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아직 트지 않을 무렵, 유모와 하디는 사엘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려 주고, 그녀가 입은 검은색 윗옷과, 통이 넓은 긴바지의 매무새를 한번 더
가지런히 정리해 준다.
유모와 하디는 걱정이 되어, 사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또 그렇다고 그들이 딱히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도 몰라 조용히 방을 오가며, 사엘의 주변을 챙긴다. 사엘도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지만, 서로들의 마음을 안다는 듯, 바라보며, 눈빛에 하고
싶은 말을 담아 본다.
유모가 곱게 접힌 예복을 들고 와 카야에게 전달하고, 사엘은 카야와 함께 신전으로 향한다.
신전의 문 앞에 선 사엘이 카야에게 말한다.
“아침이 되면, 아버지에게 가서 알려. 내가 여기
있다고. 아버지와 후난이 들어오시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제가 안에 같이 있겠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사엘이 카야를 돌아 보며 말한다.
“걱정 마.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말한 대로
하면 돼.”
사엘의 모습에 부르심을 받은 자의 모습으로 위엄과 강인함이 묻어난다.
카야는 알았다는 의미로 정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고 있는 얇고 보드라운 소재로 만들어진 검은색
예복을 펼친다.
어깨 부분이 풍성하게 부풀어 있다가 팔목에서
좁아지는 형태에 양팔 옆 소매에는 하늘과 바다, 땅을
나타내는 세 개의 금색의 띠가 둘러져 있다. 금색은
제단의 불의 의미인 빛을 나타낸다. 목부분은 둥근
곡선으로 되어 있고, 가슴부터 넓고 길게 발목까지
늘어져 있는 모양의 예복이다. 사엘이 양팔을 넣어
걸치자 카야는 앞부분에 포도 만한 크기의 금색 단추
세 개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여미어 준다. 앞부분의 아래 부분은 걸어갈 수 있도록 트임이 있고, 뒷부분은
앞부분보다 좀 더 넓고 길게 바닥으로 늘어진 모양의 예복이다.
그동안 제사장들의 예복도 세월이 흐르면서, 그 시대에 맞게, 색이나 모양도 많이 변화되었지만, 사엘은
처음 지파가 생기고, 지파의 수장이자, 제사장이었던
하라셀님이 입으셨던 모양 그대로의 예복을 재현하고
싶어서, 경전에서 읽은 대로, 옷의 모양을 상상하며,
하디와 유모와 함께 이 예복을 만들었다.
카야는 무겁고 둔탁한 신전의 문을 밀어서 연다.
사엘이 안으로 걸어 들어 가자, 예복의 뒷부분이
바람에 날리듯 나풀거린다. 걸어가는 사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카야는 늘 그렇듯 경전의 신에게 기도한다.
‘경전의 신이여. 늘 그러하셨듯 이 아이를 지켜주세요.’
신전은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아, 눅눅한 나무 냄새와
먼지 냄새로 가득하다. 그리 넓지 않은 정사각형으로
된 진한 갈색의 마루 바닥과, 문을 연 정면에 제단이
마주 보인다. 마루보다 좀 더 밝은 갈색의 양 옆 벽에
는 한쪽에 여섯 개씩, 길쭉한 잔 모양의 등잔이 걸려
있다. 천장에는 어른 남자 손 두 뼘 정도의 둥근 모양의
등잔 세 개가 길게 매달려 있다. 천장을 중심으로
양 옆 지붕이 비스듬한 형태로 내려와 양 옆의 벽과
맞닿아 있다. 사엘이 두어 발걸음 옮기니, 나무로 만들
어진, 둘레가 공만 한 크기의 사엘의 허리까지 오는
길쭉한 것이 놓여 있다. 윗부분이 움푹 파여 있어,
무엇을 담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르지 않는
물이 항상 차 있었던 물두멍이라는 것이다. 신전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손을 정결히 할 때 쓰였던 것이다.
제단의 불이 사라지면서, 물도 말라 버렸다.
사엘이 말라버린 물두멍 안에 두 손을 넣자, 잠시 후
물두멍 안에사 물방울들이 튀어 오른다. 사엘은 허공
으로 튀어 오른 물방울들을 연기를 만지듯 손을 움직
인다. 그러자, 그동안 말랐있던, 물두멍에 물이 차
오른다.
