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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Fifty Two 변한 우정

by Hye Jang

놀이방에서 나와, 밧세방 으로 같이 온 수아는 그의 윗

옷을 잡아당기며, “팔 좀 봐봐.” 하자, 밧세는 수아의

팔을 뿌리 치며, “왜? 괜찮아.”라고 황급히 말한다.


“그러니까. 한번 보자고. 괜찮다면서 왜 안 보여줘?”


“괜찮다는데 뭘 봐.”


밧세는 팔이 아프고 불편한 것을 수아에게 숨기고 싶

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복잡하고 힘든 수아에게 그의

아픈 몸까지 걱정을 더해 주고 싶지 않아서이다.


수아가 밧세의 옷 대신, 다친 팔을 잡자 순간 밧세가

‘악' 하고 고통스러운 소리를 낸다.


“괜찮다면서? 이 정도로 잡았는데 아파?”


“그게.”


수아는 밧세의 웃옷을 벗긴 후 상처 난 그의 팔을 살펴

본다. 겉에 상처는 잘 아물고 있는 것 같은데 팔이 좀

부어 보인다. 수아가 찬 물수건을 밧세의 팔에 대며,

“아비갈님이 그랬어. 안에 염증이 생길 수도 있다고.

그러니 찜질도 더 잘하고, 약도 더 잘 챙겨 먹어야 돼.”


“그렇게 하고 있어.”


“더 잘하라고.”


“알았어.”


수아는, 찬물 수건을 밧세의 팔에 올려놓고,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밧세의 상체를 닦기 시작한다.


밧세가 수건을 잡으며, “나 씻었어.”


“씻었겠지. 대충. 한 팔로 씻는 게 쉽냐. 가만히 있어봐.

너 다쳐서 내가 이렇게 극진히 돌봐 주는 줄 알아.”


밧세는 피식 웃으며, “생색을 왜 안 내나 했다.”


“생색이 아니고. 너도 나 돌봐 줬었잖아.”


“응?”


“여기 도망칠 때, 나 눈멀어서, 네가 먹여도 주고, 씻겨

도 주고 했잖아.”


“내가 그때 진짜 얼마나 걱정했는데. 당연히 내가 돌봐

줬어야지.”


“그러니까. 나도 당연히 하는 거라고.”


수아는 팔에 있는 수건을 다시 찬물에 담가 짠 후, 팔에

올려 주고, 밧세의 뒤로 가 다른 수건으로 등도 살살 닦

아준다. 밧세는 말도 행동도 늘 차분하고, 조용하다. 도

무지 화를 낸 적이 없고, 수아나 여람이 짓궂게 장난을

칠 때, 늘 그들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했다. 이들

중에 가장 키가 크고, 어깨도 가장 넓어서 그런지, 모두

들 든든한 밧세에게 기대는지도 모른다.


밧세 앞으로 와서 앉은 수아는, 새 수건으로 바꾸며,

“이제 얼굴도 좀 닦자. 눈 감아봐.”


“됐어. 얼굴은 한 팔로도 닦을 수 있어.”


“너 나 눈 안 보일 때, 닦는 척하며 내 얼굴에 막 장난치

고 그랬지?”


“무슨 장난을 쳐. 정성껏 살살, 깨끗이 잘 닦아줬지.”


“그러니까. 나도 잘 닦아 줄게. 눈 감아봐.”


밧세는 마지못해 눈을 감는다. 그때 수아의 몸과 얼굴

을 닦아 주면서 상상했던 것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거린다. 그때 수아가 눈이 멀어, 그의 모습을 볼 수 없

어 다행이었는데, 지금은 혹시 달아올라진 그의 얼굴

을 수아가 눈치챌까 가슴이 콩닥 거린다. 그러면서도,

수아가 수건으로 닦아주는 이마, 볼, 코, 입술이지만,

그의 손길 어딘가가 머무르는 것을 느껴 본다. 혹시나

그가 그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진 않을까 기대도 해 본

다. 늘 그런 날을 밧세는 상상하고, 꿈꾸었는지도 모른

다.


수아의 손이 볼에 머무자, 밧세는 그의 손을 잡고 눈을

뜬다. 서로의 눈동자가 마주친다. 수아도 밧세의 눈을

응시하며, 친구의 눈을 이렇게 가까이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있었나 생각하며, 그랬던 적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쌍꺼풀 없이 긴 눈에, 긴 속눈썹을

가진 밧세의 눈이 오늘처럼 아름 다웠었나 라고 느꼈

던 적은 없었던 거 같다.


