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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Jang Sep 29. 2024

Chapter Five 새 만 남

여람이 바다에 빠졌던 날 이후, 사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리만투어에 왔었고, 지금도 이곳에 와서, 모래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늘 있던 곳이고, 쉼을 얻던 곳이고, 집만큼 편하던 곳이고, 혼자였던 것이 익숙했던 이곳이, 낯설고 처음인양 어색하다. 

어색하고 낯선 기분은 아마도, 외롭고 허전한 마음에서 온 것일 것이다. 


이곳에서 함께, 모래 위에 담요를 깔고 앉아 있거나, 책을 읽거나, 모래 놀이를 하거나, 바다 위에서 탈 나무 판을 만들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래도 즐거웠던 그들과 보낸 기억들이 생각나고, 그들의 소란스러운 말소리와 웃음소리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더 외롭게 느껴진다. 


에메랄드 빛의 리만투어 바다는, 햇볕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는 외로움도 잠시 잊을 만큼 아름답기만 하다.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을 본 사엘은, 익숙한 실루엣은 아니지만, 카야일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바다를 바라본다. 


조금 후, 낯선 음성이 들린다. 


“이제야 만나네.” 


사엘이 소리가 난 곳으로 얼굴을 돌려 보니, 방금 전 멀리서 걸어오던 이다. 

그런데 카야는 아니다. 

사엘이 물음인지 대답인지 알 수 없는 어조로 말한다. 


“네?” 


투명한 듯 하얀 얼굴에, 깊고 부드러워 보이는 눈과, 오뚝한 콧날, 살짝 곱슬 기가 있는 단발머리의 마르고 키가 큰 남자 사람이 서있다. 사엘과 또래로 보이지만 목소리와 태도가 좀 더 성숙해 보인다. 사엘은 그를 처음 보는 듯한데, 그는 이제야 만나네 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으며 말한다. 


“앉아도 되지?” 

“이미 앉아 놓고 뭘 물어봐? 세요?  그런데 누구? 누구세요? 아까 이제야 만나네 한 거 같은데, 날 알아요?” 


신비하게 매력적인 얼굴의 남자 사람이 사엘의 존대와 반말을 섞은 어색한 말에 웃음을 짓는다. 순수한 소년의 모습과, 남성적인 매력이 동시에 있으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하는  남자 사람이다. 사엘은 이런 얼굴과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남자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시선을 돌릴 수 없어 그를 빤히 쳐다본다. 


남자 사람이 말한다. 

“나는 라단이야. 넌 사엘이지? “


순간 사엘은 그녀의 이름까지 말하는 그에게 경계심이 생겨, 카야가 어디 있는지 주변을 둘러본다. 


그가  말을 잇는다. “경계할 필요 없어. 이곳 리만투어에서 널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 요 제사장님 댁 딸, 사엘. 그런데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만난 사람은 별로 없는. “

그의 말에 사엘은 조금, 경계심이 풀려 묻는다.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어요?”

“내 이름 들어 보지 않았어? 라단.”

“라단?” 

“응. 5지파.” 

“그럼 사울진 수장님의?”

“맞아.” 

“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본 사람은 별로 없는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요? “

“응. 그리고 내가 하나 더 아는 건, 우린 동갑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동갑이라는데,  말투며 목소리, 심지어 웃음까지도 차분하고 어른스럽다. 


빤히 쳐다보는 사엘에게 라단이 웃음을 멈추고 묻는다. “웃을 일이 아닌가?” 

“아니에요. 아. 아니다. 동갑이라고 했지. 웃을 일이야. 하하하.” 


사엘이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라단도 웃는다. 사엘은 그가 이쁘게, 매력적이게 잘 웃는, 남자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 


라단이 말한다. 

“나는 태어난 날이 지나, 열일곱 살이긴 해.”

“나도 겨울이 오면, 열일곱 살이야.” 


십 대 때는 한 살 두 살 많고 적은 게 뭐가 그리 중요한지, 그래도 나이를 콕 집어서 말한 것이 재미있는지, 서로 쳐다보다 갑자기 피식 웃는다. 


사엘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은채 묻는다. “그런데 왜 이제야 만났다고 한 거야? 날 만나야 할 일이 있었어?” 

“아니. 아니.  만나야 할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라단의 말에 웃음도 할 말도 어색해진 사엘은, “아. 그렇구나.”라고 말하고,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만나야 할 일은  없었는데,  같이 있어 보고는 싶었어.”

