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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Jang Sep 22. 2024

Chapter Four 하란, 그리고 후난

하란이 임신하고 있는 중, 요 제사장은 집안의 여자 하인인 헤로디의 딸 후난이라는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여자 아이를 겁탈했다. 신성하고 고귀해야 할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진 자이고, 한 여인의 남편이자, 아버지가 될 자는 추악한 일을 저질렀으나, 죄책감이나 죄의식 없이, 후난을 매일 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그녀의 몸을 탐닉하고 침범하며 강탈했다. 후난은 매일밤 짓밟히는 자신의 몸과 영혼에 괴로웠다. 그렇게 몇 달을 당하던 그녀는 이렇게 살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해, 오히려, 그가 그녀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유혹하고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교활해졌고, 대담해졌으며, 더 많은 욕심이 나기 시작했고, 강간당한 십 대, 여자 하녀가 아닌, 제사장의 부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엄마 헤로디를 시켜,  사람에게 해로운 독초를 구했고, 그것을 하란의 음식에  조금씩 탔다. 하란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아기도 산모도 곧 죽을 줄 알았는데,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고, 산모도 회복되어 가는 것이 이상하고 불안해, 그날 밤 후난은 요에게, 아기든 하란이든  그들을 돌보는데 돕고 싶다고 말했다. 요는 아무 생각 없이, 후난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어차피 그는  아내인 하란도, 딸로 태어난 아기도 관심이 없었다. 제사장 직분을 지켜 내는 것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고, 제사장 가문을 이을 아들도 있어야 하지만, 다음에, 하란을 통해서든, 다른 여인에게서 낳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제사장 가문에 대해 떠드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경전의 신을 찾을 용기도 엄두도 나지 않는다. 제사장 가문은, 제단의 불이 사라지고, 사람들도 경전의 신을 찾지 않으면서  이미 몰락하고 퇴색해 가고 있는데, 왜 이런 일들이 그의 세대에 와서 더 심해지고 심각 해지는지, 선조들도 경전의 신도 원망스러울 뿐이다. 요에게 이런 마음들이 있으니, 그의 분노는 점점 더 난폭해지고, 술과 여자로 화를 풀고 있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하란의 방을 방문한 후난의 모습이 꽤나 당당하고 거침이 없어 보인다. 

하란은 아침 식사를 마친 때였다. 

카야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후난을 막아서자, 그녀는  카야를 노려보며 말한다.  “일개 호위 무사가, 제사장님을 모시는 사람 앞을 막아서는 거야?” 

“나는 제사장님 댁의 가족 그리고 특별히 하란님의 안전을 임명받은 일개도 무사도 아닌, 호위 대장이자 이 집안의 병사 통솔권자야. 이 집에 제사장님을 모시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호위로 모시던 식사로 모시던 몸으로 모시던 모시는 사람과 직계 가족은 엄연히 다르지. 그러니 제사장님 외에 누구든 하란님을  방문하는 사람에게서 이 분을  지키는 것이 내 일이 아니겠어. 그러니 내가 막아서는 게 당연하지 않아?” 

하란은 카야가 경전을 읽을 때 빼고 저렇게 말을 길게 하고, 게다가 말투는 어찌나, 차갑고, 불량스러운지 그의 말투가 후난이 찾아온 것만큼이나 놀랍다. 


남편이 육체적으로 겁탈한, 여자 아이, 저 여자아이의 정신과 마음까지도 무너져 버렸을 그녀가  하란은 안쓰럽고 불쌍하다. 요에게 그렇게 당하지 않았다면, 저 아이의 뒤에 숨겨진 모습대로, 어여쁘게 밝게 자라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10대 후반인  그녀의 얼굴과 몸과, 말씨와 눈빛은 고통과 처절함을 담은, 10년은 더 성숙해 보이는 모습이다. 하란은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생각이 많이 들지만, 갑자기 찾아온 그녀와 대화를 하는 것도 그렇고,  반갑게 맞이할 수도 없어,  “아기도 아직 어리고, 외부인에게 방문해도 좋다고 허락한 적 없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고 다음에 다시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자, 후난은, 그녀의 말에 아랑곳없이, 하란의 앞에 앉으며, 한껏 더  상냥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란님. 몸은 좀 어떠세요? 그동안 제가 마음만 쓰다가, 오늘 이렇게 찾아뵈었네요.”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란은 더 할 말도 없고, 그렇다고 그만 가보라고 말하기도 그래, 가만히 후난을 바라보자, 후난이 말한다. 

