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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네 Jun 02. 2021

파리, 서울, 세종

지금의 나를 만든 순간들 : 도시 편

5월 끝을 바라보는 지난주에 내년 달력을 선물 받았다. 예상하지 못한 선물이었다. 2022년이라.. 평소 222라는 숫자를 좋아한지라 개인 메일의 아이디에 222라는 숫자를 넣어 10년째 사용하고 있다. 나만의 행운의 숫자였던 222가 들어간 2022년 달력을 마주하며, 내년에 좋은 일들만 생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들떴던 기분을 뒤로한 채 달력을 찬찬히 펼쳐보았다.


달마다 노란색, 하늘색, 초록색, 갈색, 회색 등 여러 빛깔로 물들어진 일러스트 그림들이 눈길을 끌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지나갈수록 색을 발했던 이 달력처럼 내 자신에게 약속 하나를 했다. '나만의 색을 띄어보자. 그 누가 바라는 잣대가 아닌 나만의 안목과 경험으로' 그 색을 채울 수 있었을 거 같았다.


2022년 달력을 선물받을 줄이야.. 올해 잊지 못할 선물이 되었다! 피크닉의 <정원 만들기> 전시의 souvenir



파리에서 회색빛 색을 채우다


이 달력을 건네받았던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을 먼저 마주했다. 피카소가 만난 여러 영향력 있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파리'라는 도시를 떠올리게 됐다.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20대에 미술가의 꿈을 확장시키기 위해 파리에 왔다. 철 모를 21세.. 더 많은 기회를 찾아 파리에 자리 잡은 피카소와 달리 나는 부푼 꿈보단 파리에서의 1년간 삶은 두려움이 지배했다. 


최근에 1인 프로젝트 인터뷰를 통해 그해 파리에서 만난 동년배인 그녀를 15년 뒤에 다시 만났다. 서로 몸담은 대학교에서 각각 선발되어 교환학생 자격으로 수업을 받으며, 잠시 삶에서 스쳐갔던 그녀. 그녀를 인터뷰하며 청소년기 시절에 통역사라는 같은 꿈을 꾸며 최정화 통역사를 롤모델로 두었던 점에 더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녹취록을 풀며 그녀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니 20대의 풋풋함이 생각났다. 앞을 모르던 불안에 떨던 20대였던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은 '충분히 그 시간을 즐기라'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된다고. 다시 네가 돌아올 자리가 있으니 그곳에서 모든 것을 느끼고 맛보고 걸으라고. 거긴 파리니깐.."


서울과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그 막막한 도시에서 학보사 기자를 하며 오랫동안 꿈꾸던 해외특파원 롤모델을 여러 번 만났던 것만 해도 큰 경험이었다. 공간이야 어느 시점에 내가 오고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사람.. 결국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니깐. 돌아오니 파리에서의 삶보다,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게 큰 기회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또 한 번 파리를 가게 되면 내 인생의 큰 터닝포인트를 잡을 수 있을까 싶다.




사진 속의 혜정이는 여전히 밝고 예쁘고 건강한데
뭐가 그리 복닥이고 힘들었을까?
(...중략...)

힘내,
있잖아, 파리 있으면 느긋하게 마음먹어야 해.
한국은 후딱후딱 돌아가 1년이면 뭔가 엄청난 게 쌓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데 파리는 워낙 워낙 굼벵이처럼 돌아가 1년이라고 해봤자 한국에서 바쁘게 한 달 사는 것보다 되는 게 없어.
1년 새 뭔가 이뤄지길 기대하기도 힘들어.
여기서 배워야 할 건,
조급함을 버리는 것...
인생이 긴 완성의 과정이라는 것...
그걸 깨닫는 것만 해도 큰 수업이라고 봐.

2007.3 메일함에서
par 강경희 파리특파원



서울에서 다채로운 빛을 만나다


파리에서 돌아와서 취업준비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낼 때어느 고등학교에 교생 실습을 하러나갔다. 사실 선생님이란 직업보다 기자라는 직업에 더 매료된 시기라 경험을 쌓는다는 의미로 참여했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기에 프랑스어 발음이 제법 좋았고, 파리에서의 교환학생 경험을 학생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막상 불어를 잘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교생 수업 한 달간 느낀 점은 가르치는 스킬보다 학생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에 대한 고민한 기록이 있었다.   

 

어젠 두 번째 종례를 했는데 종례에 들어가기 앞서 다른 교생 선생님의 수업에 참관해보고 많이 느꼈다.가르치는 스킬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교생은 아이들과 더 쉽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어느 자리든 각자의 위치와 역할이 있든 그게 우리들의 임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깐 조금 더 편하게 종례를 할 수 있었다. 애들에게 장난도 쳐가면서 농담도 받아쳐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러니깐 내 마음에 평온과 평정이 왔다. 반티셔츠 사이즈 때문에 회장 종석이랑 욱신 각신하는 일도 오히려 더 가까워진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약속의 일부이니깐.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시는 2학년 2반의 원칙에 속하는 것에 포함되니깐.

