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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돌이빵 Mar 10. 2020

삼각 커피우유는 왜 더 맛있는 걸까?

작은 씁쓸함 뒤에 밀려오는 짜릿한 달콤함

예쁜 드레스 입은 쥬쥬 인형, 물 위에 띄울 수 있는 삑삑 소리 나는 오리만 있으면 됐다. 단출한 나의 손과는 다르게 엄마는 물이 빠질 수 있게 격자무늬로 구멍이 뚫려있는 플라스틱 바구니에 펌프가 달린 샴푸 겸용 린스, 비누,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려고 하는 닳아가는 샤워 타월, 색깔이 연해진 내 전용 연두색 이태리타월, 엄마용 노란색 때수건, 엄마가 발 뒤꿈치를 긁어내는 알루미늄 뚜껑, 동그랗고 납작한 통에 담긴 은박지를 벗겨 쓰는 니베아 크림, 얼굴 팩으로 쓰는 요구르트 슈퍼 100. 그리고 귤 몇 개를 챙기고 나면 목욕탕 갈 준비가 끝난다.


얼굴과 귀가 차갑게 달아올랐을 때쯤 도착해 "어른 한 명 어린이 한 명이요." 하고 입장하고 나면 내 안경에는 김이 서리고 따뜻하고 나무 냄새가 나는 탈의실이 나온다. 엄마는 내가 열쇠를 잃어버릴까 걱정이었는지, 여유롭지 않은 라커의 수를 걱정했던지 항상 한 칸을 고수했다. 맨 아래에는 신발을 넣고, 옷과 수건과 크림을 넣어놓고 잠그고 나면 엄마 발목에는 우리 집 대문 열쇠와는 다른 고무줄에 꿰어진 회색의 네모난 쇠에 세로줄이 몇 개가 간 것이 끼워졌다.


매의 눈으로 샤워기가 달린 자리를 탐색하는 엄마가 자리를 포착 한 뒤 때수건에 비누를 잔뜩 묻혀 플라스틱 의자와 플라스틱 바가지를 열심히 닦아 내면 이제 시작이다. 먼저 샤워타월에 비누를 묻혀 몸을 열심히 닦은 뒤, 따뜻한 온탕에 가서 몸을 불려야 한다. 이때에는 냉탕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혼난다. 때가 안 나온다나. 온탕에 들어가서 쥬쥬 인형과 오리랑 놀다가 뜨거움을 못 참고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하고 나면 엄마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른다.


이제 꼼짝없이 저 수술대처럼 생긴 비닐 장판 같은 것이 쓰인 침대에 누워서 때를 밀려야 한다. 엄마의 까칠한 노란색 이태리타월과는 다른, 많이 써서 새끼손가락이 들어가는 부분에는 구멍까지 난 닳아서 색이 연해진 연두색 때수건인데도 온몸이 빨개질 때까지 때를 미는 엄마가 야속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그러면 엄마가 목욕탕 아줌마 옆에 있는 큰 냉장고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삼각 커피우유를 사줄 테니까.


마침내 고문 같은 시간이 끝나고 머리를 감으면 오늘의 시련이 드디어 끝이 난다. 일어서서 샴푸를 묻히고 벅벅 문지른 다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엄마가 샤워기로 사정없이 폭포수 같은 물을 뿌려댄다. 눈에 거품이 들어가지 않게 눈을 꼭 감아야 하는데, 머리가 다 헹궈질 때까지 눈이 아프도록 꼭 감고 기다리는 동안은 앞이 캄캄하고 소용돌이 같은 블랙홀에 사정없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끝!"이라고 엄마가 말하면 이제부터는 자유다. 엄마가 발뒤꿈치도 긁어내고, 얼굴에 요구르트 팩도 하고 한증막도 들어가는 시간 동안은 이제 내 세상이다. 냉탕에서 플라스틱 바가지 두 개를 합쳐서 튜브로 만들어서 타기도 하고 물에 쥬쥬를 담갔다가 머리가 뻑뻑해져서 엄마 샴푸로 머리를 감겨줘도 차도가 없어 시무룩하고 있으면 엄마가 집에 가자고 날 부른다.


몸을 달달달 떨면서 물기를 닦아내고, 미끄러운 로션을 바르고 흰 로션이 스며드는 동안 100원을 넣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옷을 다 입고 나서 엄마를 쳐다보면 이제 500원짜리 하나를 얻을 수 있다. 아줌마가 커피 우유의 입구를 가위로 위를 잘라주고, 끝이 뾰족한 빨대가 밑으로 가게 '톡' 꽂아서 쪽쪽 빨며 평상에 앉아 이 달콤함을 만끽한다. 너무 세게 잡아 흘릴까 조마조마하면서 살며시 부여잡은 손과 투명한 비닐 안에 줄어드는 커피우유를 보고 있으면 한 모금씩 아껴먹게 된다. 고문 같은 목욕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얻은 씁쓸함에 감추어진 작은 달콤함이 오래오래 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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