“사실은 저도 하란님을 돌봐드리고 싶어 왔어요. 제가 제 어머니 따라 부얶에서 일을 해서, 음식도 제법 잘하고, 손도 야무져요. 하녀보다는 그래도 가족 같은 제가 돌봐드리는 게 더 낫지 않으시겠어요?” 

그녀의 말에 하란은 난감하지만, 차분한 어조로, “이제는  하녀도 아니시고,  제사장님을 모시는 분이신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도와줄 이가  더 필요하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다른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만 돌아가 주면 좋겠어요. 좀 쉬어야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카야를 보자, 그는 후난에게 다가와 나가라는 고갯짓을 한다.  

후난은 하란의 짧고 간결하며,  차분하고, 분명한 어조와 행동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하란은 천박하고, 폭력적이고, 뭐든 기분 내키는 대로 제 멋대로인 제사장과는 다르다. 게다가 후난이 사람들한테 들었던 것과 달리, 그녀는 가녀리고 연약한 여인이 아니다. 오히려 강하고, 게다가 기품까지 있는 데가,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까지 있다. 또한 후난이  제사장과 한 이불을 쓴다고는 하나, 그녀는 아무런 직분도 없고, 집안사람들은, 그녀가 어떻게 요 제사장과 그런 관계가 되었는지 알면서도, 그녀를 몸이나 함부로 굴리는 천박한 하녀로 취급한다. 하란도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할 수도 있다. 이 자리에서 그녀를 가두거나, 할 수 있다면 죽일 수도 있는, 그런 힘이 있는 제사장의 부인이다. 하지만, 하란은 후난을 존중하는 말과 모습으로 대한다.  

후난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더 이상 그녀의  방에 머물 수 없어,  다소 경직된 목소리로,  “네. 하란님. 갑자기 찾아와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황급히 방을 나간다.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후난을 카야가 뒤따라 나가 그녀의 어깨를 잡자, 후난이 놀라 뒤를 보며 말한다. “뭐 하는 짓이야? 누구 몸에 손을 대는 거야?” 

“손을 댄 게 아니라 잡은 건대?” 

“그러니까 왜 잡냐고?”

“수작 부르지 마.” 

“수작? 수작은 네가 하는 거 같은데?” 

카야는 윗옷 주머니에서 무언가 들어 있는 듯한 작은 헝겊 꾸러미를 꺼내 보여 주며 말한다.  

“이게  뭔지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 

“하란님이 임신하시고 얼마 후, 몸이 안 좋아 지시더군. 사람들이 그랬어. 임신했으니까. 배가 불러오니까. 그런데 임신으로 그러기엔 증상이  지나치게 안 좋으셨어.  그리고, 그때 너의 존재를 이 집 사람들은  몰랐지만 나는 알았지.”

“그래서 뭐? 내 존재를 알아서 뭐?”

“이 집 사람들은 모를 때, 나는  어떻게 알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제사장님 주변에 사람이라도 심어 났나 보지?”

“아니. 제사장님이 나에게만 은밀히 알려 주셨지. 혹시 문제가 생기면 뒤처리하라고.”

“뒤처리?” 

카야가 섬뜻하면서, 경멸에 찬 눈으로 말한다.

“그럼 너는 제사장님이 이번이 처음일 거라 생각하는 거야?” 

“뭐가?”  

“몇 달 후, 대부분 이 집에서 쫓겨났어. 너도 알겠지만, 제사장님이 싫증을 좀 잘 내시거든. 그 뒤처리를 아무도 모르게 지금까지 내가 했고.” 