한참을 물두멍 앞에 서서, 그녀의 손과 마음을 정결한
상태로 만든 그녀는 천천히 제단 앞으로 걸어간다.
나무 바닥에서, 나무끼리 부딪치며 삐걱 거리는
소리가, 음악 소리처럼 신전안에 울려 퍼진다.
제단 앞 바로 위 부분의 천장은 가로 세로가 45센티
정도 되는 정사각형의 유리 창문으로 되어 있다.
사엘이 유리 천장 아래에 선다. 거기서부터 짧은 두
걸음 정도 되는 앞에, 한 층의 높이가 20센티, 가로
세로가 1 미터 되는 나무 판 위에, 그 위에 그보다 조금더 작은 한층,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작은 한 층으로
된 총높이가 60센티 되는 삼층으로 쌓인 제단이 있다.
맨 위에 나무 재질의 반지름 30센티, 높이가 45센티
되는 커다란 그릇이 놓여 있다.
경전의 신의 불이 머무는 곳 이다.
제단 뒤 벽은 나무벽인데, 칼집을 낸 듯 얇고 길게
촘촘히 파여 있어 마치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사엘이 제단 앞,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감는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사엘은 천천히 입을 열며 말한다.
“당신의 부르심을 받은 자, 당신 앞에 나옵니디.“
나무 그릇 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음성이 들린다.
“내가 너를 지명하고 불렀나니.”
“당신의 부르심을 받은 자, 당신 앞에 나와와 당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의 음성이, 너의 음성에 머무르리라.”
“당신의 부르심을 받은 자, 당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두려워 마라. 담대 하라. 내가 지명하고 부른 자,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연기가 사라진다.
사엘은 그대로 앉아 있는다.
동이 트면서, 천장의 유리창으로 아침 햇살이 비쳐
들자,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깜깜한 제단의 방안에 사엘만이 빛을 받아 빛나
보인다.
두 명의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들어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요 제사장과 후난이 신전 안 으로 들어오자 끼익 소리를 내며 신전의 문이 닫힌다.
요가 사엘을 향해 분이 난 목소리로 소리친다.
“여기서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제사장도 없이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이냐 말이다. 당장 역기서
나가지 못해?”
요의 말에 후난도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한다.
“제사장님. 사엘이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혹시 쟤도
저주를 받은거 아니예요? 어떻게든 뭐라도 해보세요.
이제 이 집안에 아드님도 곧 태어나실 텐데, 너무 끔찍
하고 무서워요.”
사엘이 제단 쪽 에서 천천히 몸을 돌려 후난과 요를
향해 선다.
양팔에 붙어 있는 금색의 띠가 빛을 받아 반짝여 눈이 부셔 쳐다볼 수 없다. 요와 후난이 손으로 눈을 가린다.
사엘은 천천히 그들 앞으로 걸어간다. 요와 후난이
손을 내리고 사엘을 쳐다본다. 사엘만이 빛 속에 있는
듯 환하게 보인다.
요가 사엘을 향해 손가락 질을 하며 말한다.
“여기서 뭐 하는 짓이냐 물었다. 그리고, 그 옷은 뭐야?
니 멋대로 만들어 입고 제사장 흉내라도 내겠다는
것이냐? 하다 하다 네가 이젠 별 짓을 다 하는구나.”
사엘이 천천히 입을 연다.
“아버지. 여기서 다시 경전의 신을 위한 의식을 드릴
것입니다. 제단의 불이 돌아올 거예요.”
“어이가 없구나. 의식? 제단의 불? 누가?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다든?”
“경전의 신에게 부르심을 받은 자, 지음 받은 자,
제단에 불을 밝히고 경전의 신을 위한 의식을 드릴
것입니다.”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미쳤어. 미칠 거면 차라리
니 어미처럼 죽어라. 이 집안에 저주와 재앙을 가져
오지 말고.”
“그래서 내 어머니도 그렇게, 미쳤다며, 저주를 받았
다며 죽이셨습니까?”
“누가 죽여? 니 어미가 미쳐서 그런 거지.”
순간 사엘의 얼굴에 하란의 얼굴이 겹쳐지며, 그녀가
울부짖으며 말한다. “제발 살려 주세요. 아무것도
안 할게요. 하녀도 좋고, 유모도 좋아요. 제발, 제발
사엘이만 키울 수 있게 해주세요."