밧세가 다치지 않은 팔로 수건을 잡으며, “이젠 너 차

례?”


수아는 그가 한 생각에 당황스러워, 고개를 좌우로 저

으며, “뭘?”하고 묻자, 밧세가 다른 새 수건을 집어들

며, “내가 너 닦아 줄 차례라고.” 라고 말한다.


“됐어 팔도 아프면서 뭘 해. 난 나가서 그냥 물 한번 뿌

리면 돼.”


“얼굴은 내가 닦아 줄게.”


수아도 못 이기는 척 눈을 감는다. 밧세는 천천히 수아

의 얼굴을 닦는다. 환상이었는지 실제였는지, 혹은 바

램이었는지 모를 일들이 또 다시 떠오른다. 환상이나

꿈이 아닌 지금처럼 수아랑 함께 한 집, 한 방에 살며

친구처럼 연인처럼 살고 싶다.


밧세의 손이 수아의 입술에 머문다. 수아가 눈을 뜨고,

밧세와 다시 눈이 마주친다. 밧세의 눈동자에 그의 얼

굴이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알 수 없는 표정이지

만, 밧세를 보는 얼굴이 이전과 달라 보인다. 수아는 그

의 입술을 밧세의 입술에 포갠다. 순간 그의 행동에 놀

라, 입술을 떼러 하자, 밧세가 수아의 목을 끌어안으며,

포갠 입술에 혀를 밀어 넣는다. 수아는 이게 아닌데, 라

는 생각이 들면서도, 밧세의 따뜻한 혀의 감촉, 나지막

하게 들리는 숨소리에 끌리듯 멈추지 않는다. 수아는

전쟁으로 인해, 칼날에 흩뿌려지는 생사와 죽음 때문

에 정신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동안 사엘은 꼼짝도 않고, 하갈 방옆에 있는 손님

방 안에만 있다. 그런 사엘이 걱정된 여람은 괜찮냐며

방문을 열고 들어 가면 되는데, 방문 앞에서 며칠을 서

성 거렸다. 이렇게 늘 그는 멈추고, 조심하고, 또 생각

하고 생각하는데, 그날 제단 아래 동굴에서 사엘과 라

단의 모습은 스스럼없이 서로를 갈망하고 있었다. 둘

의 모습이 떠오르자, 화가 나면서, 늘 그의 환상 속에

서 봤던 그녀를 향한 그의 내면의 욕망과 겹쳐져, 가슴

이 쿵쾅거린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에 맞춰 방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고 들어 가며, “괜찮은지 보러 왔어.”라고 말하니,

“아. 잠깐만.” 하며 사엘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린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다. 여람은 미안하

다고 말하면서, 문을 닫고 나가려다 멈추고는, 그녀 쪽

으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사엘은 황급히 바지를 입고, 뒤를 돌아, 윗옷의 단추를

채우려고 하지만,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잘 채워지지

않는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아직 안 입었는데. 문을 두드렸으

면, 들어와 라는 말을 듣고 들어 와야지. 넌 두드리고

바로 들어오니.”


“나는 왜 안돼?”


“뭐래? 좀 나가 있어.”


여람이 사엘 쪽으로 걸어가며, “나는 왜 안 되냐고?” 말

한다.


사엘은 대답대신, 손으로 단추를 잘 보며 여미려고 하

는데, 그녀에게 다가온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 홱돌리

자, 그녀의 채워지지 않은 단추 앞부분이 열린다.


사엘이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놀라 “야. 너 뭐야.”

라며 소리친다


여람이 그의 두 손으로 사엘의 손목을 잡고 내리자, 옷

사이로 그녀의 가슴이 보인다. 그때 동굴 속 달빛에 비

춰 본 것보다 훨씬 더 풍만하고 아름답다.


사엘이 손에 힘을 주며, 여람의 손을 뿌리 치려 하지만,

꽉 잡은 여람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여람은 사엘

의 손을 잡은 채, 그녀에게 다가간다. 사엘이 뒷걸음을

치지만, 벽에 닿는다.


사엘이 화난 목소리로 말한다. “장난 그만해. 이런 장

난은 하는 게 아니지. 빨리 손 놓고 나가.”


“장난 아닌데.”