“뭐? 뒤처리? 제사장님은 나한테는 달라. 그리고 나도 남들과 다르고. 나는 이전 사람들처럼  그렇게 쫓겨 나가지 않아.” 

“다들 그랬어. 제사장님은 나한테는 다르다. 그런데, 너한테 만은 다르든 말든, 그건 내 알바 아니고, 나야, 처리하라 하시면 처리하면 되니까. 그런데, 하란님 주변에서 그분을 해하려고 하면,  넌 쫓겨 나는 정도로는 안 끝나. 또 한 번만 이딴 짓 해봐. 약초는 5지파에 가서 구했던데? 그 약초를 판 인간은 다시 만나 봤어?” 

“내가 누굴 만나고? 뭘 구했다고 그래?”

“그 인간 다시 못 봤지?”

카야는 후난에게 바짝 다가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눈을 무섭게 응시하고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엷게 지으며 말을 잇는다. “내가 죽여 버렸거든.”

후난이 겁을 먹은 듯 한 발짝 뒤로 물러 서며 말한다. 

“나는 몰라. 모른다는데 왜 이래?”

“하란님이 왜 여태 살아 계실까 궁금해서 온 거지?”

후난은 “뭐라는 거야.”라고 다소 경직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가려 하자, 카야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 잡고, 노려 보며  말한다. 

“하란님께서 네가 넣은 독초를 보름이나 드셨어. 내가 더 빨리 알아챘어야 하는데. 해독제를 구했고, 그것을  드시라고 했지만, 해독제가 아이에게 해가 될까 염려가 되셔서, 그것조차도 안 드시고, 지금까지 스스로 버티신 거야” 

후난의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카야의 움켜쥔 팔을 뿌리치며 말한다. 

“그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고 했잖아.”

“너는 몰라도, 나는 알고, 하란님도 아셔. 하란님도 무사하시고, 아기님도 건강하게 태어 나신걸 다행으로 생각해. “

후난의 표정이 갑자기 변하더니, 입가에 미소까지 지으며, 말한다. 

“카야 대장님. 이야기는 그럴듯한데, 재미는 없네요. 누가 감히 하란님을 해하려 하겠어요?” 

“네. 누구든 그분을 해하려고 하면, 그 약방 주인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거예요”

후난이 소리 내어 웃으며, “죽여? 누굴?  나를? 네가  뭔데 나를 협박하는 거야? 나는 제사장님 사람이야. 왜 하란님께서, 요 제사장님 날 이뻐하시니 질투 라도 하셔서 가만두지 말래?”  

카야는 더 크게 소리를 내며, 한참을 웃는다.  그의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져, 후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에 웃음기까지 사라진채 서 있는다. 

“난 내가 모시는 분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할 수 있어. 너 하나쯤 죽이는 건 나한텐 일도 아니야.”  

“내가 당한 이  억울함과 모욕을 제사장님이  아시면 그쪽도 그리 무사 하진 못할 거 같은데.”

“내가 무사 하든 안 하든, 네가 내 말을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발뺌을 하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한 번만 더 하란님 주변에서 얼쩡되면, 내가 이 독초로 뭘 할거 같아?” 

“나 한 테라도 먹이게?” 

카야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후난을 노려 보며 말한다. 

“아니. 의심 많은 제사장님께 말해야지. 네가 제사장님을 해 하려고 이 독초를 구한 걸 알아냈다고. 그리고 나는 내가 약방 주인을 죽이기 전 네가 이 약초를 사 갔다는 사실이 쓰인 증거를 제사장님께 드릴 거야. 벌써 한 달이나 이 독초를 드셨다고. 그럼 나는 해독제를 구해다 드리겠지. 그 다음에 제사장님이 어떻게 하실 것 같아? 아. 그럼 너는 사실은 이 독초는  제사장님 이 아니라, 하란님에게 먹이려고 구한 거라고 할 거야?  아니면 지금처럼 몰라요 하면서  발뺌할 거야? 제사장님이 누구 말을 믿을 것 같아? 너의 말? 아니면 나의 말? 그런데 그분은 누구의  말도 안 믿으셔.  그냥 널 처리하라고  하시겠지. 어차피 너 같은 애는 차고 넘치니까. 그럼 나는 널 다른 이전의 이들처럼 처리하면 되는 거고.”