요가 놀라 뒤로 물러 서며 말한다.
“뭐야? 당신이 거기 왜?”
다시 사엘의 얼굴이 보이며, 그녀가 말한다. “살려
달라 울부짖는 제 어머니를 그렇게 죽이 셨어야 했어요? 아무것도 안 할 테니, 저만 키우게 해 달라고 하셨잖아요?”
“네 엄마는 저주를 받았어? 저주받은 이를 어떻게
집안에 두느냐? 저주받은 이가 자식을 어떻게 키워?”
요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하자, 사엘의 얼굴에 새파랗게 서늘이 선 하란의 얼굴이 다시 겹쳐지며,
울부 짓는다.
“저주요? 무슨 저주요? 아이를 다시 낳지 못한다는
저주요? 아니에요. 전 그런 저주를 받지 않았어요.
그러니, 제발 제 아기만은 제가 키울 수 있게 해 주세
요. 어린 저 아이를 놔두고 이렇게 죽을 순 없어요.
그럼 사엘이랑 이 집을 나가서 살게요. 멀리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조용히 살게요. 그러니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사엘이 말한다. “살려달라, 아기만 키우게 해 달라,
멀리 가서 조용히 살겠다며 울부짖는 내 엄마의 통곡
소리가 들리세요? 어린 자식을 놔두고 억울하게
죽어야 하는, 내 엄마의 비통한 소리가 들리세요?
내 어머니는 저주받지 않았어요. 당신은 내 어머니,
당신의 부인을 죽인 거예요. 왜요? 왜 그러셨어요?”
예배당 안에 하라난의 울음소리, 사엘이 요를 향해
외치는 소리로 가득하자, 요가 고통스러워하며, 귀를 틀어막고 한걸음 더 뒤로 물러 서며 외친다.
“내가 죽이지 않았어. 내가 죽이지 않았다고. 하란이 저주를 받아서 그런 거야.”
울음소리가 멈춘다.
사엘이 싸늘한 얼굴로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무슨 저주인가요? 무슨 저주이길래, 내 어머니가
죽임까지 당하셔야 했나요?”
“네 엄마는 자식을 더 이상 낳지 못한다 했어. 그리고
그 씨에 저주가 있어서, 네 엄마의 저주가 이 집안의
대를 끊는다고 했어. 그래서 집안을 위해 죽은 거 뿐이야. 저주를 끊고 이 집안의 대를 이를 제사장이 나오면
네 엄마가 가문을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 저주는 당신이 받은 거겠지?”
사엘의 음성이 예배당 안에 메아리처럼 울린다.
“뭐라고?”
“내 엄마가 아니라, 경전의 신이 당신의 씨를 끊으신거야. 경전의 신을 위한 의식을 멈춘 자, 제단을 더럽힌 자, 제사장의 직분으로 추악한 짓을 저지른 자. 당신도
경전에서 읽었을 거야. 제사장이 저지른 죄는,
일반 인이 저지른 죄와 다르게 그 형벌이 더 무거울 것이다. 당신의 씨는 내 어머니가 나를 잉태한 이후로
끊어졌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디서 뭘 읽고서 그러는
게지? 네가 미친 게 틀림없구나. 그러면 후난이 지금까지 임신한 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후난이 배를 잡고 말한다.
“무슨 헛소리를 해 대는 거야? 내가 비록 너를 낳은
어미가 아니라도, 엄연히 제사장님의 부인이고, 다음 대를 이를 아들을 잉태한 여인이거늘 어디서 감히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사엘이 후난을 보며 다가간다.
사엘의 얼굴에 하란의 얼굴이 겹쳐진다.
“나는 너를 불쌍히 여겼어. 어린 나이에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기에,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니, 나는
오히려 너를 가엾이 여겼어. 내가 임신 중에 넌 독초를
구해 나에게 먹였어. 그 뒤로도 끊임없이 나와 사엘이
를 해치려 했지만, 그래도 용서해 주었어. 네가 이대로
버려질까 두려워 그러는가 보다, 그러니 언젠가는
멈추겠지. 너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울부짖고 매달리며 애원했어. 제사장 부인 자리 너 해도 된다고 나는 사엘이만 있으면 여기서 나가서 어디든 가서
살겠다고. 제발 살려만 달라고 너를 붙잡고 빌었어.