“나 진짜 화났어.”


“나도.”


“뭐라고?”


“나도 화났어.”


“뭐래?”


사엘이 여람의 손에서 팔목을 빼려고 손을 비틀어 보

지만 소용이 없다.


여람은 그녀의 손목을 더 꼭 쥐며 말한다.


“나는 왜 안 돼?”


사엘이 화를 내서 될 일은 아닌 거 같아, 차분한 목소리

로 말하려고 애쓰지만, 벌어진 옷과, 가슴이 신경 쓰인

다.


“그러니까. 뭐가 안 되냐고 말하는 건데. 일단 손부터

좀 놓고.”


“나는 이렇게, 너만 보는데, 네 옆에만 있는데, 나는 왜

안돼?”


사엘과 여람의 눈이 마주 본다. 사엘은 여람과 마주친

눈을 외면하고는, 다시 손을 흔들며, 빼내려고 하자, 여

람이 사엘의 팔을 들어 올리고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

이고, 그녀가 외면한 눈을 바라본다.


여람은 조각처럼 매끈하고 오뚝한 코에, 살짝 올라간

눈매가 무표정 일때는 매력적으로 보이다가, 웃으면

반달 모양의 눈이 귀여워 보이는 얼굴과, 비율 좋은 몸

매에 옷도 잘 입어서, 소년들은 그의 옷차림을 따라 하

기도 했고, 그를 좋아하는 소녀 들의 모임도 있었다. 게

다가 그의 아버지, 마하살의 재치와 넉살, 그리고 그의

어머니, 레이의 현명함과 반듯함까지 갖추어, 어른들

도 좋아했고, 사위 삼고 싶어 하는 예비 장모님들도 꽤

많았었다. 그리고 그가 입은 옷은 그 다음날 순식간에

팔려, 옷가게 상점 주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손님이기

도 했다. 마을을 떠났을 때도, 그는 여전히 매력적이었

고, 재치와 넉살로 힘들 때 모두를 잠시 웃게 했었다.

그는 지금 다부진 체격과, 더 남자다워진 외모, 그리고

책임감과 신중함이 더해진 훨씬 더 성숙하고 멋진 남

자로 변해 가고 있다.


사엘을 바라보는 여람의 눈은 언제나 깊고, 따스하며,

그의 손은 늘 사엘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의 팔을 잡아

주고, 그녀의 어깨를 토탁이며 힘내라고 하며, 그의 농

담에 사엘은 웃었고. 그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

볼 때, 그녀의 마음도 한 번쯤은 뛸 만큼 여람은 멋진

남자다. 하지만 사엘에게 여람은 매력적인 남자라기

보다는, 멋진 친구였고 지금도 그는 멋진 친구이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팔을 움켜쥐고, 그녀의 눈을 응시

하는 여람은 친구라기보다는 분노와 욕망으로 뒤섞인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남자다.


사엘은 여람과 그녀 사이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조용히 말한다.


“그만해. 팔 아파.”


여람이 잡고 있던 한 팔을 놓고, 벌어진 옷 사이에 손을

넣어, 그녀의 가슴을 만진다. 사엘이 한 팔로 여람을 밀

어 내려 하지만, 여람은 사엘을 벽 쪽으로 더 바짝 밀고

그의 몸까지 더 밀착시키며, 그녀의 가슴을 만지며, 그

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갖다 대지만 사엘이 고개를

돌리자, 여람은 입술대신 그녀의 귓불과 목덜미에 입

맞춤을 한다. 그때, 여람은 라단과 함께 즐기던, 사엘의

행복한 얼굴이 떠오른다. 여람은 지금 그와 함께 있는

사엘의 얼굴은 어떤지 보고 싶어, 그녀의 얼굴을 보자,

사엘은 눈을 감고, 앙 다문 입술이 일그러져 있다.


“너는, 너는 내가 싫어?”


사엘은 여전히 여람의 시선을 외면 한채, “싫다 좋다의

문제가 아니야.”


“라단은 되고, 나는 왜 안돼?”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처음부터였어. 처음부터 너였고, 아니 우리가 처

음부터였어. 하지만 나는 너랑 더 오래, 가까이 만나고

싶어, 널, 널 좋아해도, 조심하고, 머뭇거렸어. 그런데

이젠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아. 여기서 널 갖고, 너랑 혼

인하고, 여기가 아니어도. 너랑 어디든 가서 살 거야.”