“요즘 칼 대신, 글이라도 써? 지어낸 이야기가 그럴듯한데, 재미는 없네.”

카야는 후난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가서 제사장님께 말해. 하란님께서 회복이 많이 되셔서  돌봐드릴 것이 없다고. 그리고 넌 그냥  네 방에서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지내. 여긴 네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러니 이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마. 나는 눈이 많아. 귀도 많고, 성질까지 아주 지랄 맞거든.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는 날에는 무엇으로든 엮어서, 널 없애 버릴 거야. 내가 그동안 그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말해 줄까? 너는 더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려고 이미 다 생각해 놨는데. 그러니 잘 알아듣고, 가만히 있으라고.” 

후난은 카야의 말고 행동에 두려움이 들지만, 대신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뭐 이러면 겁이라도 먹고, 그쪽이 하라는 대로  할거 같아?” 라고 말하자, 카야는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그의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한다.  

“하고 안 하고는 너 맘이지. 중요한 건, 네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는 거야.”

후난은 카야를 한번더 노려 보고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가자, 카야는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친다. 

“다음번에 말로 안해. 칼이 먼저 나갈 줄 알아.”

카야의 말에 후난은 발걸음을 더 빨리 움직이며, 마당을 빠져나간다. 


후난이 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카야는, 하란의 방의 주변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병사들까지 둘러본뒤, 거의 저녁이 되어서야, 서둘러 하란의 방으로 향한다.  

마침 하디가 하란의 방에서 나오며, 카야에게 다가와 말한다. 

”어디 갔다 이제 오세요? 하란님이  많이 찾으셨는데.” 

카야가 방으로 황급히 들어 가려 하자, 그녀가 “들어가지 마세요. “라고 말한다. 

카야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하디를 보자, “찾으셨지만, 지금은 하란님과 아기님 모두 다 잠드셨어요.”

카야는 “아” 하며 깊은 한숨을 내 쉰다. 

“하란님께서 오늘 못 읽어주신 경전은 내일 아침 일찍 오셔서 벌이라며, 몇 배로 읽으시라고 전하셨어요.”

하디의 말에 카야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하디는 그런 카야를 보고, “하란님께서 벌이라고 하셨는데? 어느 부분에서 미소를 지으시는 거예요?

라고 묻자, 카야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벌 받아야지. 그럼 받아야지. 벌이니까  잘 받아야지. 내일 아침 일찍 와서.” 라고 말하며, 웃는다.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 카야를 보고, 하디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오셔서,  벌 잘 받으시고요. 전 말씀을 전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디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자 카야는 하란의 방문을 보고 서서는 경전의 신에게 기도 한다. 

“엄마와 아기에게 오늘도 평안한 밤이 되도록 지켜 주세요.”

카야는 잠시 더 방문 앞에 머물러 서 있는다.  

그녀와 그녀의 아기를 위해 해주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지만, 그 둘이 오늘 평안하게 잘 보내고, 잠들었다는 말을 들으니,  이들의 방문 앞에 서 있는 것만도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하다. 

늘 오늘 같기를 또 기도 한다. 


사엘의 머리도 가다듬어 주고, 콧물과 눈물도 닦아주는 카야를 보며 사엘이 말한다. 

“나 이제 괜찮아.”

“압니다.”

“뭐야? 이 건조한 대답은?” 

카야가 사엘의 얼굴을 바라본다. 

하란의 눈을 그대로 닮은 사엘의 눈이다. 카야의 마음에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인다. 

사엘이 파도에 발을 담근다. 

카야는 하란의 배가 불렀을 때 바닷가에 와서 발을 담그던 그녀가 떠오른다.  배를 만져 보라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울리는 듯하다. 그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어느덧 열여섯 살이 되었다. 사엘이 커가는 것을 보는 것은 카야에게 기쁨인 반면, 늘 심장이 터질듯한 걱정과, 마비될 정도의 두려움이다. 