“응?”  

“뭐가?”  

“왜?” 


사엘은 이 대화는 뭐지라고 생각하고, 라단은 웃으며 말을 잇는다. “사람이랑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에겐 흔하지 않은 일이라 내가 좀 들떴나 봐. 그냥 다 즐겁네. 바다도 대화도 너도.” 

“나?”

“뭐가?” 

“응?” 


사엘은 그의 모습과 대화에 잠시 나간 정신을 되찾으려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고, 라단은 사엘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묻는다."그 애들은 안와?” 

“그 애들? 아. 수아랑, 밧세 여람이? 그런데 너 그 애들도 알아?” 

“아는 건 아니고,  너네들이 여기  같이 있는 걸 봤어. 뭘 같이 많이 하던데, 즐거워 보였어.” 

“그래?”

“응. 그런데 요즘은 너 다시 혼자 있더라.” 

“도대체 넌 나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 거야?”


사엘은 놀랍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눈이 동그래져 묻고, 라단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을 잇는다. 


“내가 열세살 때 처음 집 밖으로 나왔어. 그때 왔던 곳이 여기야. 이렇게 넓고, 푸른 곳은 처음 봤어. 여기 오면 가슴도 시원해지는 것 같더라. 혼자 있지만, 밀려오는 파도를 보거나,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심심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어느 날, 나처럼 혼자 있는 널 봤고, 네가 사엘이라는 건 좀 지난 후 알게 됐고. 그 뒤로 집을 나올 수 있는 날이면, 가끔 여기 와서, 혼자 앉아 있다가 가거나 혼자 앉아 있는 너를 보다가 가거나 했는데, 그렇게 보낸 시간이 3년이나 됐네.” 

“3년? 그런데 그동안 왜 한 번도 아는 척하지 않았어?” 

“그러고 싶었는데, 혹시 네가 불편 해 할까 봐. 그리고 그 애들이 오는 것을 보면서, 더 그러지 못했어."

“왜?”


라단은 잠시 침묵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한다. 


“글쎄. 나는 5지파라서. 아버지가 사울진이라서.” 


라단의 말에 사엘은 그런 이유 때문에 아는척 하지 못했다면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나도 그 애들도 우리는 누구 지파, 누구 자식 상관없이 모두 어울렸을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그녀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사엘도 혼자였었고, 지금 다시 혼자 있는 것은, 제사장 딸이기 때문에, 그들과 다시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난 딸, 불 꺼진 제단, 점점 그 존재가 사라져 가고 있는 신의 존재, 소문이지만 사실 같은 제사장 집안에 대한 벌과 저주, 그리고 그녀에게 일어나는 신비한 일들, 이 모든 상황들이 그녀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못하게 억누른다. 또한 지금까지, 지파와 제사장 집안은 함께 라며 가까 울 수도 있지만, 지파와는 다르다라고 구분해 왔기 때문에, 사엘도 그녀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다르다는 것이 장벽처럼 다가와, 그녀를 외롭게 가둬두는 것이다. 


사엘이 말한다. 


“나도 그래. 아버지가 제사장이라서. 내가 그 제사장의  딸이라서. ” 


라단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숨을 내쉰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라단이 사엘을 쳐다보며 말한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였어. 그런 너네들을 보는 것만도 즐겁더라.”

“그랬어?” 

“그런데 지금은, 네가 좀 외롭게 보여.” 


사엘은 속으로, 얘 뭐야? 내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잖아라고 생각한다. 

라단이 말을 잇는다.“그전에는 네가 혼자 있는 모습에서 그냥 혼자 있구나 했는데, 요 며칠은 혼자 있는 네가 외로워 보였어. 그래서 오늘은 나도 용기를 내서 말 걸어 본건데. 불편했어?” 

“아니야. 아니야. 불편하지 않아.”

“다행이다.”

“그런데.”  

“그런데?” 

“다른 애들하고는 너는 좀  다른 거 같아. 그러니까 사람은 모두 다르지만. 너는 뭐랄까.” 

“알아. 무슨 말하는지.”

“뭔데?” 

“내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서로 소통한 것보다 책으로 습득한 것들이 더 많아서, 사람하고 함께 있는 내 행동들이 자연스럽지 못해 보일 수도 있을 거야.” 

“그래? 난 그 반대로 생각했는데.”

“어떻게?” 

