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네 Nov 13. 2020

내 고향은 아빠의 일터였다

1편. 아파트에서만 살아봤습니다


 태어나서 주택에서 3년간 살았다. 그런데 나의 기억 속에 그 집의 형태는 없었다. 엄마는 내 생애 첫 집은 '주택'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해주셨지만. 도통 머리를 쥐어짜 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 생애 첫 주거지는 아파트였다. 내가 잠자리에 누웠던 집의 형태는 온통 아파트뿐이라... 그나마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지냈던 서울과 파리에서의 유학생활의 잠자리(원룸, 기숙사, 빌라)만 제외하면. 첫 신혼집도 아파트에서 출발했다.


  내 인생의 아파트를 굳이 세어본다면 8채. 아파트에서 지내왔던 삶이 내 인생의 팔 할이니 내 기억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 내가 살아왔던  도시,  고향은 아빠의 일터였다.  아이가 사는 고향이 현재 나의 일터와 은 것처럼. 돌아보면 부모님의 일자리에 의해 나의 주거공간이 정해졌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선택당한 . 3세 이후 19세까지의 주거지도 줄곧 아파트에서 살았다. 학교와 근거리에 위치한 아파트에 거주했는데, 회사 사택단지에 있었던 동네 아파트들이라 이름과 평수만 달랐지 획일적인 아파트에서 일상을 보냈다. '획일적'인 곳에 살아온지라 일상도 무료했다.


 아파트, 학교. 내가 이동할 수 있는 장소는 두 곳이었다. 동네에 유해시설 하나 없었다. 전봇대도 없는. 그러다 보니 색다른 삶에 대한 궁금증은 생기지 않았다. 공간이 주는 힘은 사람의 생각도 지배할 수 있기에. 가깝게 지낸 학교 친구들은 동네 친구였다. 아빠들의 직업과 회사도 다르지 않았다. 차이점이 보이면, 그 점이 눈에 띄었고 기억에 오래 남는 친구였다.


 유년시절에 유일하게 남은 기억을 꺼내보자면, 가족과 같이 국립공원의 휴양림에서 아침을 맞는 여행길이나 가족과 이동 중에 이어폰을 끼고 홍콩배우 여명의 노래를 들었던 것 일뿐. 그다지 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또는 쓰라리게 아픔을 주거나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던 기억은 생각나지 않는다. 참 무료하고도 조용한 삶이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고 많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말을 줄여나갔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지 않았다. 조용하고 표정이 어두운 아이였다.


 그런데 내 깊은 내면의 욕망을 자극한 곳은 대학교였다. 부모님 곁을 떠나, 아파트에서의 삶을 떠나보니 세상은 참 보고 배울게 많았다. 무언가 도전해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이 점차 늘어났다. 사람에 대한 궁금증도 많아서 삶에 대한 의욕이 적극적인 내가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할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기숙사 생활을 통해 타인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접하면서  ‘원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졌다. 나의 내면에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었던 시간들이었지만 타인의 삶과 말, 시선에도 많이 의존하며 살았다.

 

  내가 누린 것과 내가 누려보지 않았던 일상을 마주한 20대를 지나치고, 30대에 새 가정을 꾸려보니 10대와 비슷한 일상을 마주하고 있다. 아파트에만 살아봤으니 아파트에 사는 게 가장 편했다. 선택의 여지라곤 따로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니 무료하고 조용한 일상이 주는 힘이 얼마나 생애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됐다. '안정감'과 '안전함'이 아이라는 씨앗에게 주는 최고의 거름이라는 점을. 신뢰감을 주는 주거환경은 부모가 된 이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다. 과거에 내가 살아왔던 환경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게 시간이 흘러 내가 찾는 가장 안락한 방법을 선택할 때. 내가 살아온 방법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이렇게 사고의 폭이 좁아서야...’할 때가 있다.
(중략)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가장 많으니 무의식적으로 평균적 삶을 좇게 되었다. 평균적으로 사는 것에 대한 희망과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큰 것이어서 내가 어떤 성향인지, 어떤 주거 형태가 맞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에 충분한 시간을 쓰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_<집을 쫓는 모험> 중 정성갑 지음


 무의식적으로 쫓는 선택과 판단에서 아파트에 사는 게 내가 선택한 최고의 방법이었다. 평생 여러 아파트에 살아왔지만, 유년시절에 아파트에 대한 좋은 추억거리도 많았다. 아파트에 사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크게 생각 못했다. 꿈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공간이 초등학교 때 살았던 화목아파트였다. 일상을 살 때 가장 오래 기억에 머무는 시간이 초등학생(7-13세) 시기라서 그런지.. 그 당시 가장 좋은 기억들이 가득해서 2-30대에 처절하게 아프거나 힘들 때 꿈속에 나타나곤 했다.


 “삶에서 공간이 주는 추억이 가장 크다”라고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내가 가진 큰 추억을 술술 풀어보려 한다. 특히 아파트에 거주했던 기억들을 중심으로. 현재 살 수 없는 공간... 없어지거나 이동이 차단되어 갈 수 없는 곳은 기억 속에 오래 살아있다. 내 기억 속에서라도 존재해야만.. 하는 곳. 내가 머물었던 8채의 아파트 중 현재 사라진 아파트들도 있어서..기억의 보물상자를 이제 꺼내보려 한다. ‘’’’기록은 기억의 수명을 연장시켜주고 기록은 내 마음속에 각인되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집. 내가 초대해야 들어갈 수 있는 사적인 나의 집의 이야기를 더 늦기 전에 글로 저장하려 한다. 새로운 도시에서.




유년시절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던 초등학교와 오솔길.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추억들이 담겨있다. 초등학교 때 두번의 공연무대를 서봤던 아트홀 앞에서 아이와 작년에 발도장을 찍었다



아빠의 회사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그 야경. 지난해 아빠를 바래다 주며 잠시 들렸던 아빠 회사앞(중간 사진)  



내가 살아왔던 그 도시,
내 고향은 아빠의 일터였다.
내 아이가 사는 고향이 현재 나의 일터와 같이.
돌아보면 부모님의 일자리에 의해
나의 주거공간이 정해졌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선택당한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