그런데 너는 내가 저주를 받았다 모함하고, 결국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어. 그리고 지금까지 내 딸에게도
어떻게 했지?”
후난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말한다. “내가 당신을
살릴 힘이 어디 있다고 나한테 그래? 내 잘못이 아니야나도 그저 살려고 한 것뿐이야.”
사엘이 말한다. “너 살자고 내 어머니를 죽였어?”
후난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며 말한다.
“나도 억울해. 나도 언제 버림받고 죽을지 몰라 그랬다고. 나도 네 엄마처럼 내 자식도 살리려고 그런 거야.”
사엘이 후난에게 다가가 입가에 섬뜩해 보이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요 제사장의 씨는 내가 태어난 이후 끊어졌다고 말했을 텐데? 너는 어떤 자의 씨를 지키려고 한 거지?”
후난이 배를 움켜 잡고 요를 바라보며 말한다.
“제사장님. 이대로 가만히 계실 거예요? 사엘이가
이젠 정말 미쳐 버렸나 봐요.”
사엘이 입을 연다. 그러나 그 소리는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신전 안 전체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처럼 들린다.
“네가 지금까지 가진 아이는 단 한 명도 제 사장의
씨였던 적이 없구나. 너와 음행을 저질렀던 그 자들이
지금 살이 터져 죽으리라.”
집안에 세 명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영문도 모른 채 살이 터지고 찢겨지며 죽어간다.
카야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집안사람들의 소란을
잠재우며, 그들의 시신을 치운다.
예배당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요가 사엘을
보며 말한다.
“말이 지나치는구나. 경망스럽기까지 하고. 오늘일은
내가 없던 일로 할 테니 그만하고 여기서 물러가거라.”
요는 그 동안 그가 저지른 죄들이 드러나, 이 상황을
그냥 빨리 정리하고 그만 하고 싶은 것이다.
후난이 사엘을 노려 보며 분을 감추지 못하고 씩싹 거리며 말한다. “내 오늘의 이 모욕은 잊지 않을거야.
그래도 내가 어미 처럼 돌봐줬더니 무례하고 배운 망득한 년.“
후난도 그녀가 저지른 일이 밝혀지는 것 같아 그것을 감추기 위해 더 길길이 날뛰는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보다 더한 악담을 들으며, 사엘은 제단 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가
유리로 된 천장 아래 서서 잠시 침묵한다.
요가 사엘을 보며 소리친다.
“제단 앞에서 당장 물러서, 이 저주 받은 년아, 그만 하라 하지 않느냐. 경전의 신이 분노 하셨어? 이 집안이 너로 인해 망하겠구나.너도 그때 같이 죽었어야 했어.“
제단 앞에선 사엘이 돌아서서 허공을 대고 말한다.
“제사장 집안에 흐르는 더러운 죄를 끊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경전의 신을 위한 의식을 드릴 것입니다.”
그러자, 사엘의 뒤에 있는 그릇에서 연기가 다시
피어오르며 음성이 들린다.
“내가 너를 지명하고 불렀나니. 나의 말이 너의 음성에
머무르리라.”
후난과 요가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요가 소리친다.
“어디서 요술을 부리는 거야? 저 연기는 무엇이냐?”
사엘이 후난을 가리키며 말한다.
“너는 용서받을 수 있었다. 너의 몸이 짓밟히는 것을
내가 불쌍히 여겼다. 그러나 너는 너의 침상을 더럽혔고, 너의 뱃속에 제사장의 씨가 있다고 거짓을 말했다.
너는 너의 아이를 잃을 때마다 너의 죄를 깨닫고 너의
죄악을 멈췄어야 했다. 너와 간음하던 자들이 신전 밖에서 살이 찢겨 죽었다. 이 자리에서 너의 살도 찢겨
죽으리라.”
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친다.
“웃기지 마. 내가 이런 말로 놀랄 줄 알아. 아악.”
일어나던 후난이 쓰러진다. 다리 사이에서 피가
흐른다. 후난이 배를 움켜 잡으며 소리 지른다.
“아악. 제사장님. 아기가 또. 아악. 살려 주세요.”
그녀의 살 여기저기가 뜯겨 나간다. 후난이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른다. 그것을 본 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가려 하지만, 일어나 수가 없다.
사엘의 입을 통해 다시 음성이 들린다.
