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를 통해 무에서 유를 찾다
아이를 낳은 후, 돌아오는 생일은 별다른 기대 없이 스쳐 보내고 싶었다. 세상에 태어나 축하를 받는 것보단 힘들게 나를 낳은 엄마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365일 중 하루, 부모님과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할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물질보다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이자 추억이 된다는 걸 이젠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2020년 1월 16일 서른여섯 번째 생일날. 나 자신에게 평생에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가족이 아닌 타인과 함께한 시간이었는데 말이다. 2019년 생일, 김지수 기자의 첫 번째 책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을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조선비즈에서 인터뷰 연재기획 기사로 잘 알려진 분으로 평소 인터뷰에 관심이 많고 존경했던 분이라 가장 읽고 싶은 책이었다. 마침 올해 생일날 그분을 만났다. 2시간 동안, 인터뷰이 자격으로.
서울 중림동에 있는 콘텐츠 공간인 어반스페이스오디세이(이하 USO)는 한 달에 한 번 일반인을 대상으로‘인터뷰이’ 1명을 선정하여 ‘인터뷰 프로젝트’를 처음 선보였다. 우연한 기회로 인터뷰이로서 신청했는데, 뽑힌 것이었다. 사실 이미 신청하여 낙선한 경험이 있었다. 신청자가 100여 명을 훌쩍 넘어 ‘인터뷰이로 뽑힐 수 있을까’라는 우려심이 가득하였는데 용기를 내어 한 번 더 응모했다. 인터뷰 신청서에 인터뷰에 신청하게 된 이유를 ‘만 35년간 제 삶을 돌아보고, 35년 후의 노년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적었다. 태어난 날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엄청난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인터뷰이로 선정되었다. 생일날 받은 책의 저자를 1년 후 생일날 마주할 수 있다니. 너무나 설렌 마음을 안고 잠을 설쳤던 인터뷰 전날, 중학교 시절부터 모아 온 스크랩북들을 꺼내 보았다. 김지수 저자가 보그 코리아 잡지에 썼던 기사들과 내가 인터뷰했던 피나 바우슈를 촬영한 우종덕 사진작가의 기사, 박지호 USO 대표로 활동 중이신 아레나 옴므 코리아 전 편집장의 에디토리얼 등 유년 시절부터 즐겨봤던 잡지들을 내 시선으로 편집한 책이었다. 김지수 저자를 만났던 그날, 그 스크랩북을 인터뷰가 끝난 후에 보여드렸다. 오래전 본인이 인터뷰했던 기사들을 훑어보시면서 꽤 반가워하셨다.
그날의 만남이 소중했던 것은 10년 전 대학생 때 잡지 기자를 꿈꿨던 내 우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스무 살 성인이 되어 진로와 가치관이 재정립될 무렵 나만의 롤모델을 실제로 만난 그날. 현실이 아닌 공간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인터뷰 장소였던 USO, 사전적인 의미인 ‘바다나 강, 호수 등 수중에 있는 그 존재가 명확하지 않은 미확인 수중물체’처럼 내 일상에서 마치 존재하지 않은 잠시 현실을 비켜나간 시공간에 있는 기분이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평범한 사람이기에 인터뷰이로 나서기엔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인터뷰이로 나서기에 큰 용기가 필요했다. 신청서를 쓰기 전, 우리나라에서 명망 높은 이들을 만난 전문 인터뷰어의 시간을 뺏는 것은 아닌지 잠시 주저하기도 했다. 그 주저한 마음은 내 행동을 주저하지 않게 만들었다. 손이 마음보다 더 빨랐다. 결국, 그녀를 만났고 어느 매체에 출간되지 않은 A4용지 15장, 30면을 채운 인터뷰 소책자와 육성 녹음테이프를 받았다.
누군가는 나를 적극적으로 홍보해줄 수 없기에 그런 훈련을 오래전부터 했었다. 김지수 저자와의 만남도 나를 계속 객관화시키면서 나의 이력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덧붙여 내가 스스로 자서전을 쓰는 경험은 나를 사랑하는 한 방법이었다. 그런 과정을 많이 겪어본 사람만이 자신의 현재를 만족하며 자신의 미래를 원하는 대로 그려낼 수 있다는 걸 안다. 일반인 친구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던 이유는 그들도 자신의 글을 읽으며 자신을 사랑하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나의 속도와 가치에 맞게 내 개인이 성장해 가는 거지, 누구의 특별한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냥 좋은 개인으로 내가 좀 더 나를 많이 만족하게 해야겠다”라는 말씀을 하셨던 김지수 저자는 두 번째 인터뷰 책 <자존가들>을 건네주셨다. 서점에 출간하기 전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이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타인들도 자기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계기를 만드는 일”을 지속해서 해보길 응원해주었다. 올해 생일날 시발점이 되어 하반기 프로젝트를 기획해보았다. 이름하여 ‘그린잡스(Green Jobs)’
‘그린 잡스’는 환경부 내 인터뷰 콘텐츠로 기획한 단기 프로젝트였다. 환경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늘고 있으나, 막상 환경에 종사하는 이들은 어떠한 삶을 사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이 점이 환경을 더 잘 알고 이해하는 경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의 발로는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즐겨봤던 JOH에서 출간한 <매거진 B>와 <잡스(JOBS)>시리즈 덕이었다.