여람은 다시 그녀를 껴안고, 얼굴과 목에 입맞춤을 하

며, 그녀의 가슴을 만진 손을 아래로 내리며, 그의 다리

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벌린다.


“제발. 여람아 그만해.”


여람의 손이 사엘의 다리 사이를 더듬자, 사엘은 온 힘

을 다해, 여람을 밀쳐 내며 소리친다.


“그만해. 네가 원하던 게 이런 거야. 겨우 이런 거나 하

려고 조심하고 머뭇거렸어? 겨우 이런 걸 원한 거야?

나랑?”


라단과 있을 때 행복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

로 일그러져 있다. 그런 사엘을 보자, 여람의 눈에서 눈

물이 흘러내린다. 그런 여람을 보며, 사엘의 눈에도 눈

물이 흘러 내린다.


“여람아. 우린 친구잖아. 지금까지 그렇게 친구로 지냈

잖아. 그런데 왜 그래? 난. 난 친구인 너를 잃고 싶지 않

아.”


여람이 손으로 그의 눈물을 닦으며, 성난 목소리로 말

한다. “친구. 친구. 넌 나한테 그 말 밖에 못해? 왜 나는

너랑 친구만 해야 하는데? 난 너에게 남자이고 싶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싶다고.”


“여람아.”


“내 이름 그렇게 부르지 마. 내가 진짜 돌아 버릴 것 같

거든.”


“그래도, 여람아.." 사엘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여람은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눈물반, 고통반 섞인 목소리로, “넌 정말 잔인해. 네가 이렇

게 내 이름을 부르며 울면, 나는 친구라도 괜찮다며, 너

의 옆에 어떻게든 있으려고, 그래 나는 너에게 친구라

고, 그저 친구라고 하겠지.” 라고 말하며, 방문을 열고

나간다.


사엘이 그 자리에 주저 않아,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흐느낀다. 그녀가 꾸는 환상 속에는 엄마도, 라단도, 그

리고 친구들도 다 함께 행복한데, 현실 속의 그녀에게

엄마는 없다. 사랑하는 이는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적

이라며 반대 편에 있다. 그나마 지금까지 친구들이 있

어 살아 왔는데, 한 친구가 이제는 친구가 되고 싶지 않

다고 한다. 가족도, 사랑도, 우정도 모두 그녀를 떠나가

는 것만 같다.


사엘의 방을 나와, 층계를 내려오는데, 층계 아래 서 있

는 정하를 본 여람은 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고, '안녕' 하며 지나가려는데, 정하가 여람

의 팔을 잡으며, "무슨 일 있으세요?” 라고 묻는다.


“아니. 없어."


“그럼, 차 한잔 같이 드실래요?”


“아니. 다음에. 다음에 마시자."


정하는 이층 방에 머무는 아비갈에게 갔다 나오면서,

사엘의 방으로 들어가는 여람을 봤다. 지나쳐 가야 하

는데,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간간이 들리는 소리로, 무

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여람이

나오는 소리를 듣고는 층계를 내려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하는 다음에 마시자 라고 말하는 여람의 팔을 잡아

끌며, “전 오늘 같이 마시고 싶어요.” 라고 말하며, 그를

잡아 끈다.


정하의 말과 행동이 간곡해, 여람도 더는 뿌리치지 못

하고 따라가다, 정하가 놀이방 맞은 편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방에서 마시자고? 저쪽으로 가면 부얶이

있어. 앞에 놀이방도 있고.”


“제가 불편하세요? 다른 분 들하고는 방에도 잘 계시잖

아요.”


“아. 그건.”


"이미 차도 다 만들어 놨어요. 저 마실때, 한잔 가볍게 드세요."


여람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정하는 그의 팔을 잡아끌어 탁자 앞 의자에 앉히고는 차를 따라, 그에게 건넨 후

그녀도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서로 잠시 말없이 차를 마신다.


여람은 놀이방 맞은편에 방이 있었었구나 라는 생각도

한다.


여람은 잔에 따라진 차를 다 마시고는, “잘 마셨어. 이

제 그만 가 볼게.” 라고 일어나려는데, “조금 더 계셨으

면 좋겠어요.”라고 정하가 말한다.


“응?”


“제가 다 마실 동안만요.”


“아. 미안. 나만 다 마셨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네. 전쟁

통에 예의고 뭐고 그냥 다 잊어버렸나 보다.”