카야는 사엘 만은 지켜내야 한다고, 매 순간 다짐한다. 

그것이 하란에 대한 사랑이고, 약속의 증표이다.  

사엘이 며칠씩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 때면 카야도 그녀의 방문 앞에서 꼼작 않고 지키고 서서 경전의 신에게 기도 한다. 

“사엘을 지켜 주세요.” 


사엘이 바다에 발을 담그고 첨벙첨벙 걷는다. 그 뒤를 카야가 뒤 따라 걷는다. 파도가 성난 듯 멀리서 여러 겹으로 밀려온다. 

회색빛 하늘과 바다이다. 

사엘이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바닷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 가려 하자, 카야가 사엘의 팔을 잡는다. 사엘이 뒤돌아 카야를 보며 미소와 함께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카야는 사엘이 걱정되지만, 그녀의 팔을 놓는다. 

사엘은 그녀의 허리가 잠길 만큼 걸어 들어간다.

높이 치솟은 파도가 거칠게 밀려오다가 사엘 앞에서 잔잔하게 부서진다.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오자 그녀는 오른쪽 팔을 들어  올린다.  밀려오는 파도가 사엘의 팔 앞에서 다시 잔잔해지며,  분수처럼 위로 솟구쳐 사엘의 손에 닿자, 그녀는  손을 좌우로 넓게 천천히 휘젓는다. 마치  파도를 쓰다듬는 것처럼 보인다. 

성나게 밀려오던 파도가 점점 잔잔해진다. 허리까지 반쯤 잠겨 있던 사엘이 미끄러지듯이 걷자, 파도도

같이 일렁이면서 물방울을 튕긴다.  그녀는 마치 물방울 속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사엘을 바라보던 카야에게, 그의 귓속에 남긴 하란의 마지막 말이 생각난다. 

“사엘이는, 제사장으로 지음 받은 아이야.  제단에 불을 밝히고, 새 제단을 쌓고, 경전의 신과 이 땅을 회복시킬 거야. 제사장의 의무와 소명을 새롭게 할 거야. 그 아이  주변에 놀랍고 신비한 일들이 일어나겠지만,  이 아이가 자신의 부르심을 스스로 알 때까지 어느 누구도 이 아이의 부르심에 대해 먼저 알아서는 안돼.  제사장까지도. 그러니 카야.  사엘을 꼭 지켜줘. 꼭 지켜줘야 해. 이 아이가 경전의 신의 부르심과 소명을 잘 감당해 낼 수 있도록 꼭 지켜줘.”

카야는 하란이  자신의 손을 꼭 쥐었던 감촉과 그 간절함을 지금까지도 그의 온몸과 마음을 다해  기억한다. 

하란이 눈을 감자, 카야는  그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했다. 

“하란님, 사엘 님은 반드시  제 목숨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증표이고, 내 평생 당신을 위한 고백이 될 것입니다. “

그녀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카야가 코에 손을 대보니 더 이상 숨바람이 나오지 않았고, 그의 귀를 그녀의 가슴에 대어 보니, 그녀의 심장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카야는 하란의 몸을 끌어안았다. 매일매일 안아 주며 따듯하게 해 주고  싶었던 그녀의  작고 가냘픈 어깨이다. 그녀의 몸이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이 그의 심장에 전해져 왔고, 그녀를 위해 뛰던  그의 심장도 점점 멎어 갔다. 

그가 끌어안고 있어도,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몸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은 날, 카야는 하란이 원하는 대로 그녀를 화장해, 리만투어에 날려 주었다. 

산들산들 수양버들 같던 그녀가 하얀 가루가 되어 바다 위에 흩날려 가는 것을 카야는 지켜보았다. 


