

여람이 다가와 수아의 어깨를 잡는다. “하여간, 뭐든 과장하고 부풀리고, 생색내고.”

“과장 이라니? 부풀 리다니? 꼬챙이 음식에 대한 진실만을 말한 거지. 그리고 생색은 내야지. 너네들이 저기 바다에서 물장구치고 노는 동안 나랑 밧세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한 땀 한 땀 썰고, 꽂은 음식인데.”

“알았어. 잘했어. 그런데 우리 언제 먹어? “

밧세는 잘 구워진 꼬챙이를  집어 사엘에게 건네며 말한다. “역시. 우리 사엘은, 언제나 이 애들의 유치한 대화를

깔끔하게 정리한다니까. 자 먼저 먹어봐..”

사엘은 오늘 중 가장 환하고 기쁜 얼굴로 꼬챙이를 집는다. 모락모락 연기가 나며,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당근, 애호박, 감자와 떡 그리고 갈색으로 변한 소고기가 줄줄이 꽂혀 있는 것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사엘은 호호 불더니 맨 앞에 꽂힌 애 호박과 고기를 먼저 먹는다. “앗 뜨거워.”  

밧세가 물을 건네며 말한다. “천천히 먹어. 뜨거운데.”

사엘은 음식을 입안에 넣고 후후 하며, 오물오물 씹는다. “와 진짜 너무 맛있어. 너네도 얼른 먹어봐.”

밧세, 여람, 수아도 잘 익어 보이는 꼬챙이를 집어 호호 불며 맛을 본다.

여람이 말한다. “와. 진짜 맛있다. 양념도 했나 봐? 간이 딱 맞아.”

오늘의 주 요리사인 밧세는 그들의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본다. “고기만 마늘 다져서 재워 놨고, 구우면서 소금을 조금 더 뿌렸어.”

사엘은 두 번째 꼬챙이를 집어서 먹으며,  “진짜, 진짜 맛있어.”라고 말한다.


모두들 모닥불 가에 모여 앉아 정신없이 먹다 보니, 석양으로 물 들었던 바다가 어느새 해가 지면서,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수아가 사엘을 보자, 사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수아를 마주 보며 묻는다. “왜? 또 뭐 놀리려고 그러는 건데?”

“내가 뭘 놀리려고 그래. 우리 사엘이 많이 먹었나? 잘 먹었나? 궁금해서 본거지.”

놀릴 거 없나 보던 수아는 사엘이 눈치를 채자 멋쩍은 듯 웃으며 말을 돌린다.

이를 본 밧세가 여람을 보며 말한다. “여람아. 수아. 재  사엘이  좋아하는 거 같지 않아?”

“수아가 뭘 좋아해. 수아 재는 누굴 좋아하고 할 만큼 그렇게 생각이 있는 애는 아니야. 사엘이 놀리는 게 재밌는 거지.”

여람의 말에 수아가 어깨를 들썩이고 웃으며 말한다. “내가 뭘 놀려? 사엘이 좋아해서 그러는 건데.”

수아의 말에 사엘은 질겁을 하며 말한다. “으. 그냥 놀려. 그게 더 나은 거 같아.”

수아는 지파들의 소녀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많다. 휜칠한 키에, 잘 다듬어진 이목구비와, 귀티 나는 외모, 그리고 소녀들은 수아가 말수가 적으면서, 한 번씩 던지는 그의 차가운 말투와 도도한 시선을 이상하게 좋아한다.

사엘은 수아를 보며  말한다. “널 잘 모르고 멀리서 보는 애들이나, 좋아요. 그러지 거지. 사실 같이 있으면.”

사엘은 수아의 보이는 외모와 달리, 사실은 그는 엄청난 개구쟁이에 엉뚱한 행동을 일삼고, 말수가 적은 게 아니라, 엄청나게 수다쟁이이며, 잘난 척이 아주 심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녀가 하던 말을 멈추자, 수아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다. “같이 있으면? 더 좋다고?”

밧세와 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수아는 사엘을 보며 한술 더 떠 말한다. “넌 뭐 좋다는 표현을 그렇게 하냐.”

사엘도 수아의 저런 말과 행동이 처음은 아니지만, 들을 때마다, 고개가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어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수아는  옆에 앉은 밧세와 여람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뒤로 같이 눕는다.

사엘도 눕는다.

밤바다의 밤하늘이 별들로 반짝인다.

매일 만나도 좋고, 만나서 서로 놀려도 좋고, 우기거나 생색을 내도 좋다.

오늘은 배도 불러서 좋고,

밤바다의 파도소리도 들려서 좋고,

밤하늘의 별들이 아름다워서도 좋다.

그리고 함께 있어서 그냥 좋은 그들의 새로운 놀이 공간 리만투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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