“제사장의 직분을 욕되게 한자, 침상을 더럽힌 자,
아내를 죽인 자,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은 자. 네가
저지른 하체의 죄가 심히 크다. 너의 허리와 다리가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리라.”
요가 그 자리에 쓰러진다. 두 팔로 의지해 일어나 보려 하지만, 허리와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는다.
말을 마친 사엘이 눈을 감는다.
제단 그릇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사라지며, 불꽃이 천장을 치솟는다. 불꽃 속에서 거센 바람이 일며,
신전 안에 걸려 있는 등잔에 불이 붙는다.
요가 그것을 보고는 기절한다.
후난의 마지막 숨도 끊어진다.
신전 안에 정적이 흐른다.
바람에 신전문이 활짝 열리며, 사엘의 집을 둘러싼
담벼락 위의 등잔에 불이 붙는다. 바람이 온 마을을
날릴 만큼 거세게 불자 온 지파 마을 사람들이
동요하며 술렁 거린다.
계획했던 대로, 지파의 수장들은 병사들을 움직여
마을 사람들의 동요를 제어한다. 카야의 병사들이
4지파와 5지파 사람들과 마을을 제어하고, 근래에
새로 생성된 작은 지파들도 카야가 미리 훈련해서
잠복해 놓은 사병들이 움직여 마을의 동요를 막는다.
거세게 불던 바람이 잠잠해지면서, 1지파, 2지파,
3지파 수장의 집 문 앞에 달려 있는 등잔 에도 꺼져 있던 불이 밝혀진다.
그것을 본 라함이 1지파 군대장에게 말한다.
“온 마을과 지파에 알려라. 제단에 불이 돌아왔다고.”
제단의 불이 돌아온 소식을 들은 지파의 마을 사람들
이 각각 수장의 집 앞으로 등잔의 불을 보기 위해
모여들고, 어떤 이들은 제사장 집 앞으로 모여든다.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던 제단의 불이 놀랍기도 하지만
제단에 불을 밝힌 자가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집안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하갈과 밧세가 말을 타고 병사들을 지휘하며 지파
사람들을 통제하고, 보호한다.
하갈이 밧세에게 말한다.
“사엘이었어.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자가 ”
하갈과 밧세는 서로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라함이 수아에게 말한다.
“사엘이 제단의 불을 밝힐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너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
수아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한다. “그저 이틀 전에
카야가 찾아와, 아버지와 저에게 전달한 말이 다 입니디. 사엘이 제사장 집안을 위해 무언가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랬지만, 이렇게 불을 밝힐 자 인지는 저도 몰랐
습니다.”
라함이 수아에게 조심스레 말한다.
“이미 너에게도 말하지 않았느냐. 제단의 불을 밝힌
자는 왕을 지명한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기대도 되면서 걱정도 되는구나. 사엘은 언제 다시 보기로
했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좀 지켜보시죠. 그런데 사엘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친구가 대단한 일을 한 것이 그저 놀랍고 기쁜 수아와
달리 라함은 가장 오래되고 지금까지 지파들의 모든 역사와 이야기를 지켜온 지파의 수장으로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불이 돌아온 것이 기쁘면서도 앞으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지에 대해 염려스럽기도 하다.
여람이 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한다.
마하셀이 그런 여람을 보며 말한다.
“사람들의 동요를 막으라고 했더니, 어째 네가 더 정신
없게 그러느냐?”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여람의 말에 레이가 대답한다.
“아들. 아들은 집에 가 있는 게 어때? 엄마가 너 대신
여기 있을게.”
여람의 엄마, 그리고 마하셀의 아내 레이는 여자 병사
였고, 무술과 무예에 뛰어났던 그녀는, 병사들의 훈련
을 맡은 지휘관 중의 한명 이었다. 아름다운 미모에
병사들을 통솔하는 멋진 모습까지 가진 레이에게
반한 마하셀은 그녀를 3년을 쫓아다녔고, 혼인 까지
했다. 지금도 레이는 수장의 아내 보다 지휘관이 낫다
면서 푸념을 하고, 마하셀은 아직도 그런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며, 왜 그러냐고 달래만큼 그녀를 사랑한다.
여람의 높은 콧날과, 시원한 눈매가 레이의 아름다운
미모를 닮았고, 서글 서글하고 온정이 많은 성격은
마하셀을 닮았다.