“너무 어른 스럽게, 여유 있어 보이고, 자연스럽고, 신비하고.”

“신비?” 

“아니, 아니. 그게 그런 단어가 아니라.” 


사엘은 신비하다는 뜻이 눈을 떼기 어렵고, 누군지 궁금할 만큼 매력적이다라고 생각한 것인데, 그것을 말로 내뱉어 당황스럽다. 


라단은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띠며 꽤 궁금하고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묻는다. “그런 단어가 아니면 뭘까?” 


미소를 짓는 라단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엘은 잠시 할 말도 잃고,  머리도 멍해지는 기분이다. 


라단이 다시 말을 잇는다. “그래서 뭔데?” 

“어? 아. 그게. 그러니까. 그냥 어른 사람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라단이 미소대신 소리를 내어 웃으며 말한다. 

”어른 사람?”


사엘은 라단과 이야기하는 것이 밧세, 여람, 특히 수아와 대화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라단의 말은 간단한데, 어렵다. 수아처럼, 너 뭐냐 하던 첫인사가 나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옆에 있는 남자 사람과 이야기하면 할수록 궁금하고 이 대화는 뭐지 하면서도 흥미 롭다. 


“응. 그냥 밧세나, 여람, 수아 하고는 많이 다른 거 같아서.” 

“다르겠지. 그들이 자라온 환경이나 배경이나 지위는 나랑 많이 다르니까.”

“그런 게 다르다는 게 아니고.”

“그럼 어떤 게 달라?”

“음. 그 애 들은 사람은 사람인데, 아직 덜 자란 사람이야. 아니 아직 안 자랐는지도 모르지.  늘 덜렁 대고, 별거 아닌 거 같고 맨날 티격 태격 하고, 여기 모래사장에서 뛰어다니면서 잡는다고 난리고, 잡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또 얼마나 말은 많고 시끄럽고 소란스러운지, 같이 있으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립구나” 


사엘은 자신의 마음을, 매번 읽기라도 한 듯 말하는 그가 놀라워,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응. 그런 거 같아.” 

“나도  그들처럼 너의 친구가 돼도 돼?” 


라단의 말에 사엘이 아무 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라단이 다시 묻는다. “내 말이 불편했어?” 

“친구 하잔 말을 뭐 그렇게 물어보고 그래. 그 애들은 나한테 친구 하자고 안 했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럼 우리도 친구인 건가? ”

“너네들?”

“응.”

“친구지. 넌 그렇게 생각 안 해?”

“친구라고 생각해. 그런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들이 그때처럼 먼저 다시 다가온다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사엘이 그들에게  다가가기에는  그래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너와 그들 그리고 나와도 다른 점 일거야.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데, 너나 나는 망설여지는 거.” 

“그런가?"


라단은  모래 위에 등을 대고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말한다.  


“너도 누워봐. 하늘이 예뻐.” 


그의 말에 사엘은 잠시 주춤하더니, 모래 위에 눕는다.   


잠시 후,  라단은 몸을 사엘 쪽으로 돌려 머리를 팔로 괴고 말한다. “오늘 너에게 다가와 말을 한건 잘한 거 같아. 친구 하자고 한 것도 잘한 거 같고. 좀 더 일찍 친구 하자고 할 걸 그랬어.” 


사엘은 그의 말에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라단 쪽으로 몸을 돌려, 머리를 팔로 괴고 그를 바라본다. 

 

라단은, “나는 앞으로 친구를 혼자 두게 하진 않을 거야.” 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한다.


그의 말이 사엘의 귀로 들어와 마음에 닿으니,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 든다. 


사엘은 생각한다.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으로 깊고 묘한 눈매를 가진, 자주 웃음을 지어 보이는 하얀 얼굴의 남자 사람. 오늘부터 친구라며, 말하는 이 남자 사람이 참 신비하다고. 처음 만난 날이지만 서로를 마주 볼 만큼 어딘가 서로 닮은 듯 편안하고 가까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라단은 생각한다. 

멀리서 바라봤을 때 보다 다가와서 본 그녀는,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지만, 뚜렷한 이목구비가 멋있게 아름다운, 긴 머리가 바닷바람에 나풀거리는 예쁜 모습에, 미소와 말씨가 따스하고, 편하고, 재미있다고. 처음으로 말을 하면서, 처음으로 만든 친구지만  그녀 곁에  언제까지나 함께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신기하면서, 설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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