이번 주 금요일 마지막 수업 때는 더 부드럽게 더 여유롭게 아이들을 보담아 주면서 수업에 임해야지. 수업 진도를 나가는 것보다 앞서 아이들과 소통하면서 아이들의 감정을 충분히 느껴가면서 둥글둥글 수업해야지. 그리고 파리에 있었던 많은 일들도 얘기해주면서 아이들이 프랑스에 대해 꿈꿀 수 있고 불어에도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아잣!

2018.5. 블로그 일기 중


아이들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고민이 커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기자로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이후 기자, 자료검색사, 월간지 기자, 웹진 에디터, SNS 채널 운영•기획자 등을 거치며 서울에서 다년간 일하고 싶은 직종에서 경험을 쌓았다. 서울은 파리와 달리 내가 하고 싶은 걸 모두 다 막힘 없이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도시였다. 피카소에게 파리가 기회의 땅이었다면, 서울은 내게 그랬다. 고향을 떠나 내가 바라고 생각하던 꿈을 이루게 해 준 도시.


프랑스에서 사는.. 대학교때부터 오래 인연을 이어온 동생이 준 souvenir


세종에서 초록빛에 스며들다


30대에 들어서면서 10여 간의 타지 생활에 진이 빠졌었다. 수많은 기회를 주는 그 도시가 어느 순간.. 왜 그리도 삭막하게 느껴지는지.. 지하철과 버스를 타며 출퇴근하는 일도 버거워졌다. 10여 간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이 아닌 새로운 도시로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서 이주했다. 오랜만에 서울에 들러 피카소전을 보며 20대에 홀로 즐겨봤던 예술의 전당의 여러 전시가 기억에 떠올랐다. 샤갈전, 오르세 미술관전, 마크 로스크 전 등 수없이 봤던 미술 전시들을 통해 감수성을 키웠다.


여러 전시들을 통해 가보고 싶은 해외 미술관은 '오르세 미술관' 이었다. 20대때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오르세 미술관에서 르누아르에 들러 피아노 치는 소녀들과 시골에서의 춤, 도시에서의 춤 등 그림을 마주한 순간, 르누아르를 더욱더 좋아하게 됐다. 피카소 또한 르누아르와 모네에게 영향을 받았고,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가 깊어졌던 이유를 어렴품이 알게 되었다.


르누아르 그림이 그려진 엽서, 송이님의 손편지.. 피카소전에서 사무실 동료들에게 선물할 souvenir, 그리고 예당 콘서트홀에 위치한 CD숍에서 만난 내 자신에게 주는 선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새해 달력을 품에 안고 르누아르 그림이 그려진 엽서 뒷면을 읽어보았다. “속도를 조절하면서 유연하게 헤쳐나가시는 것 같았거든요. 소네 님만의 장점. 색을 유지하고 오히려 더 짙어지도록 시간을 쌓는 모습을 보며 닮고 싶다!라는 존경의 마음이 생겼지요.” 라며 뒤늦게 내 색을 찾고 싶어 부캐를 만들기로 한 내 선택을 그녀는 힘을 실어주었다.


'나만의 색'은 고향을 떠나 객지(客地)에 머물렀던 이방인의 시각이었기에 채워질 수 있었다. 영원히 내가 머물 수 있었던 도시였다면, 공간이었다면 그렇게 조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공간이었기에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하고, 석사를 전공하는 등 재빨리 성과를 내야만 했다. 그렇게 나를 못 살게 굴었다. 30대 중반을 지나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이제야 알게 됐다. 그렇게 나를 독촉하지 않아도.. 이제는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기회를 찾고 있다.


기회는 내 안에 있었다. 새로운 도시에 이주하며 아이를 가졌고,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빽빽한 빌딩 숲보다 초록빛이 가득한 주거지에서 사계절을 느끼며 출퇴근을 하고 있다. 피카소 전시장에서 마주한 피카소가 말한 문구를 일상으로 돌아온 새로운 도시에서 나즈막히 읊조려본다. ‘보이는대로 자신의 삶을 그리지말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삶을 그려내면 더 빛이 날꺼라고.’



Je peins les choses comme
je les pense, pas comme je les vois.

나는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전시실 문구 중에서




 

 부록. 지금의 나를 만든 순간들 : 사람 편




공간이야 어느 시점에
내가 오고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사람..
결국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니깐.
돌아오니 파리에서의 삶보다,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게 큰 기회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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