오랜만에 말을 타고 나와 병사들을 통솔하는 레이가
신이 나 보인다. 그녀가 여람을 부르며 말한다.
“아들. 우리 언제까지 이거 해야해? 아마도 며칠은
해야겠지? 사람들 동요가 뭐 그리 금방 잠잠해 질까?“
그녀는 여기저기 불이 밝혀 진 것보다, 병사 통솔에
더 들뜬 모습이다. 레이의 말에 마하셀과 여람이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든다.
“엄마. 엄마는 그냥 계속하세요.”
“그럴까? 그럼 나는 저쪽에도 다시 한번 갔다 와 볼게.”
레이가 병사들의 무리를 이끌고 말을 몰아 달려간다.
여람이 마하셀을 보며 말한다.
“아버지. 엄마께 다시 지휘관 자리를 드리세요. 저렇게
좋아하시고 잘하시잖아요.”
“그래도 수장의 아내인데.”
“뭐 어때요? 하갈님은 수장까지 하시는데요. 수장의
부인이 지휘관를 하는게 뭐 이상한가요? 실력만 된다면 상관없죠. 아 맞다. 아버지 사엘네 가봐야 하지 않을
까요? 사엘이는 괜찮겠죠?”
“아들. 엄마 말씀대로, 너는 집에 가 있는 게 어때?
네가 더 안 괜찮아 보이는구나.”
여람이 마하셀의 말에 멋젖게 웃는다. 불이 돌아왔다
는 것은 그래도 사엘이 괜찮다는 의미 일 것이라
생각하며, 멀리 있는 그녀의 집 방향을 바라본다.
카야는 4지파, 5지파와 다른 작은 지파들의 상황을
보고 받고는, 신전 안으로 조심히 들어간다.
제단 앞에 사엘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인기척을 들은 사엘이 뒤돌아 보지 않고 말한다.
“캬야, 아버지를 방에 정중하게 예를 다하여 잘 모셔
다 드려. 후난의 시신은 잘 추슬러 화장하고.”
카야는 몇 명의 병사와 하인들을 불러 조용히 사엘이
지시한 대로 한다.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물러 가자,
여전히 제단 앞에 앉아 있는 사엘이 카야에게 말한다.
“마을은? 지파는?”
“말씀하신 대로 세 분께서 잘 하시고 계시고, 지금은 좀 잠잠해진 상태이지만, 여전히 마을을 둘러보고 계십니다. 집 앞 돌담의 등잔들에 불이 돌아왔고, 1지파,
2지파, 3지파 수장님들의 문 앞에 걸려 있는 등잔에도
불이 돌아왔습니다.“
“오늘부터 삼일 후에, 경전의 신을 위한 첫 의식을
드릴 거야. 그때 마을 사람들한테 내가 제사장임을
알릴 거라고, 수장님들에게 알리고, 그때까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시라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카야가 대답을 하고, 사엘이 괜찮은지,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언제까지 신전에 있을 것인지, 물어보고
싶지만, 제단을 향해 앉아 있는 사엘은 더 이상 그가
걱정하던 소녀가 아니다. 다가갈 수 없는 제사장의
모습으로 제단 앞에 앉아 있다.
카야가 마룻바닥의 나무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신전을 나오자, 문이 닫힌다.
카야는 딛힌 문 앞에 서서, 나지막이 경전의 신에게
기도 한다.
“경전의 신이여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 아이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야는 사엘이 말한 대로, 1지파와 2지파 3지파에게 사엘이 말한 소식을 전하고, 4지파와 5지파, 그리고
다른 작은 지파들의 동태까지 살피고 돌아와서는,
여전히 닫혀 있는 문 앞에 늘 그랬듯이 서있는다.
깜깜한 밤인데도, 신전안이 밝혀진 불로 환하다.
주변의 담장도 등잔의 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다.
1지파 2지파 3지파 수장들의 집 문 앞도 등잔의 불로
환하다. 마을에 잔잔한 바람이 일면서, 불꽃들이
꽃처럼 흘날리며 날아다닌다.
환하고 아름다운 밤이다.
불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두 손을
모으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기도를 한다.
꺼져 있던 제단에 불이 돌아왔고,
사람들은 그동안 잊고 지내던 경전의 신을 부른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불꽃이 이는 성스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