<매거진 B>는 2011년 11월 창간한 광고 없는 잡지로 한 브랜드를 선정하여 소개하고 있다. 브랜드뿐만 아니라 그 브랜드에 종사한 이들의 인터뷰와 공간을 종이를 통해 선보였다. 이어 <잡스> 시리즈는 어느 하나의 직업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에디터·셰프·건축가·소설가 등 대중들이 알고 싶은 직업에 몸담은 이들의 생각과 철학을 담은 책이라 기존의 내가 일했던 직업군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무엇보다도 현재 내가 속한 ‘환경’이란 분야에 약 4년간 몸담았지만, 환경 분야를 전공하지 않는 내게 가장 쉽게 환경을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경로는 ‘인터뷰’였다. 그 인터뷰를 담는 매체로는 잡지가 대표적이다.
“난 잡지를 너무 좋아한다. 어떤 분야가 궁금하면 그 분야 잡지를 보면 된다. 그 업계 메이저 플레이어와 꼬맹이가 누구인지, 누가 잠재력을 가졌는지 잡지 몇 달 보면 훤히 알게 된다. 그게 내 취미생활이다.” JOH 창업한 조수용 카카오 공동대표의 말처럼 잡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만든 콘텐츠는 새로운 분야를 대중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갖추게 된다. <잡스> 시리즈를 기획한 프로젝트 매니저(PM) 손현 에디터를 만나면서 환경 분야 관련 인터뷰어 프로젝트를 ‘그린잡스’로 결정했다. 책이 아닌 온라인에서만 선보이는 첫 작업이라 독자들의 피드백은 발이 빠르게 댓글이 달렸다. 오프라인 매체로 선보였다면 빠른 피드백이 없었을 것이다. ‘이 기획 너무 좋아요. 최고예요. 어떻게 이런 인터뷰이들을 찾아내신 거죠.’,‘제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고 가네요.’, ‘환경에 대한 콘텐츠 너무 좋네요.’ 독자들의 콘텐츠에 대한 평가는 다음 콘텐츠를 만들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오프라인 매체인 잡지를 통해 나의 10대와 20대, 30대인 지금까지 일상과 진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어린 시절 영화를 보는 것보다 영화 이야기가 담긴 영화 잡지들을 읽는 것을 참 좋아했다. 책상에서 10시간 이상 붙어있었던, 영화를 볼 수 없었던 중고등학교 수험생 시절에 나의 유일한 해방구는 학교 옆 책방이었다. 책방의 귀퉁이에 서서 영화잡지 <씨네 21>과 <스크린>, <프리미어>, <필름 2.0> 등을 살펴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영화를 볼 시간이 없어도 영화잡지를 통해 어떤 영화가 재미있을지 혹은 어떤 영화가 내 취향과 맞는지 등 영화를 보는 눈을 키우고 나의 취향을 성장시켰다. 이런 습관은 20대에 전시와 공연계에 몸담으며 그 분야를 빠른 시간에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영화잡지 내 배우와 감독 등의 인터뷰 기사를 읽는 것이 좋아서 그 인터뷰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의 기사를 스크랩하게 되고 ‘인터뷰어’ 직업을 선망하게 되었다.
지속적인 관심과 선망은 현실에서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준다. 대학교에 입학하여 교내 영자 잡지사에서 “어떤 분야의 기사를 쓰고 싶냐”는 편집장 선배의 질문에 학보사 활동 중 영화를 100편 이상 봤다는 문화부 소속 선배의 경험담으로 문화부에 지원하며 잠시나마 미래의 영화전문 잡지 기자를 꿈꾸기도 했던 그때. 그 계기로 학부 졸업 후, 공연예술 전문 월간지에 잠시 몸담았고 석사전공을 신문 출판으로 졸업하게 됐다. 영화를 너무 좋아했던 여고생이 약 15년의 세월이 흘러 2017년 ‘환경단편영화 [숨ː]’공모전을 기획하게 되었다. 2년간 총 3회의 공모전을 통해 총 9편의 단편영화를 지원하고 제작했다. 첫 공모전은 영화 전문잡지 <씨네 21>과 연을 맺었다.
영화, 전시, 공연, 환경까지 불문학도가 이리 다양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잡지’를 통해 세상을 배웠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지식 없이 어느 일이든 애정과 사랑이 있으면 그 일을 지속하게 되는 에너지를 키우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무언가를 진짜 하고 싶을 때 늘 가까이에서 나를 독려해준 잡지였다. 잡지 애호가는 10대 때 가장 좋아했던 잡지 <씨네 21>의 표지와 기사로 2017년 새 프로젝트를 선보였고, 20대 때 가장 좋아했던 잡지 <보그 코리아>에 몸담았던 김지수 기자를 인터뷰어로 만났다. 2018년 4월호 <보그 코리아>를 통해 ‘직업=엔잡러’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단지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기만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는 옛말처럼 내 손을 거쳐 간 여러 프로젝트는 모두 잡지를 통한 무한한 사랑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었다. 잡지에 대한 영감과 경험은 지난 35년간 내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하였고, 35년 후의 노년을 그려보는 힘을 길러줄 것으로 믿는다.
나의 속도와 가치에 맞게
내 개인이 성장해 가는 거지,
누구의 특별한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