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책에, 말하기를 좋아하는 너와 듣는 것을 좋아하는 나라는 표현이 있더군요.
솔직히 말해 주십시오 당신, 정말 듣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지금도 이 전에도, 나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떠오르는 생각들, 부끄러움, 상처와 일상, 행복을 말하고 공감받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듣는 것이 즐거웠던 적을 기억해보라고 하면 부끄럽게도 관심 있는 상대의 말을 경청한 후 공감하여 얻어낸 칭찬 내지는 연결감에 즐거웠던 기억뿐이네요.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지난날 나의 청자들에 대한 미안함과 일방적 청자였던 날의 끔찍한 경험들 때문입니다.
답답해서 터질 것 같을 때,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요청하여 앞에 앉아 있었던 수많은 청자들. 대부분 조용하고 말이 없는 친구들이며, 느린 동작으로 나를 이해해 줄 것 같았던 사람들이었죠. 그들 앞에서 울기도 하고 쉬지 않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이내 시간이 지나면 일방적 감정의 토로 대상이 되어준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밥을 사고, 좋은 곳에 데려가기도 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은혜갚음을 하였습니다.
청자가 되었을 때는 정확히 그 반대였습니다. 기꺼이 많은 시간을 쓰고, 상대의 감정에 잠식도 되었다가, 나의 의견을 죽이고 무비판으로 일관했다가, 무엇을 말해주어야 할까 괴롭게 고민하다가 대화가 마쳐지고 나면, 이튿날은 전일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화자를 만나고, 나를 대하는 방식이 아주 다름을 통해서 그날의 노력과 공감이 모두 잊힌 것 같은 느낌을 느껴야 했습니다.
상담사와 바람직한 관계를 이야기하던 도중 “소비되는 관계”라는 말에 모호했던 상처 받은 감정들이 비교적 언어화되고 명확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나의 미안함은, 그들을 소비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청자를 자처하여 나갔던 만남에 자괴감을 느꼈던 이유는 소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듣는 것을 좋아한다’는 표현은 이런 소비됨과는 거리가 있겠지요. 상대의 심연으로 같이 들어가 공감하는 기분 좋은 청자가 된 적이 더러 있기는 합니다만 궁금한 것은, 들어주는 경험을 어떻게 잘, 얼마나 많이 예쁘게 이루어 냈길래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듣는 삶을 살아오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