여람의 말에 정하가 웃는다. 그러고 보니, 정하는 늘 여

람이 말하면 웃었던 거 같다.


“안 웃긴 거 같은데.”


“참 재미있으세요.”


“내가?”


“처음이에요.”


“응?”


“처음이었어요. 함께 있으면 재밌고, 또 계속 재미있게

있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게.”


여람이 그녀를 재밌게 해 주었던 것은 아니다. 여람은

누구에게나 친절 하지만, 그의 친구들이 아닌 이들에

게는 예의를 다해 대해,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또

래인 정하와도 함께 한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겨우 말

은 놓았지만, 늘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그녀를 대했다.

여람이 밝고 장난기가 많아질 때는 그의 친구들과 사

엘과 있을 때 였다. 특히 사엘을 보면 더 많이 웃고, 사

엘에게 장난치며, 들떠서 말이 많아지는 그런 그를 보

며 정하는 웃었던 것이다.


여람은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시니, 마음이 조금 진정

되는 것도 같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몸도 살짝 나른

해지는 것 같다. 차 때문인지, 방이 그런 건지, 덥기까

지 하다.


“차가 좀 독하죠?”


“응?”


“저는 차에 술을 좀 타서 마셔요.”


“응?”


여람은 정하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

아, 그저 응? 이라고 대답하며 물음표를 단다.


“그냥 잠도 잘 안 오고 해서요. 이건 엄마한테 비밀 인

대요. 16살 때부터인가, 그때부터 가끔 차에 술을 몰래

타서 먹었어요. 그러다 보니, 이렇게 오래 마시게 되었

네요.”


“아.”


여람은 그제서야 정하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음도 대답도 아닌, 그녀의 말에 공감을 한

다.


정하는 그녀의 비밀 이야기를 꺼내, 부끄러운지, 얼굴

이 살짝 빨개지고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차를 한 모

금 더 마신다. 여람은 정하가 이제 이해가 되는 것 같다

16살, 그가 16살인 그때, 친구들과 매일 만나고, 하루

이틀 못 만나면, 몸부림이 쳐질 만큼 싫었는데, 16살의

정하는 산속에서, 친구도 없이, 그저 살아남기 위해 살

았으니 친구로 달랠 마음을 술이 섞인 차로 달랬을 것

이다.


“이해해.”


“네?”


“16살이었잖아. 그땐 뭘 해도 다 괜찮은 거야.”


여람의 말에 정하가 또 웃는다.


“웃으라고 한 이야기 아닌데. 오히려 슬픈지 않아? 그땐 괜찮은데, 지금은 안 괜찮은 게 더 많으니까.”


“그래서 제가 여람님을 좋아해요.”


정하의 말에 여람은 또 그녀의 말이 이해도 안되고, 놀

라기도 해서, “왜?”라고 이상하게 묻는다.


"아니 내말은 그러니까. 내가 왜 왜? 라고 물었을까?"


여람의 횅설수설한 말이 정하는 우스운지, 입가에 미

소를 지으며, “처음이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처음부

터 좋아했어요.”


여람은 정하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르겠다.그래

서, “이걸 애들이 들어야 하는 건데. 예전에 나 좋다는

남자애들, 여자애들, 심지어 옷가게 아주머니들까지.

아오. 말해 뭐 해. 그런데 수아나 사엘이는 안 믿더라

고, 나중에 애들 있는데서도 좀 말해 주라. 그러면 나는

이제 그만 갈게.”라고 농담처럼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

어나는데, 정하도 일어나며, “진심이에요. 좋아해요.”

라고 말한다.


정하의 말이 진심인걸 알자, 여람은, “그럼 나도 말할

게. 내 마음엔 다른 이가 있어. 나는 그녀를 좋아해. 처

음부터 지금까지.”


방금 전 사엘과 그런 일이 있었고, 사엘의 마음에는 온

통 라단 뿐이고, 사랑이라고 내 뱉자 마자 그녀는 그저

친구로 있으라고 끝내 버린 그녀가 잔인하다고 느꼈

는데, 여람은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 까지도 그녀를 변

함없이 좋아한다고 말한다.


여람은 사엘에게 할 고백을 정하 앞에 털어 놓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내 쉰다.


정하가 그런 여람을 바라보며, “괜찮아요. 제 마음엔

당신이 있으니까요.” 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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