그 뒤로, 그의 심장은 차갑게 얼음처럼 얼어 더 이상 뛰지 않았다. 미친 듯이 무예를 연마하고,  사람들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 이미 제사장의 군 통솔권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사엘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병사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사장 병사 외에도, 사병, 정예무사, 위장 무사 할 것 없이  모으고 훈련시키는데 집중했다. 제사장도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뒷전이고, 후난에게 빠져 점점 더 미쳐 가고 있었다.  하디와 유모손에서 자라 가는 사엘을 볼 때, 그의 심장이 한 번씩 뛰었다. 사엘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 하란을 향한 그의 평생의 약속의 증표이자, 사랑의 고백이고, 그를 숨 쉬게 한다. 


사엘을 보던 카야는 재빨리 주변을 살피자,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 누구라도 있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날 함께 있었던 여람, 수아, 밧세 모두 죽여야 하는데, 사엘이 그들과 함께 하는 동안, 그렇게 행복해하고 환하게 웃으며 지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의 행복함까지 없애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그 셋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사엘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회색이던 바다도 에메랄드 색을 띠기 시작하고, 하늘에 짙게 깔렸던, 회색 먹구름도 걷히며, 지는 해가 보인다. 

사엘이 노을빛을 받으며, 물에서 나온다. 

카야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벋어 사엘에게 덮어 주자, 그녀가  카야를 보며 말한다. “배고파.” 

“네. 알겠습니다. 오늘 들은 말 중 제일 좋네요.” 


카야가 사엘을 말에 태우고 서둘러 집으로 달린다. 집에 들어 서자, 하디가 이미 저녁 식사 준비를 해 놓았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사엘이 식탁에 앉으며,  말한다. “같이 먹자.” 

하디가 말한다.  “아닙니다. 저희 같은 하인들이 사엘 님과 함께 식탁에 앉습니까. 규범과 법도에 어긋납니다.” 

사엘이 말한다. “그건 하인들과의 사이에나 있는 규범이고 법도지.  사실 이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식탁이란 누구든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자리인데 말이지.  아무튼, 하디, 유모,  카야는  내 가족이잖아. 가족끼리는 같이 밥 먹는 거 아니야? 이제부터 저녁은 다 같이 먹어. 그게 내가 만든 우리 가족의 규칙이야. 빨리, 빨리  음식 더 가져와서 같이 먹자. 나 배고파서 쓰러지겠어.”

하디가 부얶으로 향하며 말한다. “알겠습니다. 또 쓰러 지시면 안 되죠.” 

유모와 하디가 부리나케 세명분의 음식을 더 가져와 상에 차린다. 

셋이 자리에 앉자 사엘이 기도 한다. 

“이 자리에 앉은 우리 모두와, 차려진 음식을  축복해 주세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잠시 이들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식탁 위의 밥과 국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함께 둘러앉은 이 들 네 명의 가슴이 뭉클해진다. 

사엘이 침묵을 깨고, 후루룩 소리를 내며 국을 떠먹으며 말한다. “아. 맛있어. 역시 유모가 끓여 주는 국이 제일 맛있어.” 

하디가 말한다. “그거 제가 끓였는대요.” 

사엘이 말한다. “아 그래? 누가 끓인 게 뭐가 중요해. 너무 맛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유모가 반찬을 집어 사엘의 수저에 얹어 주며 말한다. “우리 사엘 님은 뭐든 맛있게 드셔서  이뻐요.” 

사엘도 반찬을 집어 하디, 카야, 유모의 밥 위에 얹어 주며 말한다. 

“다들 많이들 먹어. 나 쓰러져 있을 동안 밥도 안 먹었지?  다들 똑 같이 말라 가지고. 다음엔 먹으면서 기다리고 걱정해.” 

그들의 식탁 위에 음식만큼,  웃음도,  이야기도, 마음도 풍성하다.  

카야는이들을 둘러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하란님. 사엘 님은 이번 일도  잘 이겨 내시고, 저렇게 웃으면서 맛있게 식사를 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가족이라 부르며, 식탁으로 불러 모으셨어요. 제가 이 아이로 인해 또 숨을 쉽니다. 기특하시죠? 보고 계시죠?  나는 여전히  당신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늘 언제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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