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가보고 싶다는 건
어제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앞자리에 앉던 동료의 부친상으로 그의 아버지는 오랜 시간 투병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그의 임종을 바라본 아버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엄마, 보고 싶어”라고 아들을 앞에 두고 말씀하셨다. 가시는 길에 그가 얘기해준 이야기는 기억에 남는다. 초점이 흐려진 상태에서 고백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잔잔히 회상하는 그의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가 되어보니 더 그 마음이 느껴진다. 늘 시간에 쫓겨 아이와 있는 시간이 많지 않지만, 같이 시간을 보낼 때는 아이는 내게 온갖 요구사항이 이어진다. "업어주세요"부터 "안아주세요", "이거 해주세요", "우유 먹고 싶어요" 등 말을 시작할 때부터 일하고 난 뒤 체력이 바닥인 상태에서도 아이는 끊임없이 말한다. 잠자리에 누울 때도 말이다.
아이에게 엄마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일 테다. 일종의 지니 램프 같은. 나는 그런 믿음을 일찍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얼 원하기 전에 모두 해주려고 하셨던 엄마를 피해 다니고 싶었던 적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내 요구를 들어주는 사람이 아닌, 내가 요구하기 전에 이미 자리를 만들어주신 분이라.. 한없이 퍼주는 마음을 돌아선 채 나의 독립심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다녔다. 하고 싶은 것을 찾아 고향을 떠나온 지 벌써 16년. 서울과 파리, 서울, 평촌을 거쳐 내 주거지는 세종이 되었다.
내 고향은 바다가 있는 도시였다. 태어나서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일상에서 바다를 자주 보지 못했다. 짠 소금 냄새보다는 대학교 캠퍼스가 있는 동네라 대학생들을 자주 봤고, 경주에 가까운 동네에 거주했기에 어릴 적 부터 박물관과 미술관, 문화재에 더 관심이 많았었다. 말이야 ‘바다가 고향인 여자’였으나, 거친 파도와 바다 냄새에 관심이 일절 없었다. 태어난 곳을 그리 중요하게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고향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태어난 곳보단 내가 살아가는 곳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내 가정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니 부모님이 계시는 그곳이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부산과 대구 등 대도시를 떠나 바다 도시인 포항시 해도동에 첫 신혼집을 자리 잡으셨다. 그의 첫 일터는 포항이었고, 그의 아이들이 아장아장 겨우 발을 뗄 무렵 회사 사택 동네에 주거지로 잡았다. 두 분이 바라는 대로 아이들은 그 동네에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란히 졸업하여 서울로 유학을 갔다. 이후 부부는 매일 아침과 저녁 산책하기 좋은 바다와 가까운 두호동으로 이주하셨다.
이미 은퇴한 부부는 각자의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으나, 첫 신혼집의 도시를 40년간 떠나지 않았다. 푸르른 20대에 새 삶을 시작하고 아이들을 낳고 그 도시에 뿌리를 내리면서 살아왔던 유년기, 청년기보다 더 정이 들어서 그런 거 같다.
한 번은 엄마가 그러셨다. 외할머니가 없는 고향은 고향 같지 않다고. 더 이상 대구에 갈 이유가 없어진다고 하셨다. 내게도 그러하다. 애초 고향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내게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고향은 의미가 없다. 태어난 도시를 사랑할 마음이 옅어질 것이다. 부모님이 계시기에 객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의 바다가 보고 싶었던 아니었을까. 내가 ‘고향을 가고 싶다’라고 말하면, ‘엄마 아빠 보고 싶다’는 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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